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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u Sep 21. 2021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 작고 외딴섬에 처음 혼자 들어왔을 땐 두려움보다 설렘이 더 컸다. 앞으로 내 인생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 알 수 없어서다. 당장 내일이 궁금한 건 살면서 참 오랜만이다. 안 잘리고 이대로 잘만 버티면 향후 몇 년의 내 삶이 뻔히 내다보이던 서울 생활에서 도망친 게 은근히 통쾌하기도 했다. 다만 누구를 대상으로 한 통괘함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프로페셔널 다이버 트레이닝을 위해 꼬따오에 있는 여러 다이빙 센터를 신중하게 알아봤다. 전 세계에서 모인 젊은이로 가득한 사교적 분위기의 대형 다이빙 센터부터 작고 아담한 가족형 다이빙 센터까지 분위기도 다르고 트레이닝 스타일도 달랐지만, 웨스턴 다이빙 센터에서 영어로 트레이닝을 받아야겠다는 기준만은 분명했다. 프로페셔널 레벨 전까진 한국인 강사들과 다이버만 모여 있는, 이른바 ‘한인샵’이라 불리는 곳에서 좀 지내봤다. 한국에서 살다 온 사람들인 만큼 갑질과 남성우월주의, 성차별, 괴롭힘 문화는 여전했다. 이 아름다운 섬에서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말도 못 하고 앓기만 하는 어린 여성 다이버를 적지 않게 만났다. 한국 다이빙 커뮤니티는 지나치게 남성 중심적이다. 여성 다이버는 ‘기 센 여전사’ 아니면 ‘몸매 좋은 미녀 다이버’로 구분될 뿐이다. 누구도 여성 다이버의 실력엔 관심 없다. 바다의 자유로움 하나 바라보고 한국에서 도망쳐온 나다. 내가 함께 지내고 싶은 사람들과 커뮤니티를 찾아 여기까지 왔다. 이번만큼은 분명히 나에게, 선택권이 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도 끝내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찾은 한 다이빙 센터. 화려했던 과거의 명성을 뒤로하고 스러져가던 곳이다. 늦은 오후, 열대 섬의 후끈한 기운이 조금 식어갈 무렵, 태국식 작고 낮은 테이블에 앉아 담배를 태우며 차를 마시던 60대 영국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그 공간에서 눈을 마주칠 사람은 사실, 그 뿐이었다. “펀 다이빙 하고 싶은데…” 하고 영어로 더듬더듬 말하자, 그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어났다. 다음 날 오후, 그와 함께 다이빙을 했다. 아마 내 인생 가장 나이 많은 다이버와 함께 한 다이빙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이빙 역시 내 인생에서 가장 편안하고 아름다웠던 다이빙으로 남을 것이다. 그렇다, 다이빙은 이래야 하는 것이다. 따뜻하고 평화롭고 포근해서 한국을 떠나면서까지 본격적으로 시작하고자 결심한 다이빙, 이를 위해 기꺼이 바꾸기로 한 내 삶. 다이빙을 지속하는 삶을 위해 프로페셔널 다이버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또다시 다이빙은 나에게 넘어야 할 목표와 미션이 되었고, 경쟁심과 압박, 스트레스가 다시 엄습했다. 그러던 차에 우리 아빠뻘인 사람과 함께 한 다이빙은 다시 한 번, 내가 왜 다이빙을 시작했고 이 섬까지 오게 됐는지 나를 돌아보게 했다. 다이빙을 마치고, 나는 바로 마음을 정했다. 이곳에서 다이빙 커리어를 쌓아야겠다고. 바로 그 테이블에 앉아 있던 60대 다이브마스터, 케빈 때문이었다. 


이 섬에서 15년 가까이 다이빙 강사로 살아온 클라우드가 다이빙 센터의 유일한 트레이너였다. 선택의 여지없이 그는 나의 멘토가 되었다. 사르카즘이 가득한 영국식 조크와 런던식 슬랭으로 가득한 티타임으로 매일 아침을 시작했다. 시니컬한 영국인 클라우드와 젠틀하고 다정한 영국인 케빈이 옥신각신하는 걸 나는 70% 정도 알아듣는 영어 실력으로 지켜보며 어색하게 싱긋거렸다. 가끔 클라우드는 평소보다 더 깊은 동굴을 파고 들어가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몇 년 전 함께 살던 태국인 여자 친구가 암으로 투병하다 세상을 떠나서라고 했다. 그는 여전히 자신만의 방식으로 애도 중이었다. 언제나 틱틱거리고 까칠하면서도 은근히 사람들을 챙겨 미워할 수 없는 묘한 매력을 풍기는 사람이었다. 다이빙 티칭의 미학을 완성한 그에게 꼬따오 다른 다이브 센터 쟁쟁한 강사들도 자신들의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을 그에게 보내곤 했다. ‘세상 누구도 이 사람은 다이버로 못 만들 거야’라며 모두가 포기할 때도 희한하게 그와 함께 하면 모두 좋은 다이버가 됐다. 당시 초보 강사인 내 눈엔 그가 마법이라도 부리는 것 같았다. 눈을 크게 뜨고 그의 티칭을 지켜봐도 어떻게 그런 마법을 부리는지 나는 알 길이 없었다. 클라우드는 외모와 성격, 실력, 모두 미드 <하우스>의 휴 로리 같은 사람이었다. 까칠하고 시니컬한 사람이 물속에만 들어가면 천진난만한 아이로 변했다. 다이빙과 티칭 스킬부터 삶에 대한 애티튜드까지, 나는 모든 걸 그에게서 배웠다.


다이브마스터를 거쳐 다이빙 강사가 되기까지, 나 스스로 한계를 정하고 그걸 뛰어넘지 못해 자책하거나, 아직 가보지도 않은 길 앞에서 망설이는 나를 뒤에서 밀어주고 앞에서 끌어준 게 바로 클라우드와 케빈이었다. 영어로 외국인에게 다이빙을 가르쳐야 하는 압박감과 콧대 높은 유러피언들을 상대하며 자꾸만 낮아지는 자존감, 그리고 자신감이 그들의 도움과 지지로 서서히 회복됐다. 나는 그렇게 좋은 다이버이자 강한 트레이너가 되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 역시 없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던 꼬따오에서 나를 처음으로 보듬어준 첫 가족이었다. 그리고 꼬따오에서 잃은, 첫 가족이 되기도 했다.


언젠가 클라우드는, 자신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다이빙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온 잡지사 후배가 다이빙 코스를 마치고, 다시 한국 일상으로 돌아가기 싫다고 푸념하자, 클라우드는 한 눈을 찡긋하며 “One day at a time”이라 말했다. 유독 그의 말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건, 그리고 얼마 후, 클라우드가, 어느 보통의 날 아침, 자신만의 ‘원 데이 앳 어 타임’을 그만두기로 했기 때문이다. 코스가 시작되기로 한 아침이었다. 다이빙 교육생들이 모여 그를 기다리는데 나타나지 않았다. 몇 년 간 그가 다이빙 수업에 늦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느낌이 이상했다. 다이빙 센터와 가까운 그의 집에 들어가 마당을 둘러봤다. 그가 10년 넘게 길러온 강아지 ‘재미’가 반갑다고 나에게 안겼다. 무심결에 집안을 쓱 둘러보고 인기척이 없어 다시 센터로 돌아왔다. 그러고도 기별이 없어, 이번엔 친구와 함께 다시 그의 집에 갔다. 집 뒷마당을 확인하고 나온 그 친구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알았다. 그가 거기 있었다고. 


그 뒤론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나는 울며불며 고함을 지르며 맨발로 다이브 센터까지 뛰어왔고, 쓰러졌다. 정신이 들었다 났다 했다. 몇 시간 후, 클라우드의 페이스북 계정에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대사 “So Long and Thanks for all the Fish”가 예약 포스팅으로 올라왔다. 난생처음 태국 경찰서에 가서 진술도 했다. 하필 케빈이 영국에 가족을 만나러 간 시기이기도 했다. 나는 케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차 때문에 자다 깬 케빈의 “헬로” 한마디에 나는 오열했다. 그리고 케빈은 다음 날 비행기를 타고 꼬따오로 돌아왔다. 클라우드의 홀어머니는 몸이 불편해 영국에서 태국까지 이동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꼬따오의 유일한 가족인 우리가 그의 장례를 치렀다. 섬에 있는 유일한 사원에서 화장을 한 뒤, 유해는 그가 가장 좋아했던 다이브 사이트 ‘그린 락’에 뿌렸다. 얼마 후,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을 새겨 넣은 기념비를 만들어 같은 곳 바닥에 가라앉혔다. 그리고 또 얼마 후, 클라우드가 키우던 강아지 ‘재미’도 세상을 떠났다. 


이 섬에 들어오며 가졌던 설렘과 환상은 한순간에 비극이 되었다. 나를 힘들게 한 건 클라우드의 죽음 자체보다 그의 죽음으로 드러난 사람의 민낯이었다. 전 세계에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 “클라우드가 대체 왜 자살을 했냐?”며 나에게 따져 물었다. 마치 그의 자살을 막지 못한 나를 나무라는 것 같았다. 나조차 모르는 이유를 설명할 수도 없었고, 클라우드와 그리 가까웠고 잘 아는 사이라면 내가 그 사람들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평소 연락도 잘 않던 사람들이 왜 이제와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에 슬퍼하고 애도하기보다 죽음의 이유와 가십에 관심을 두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화가 났다. 사람들이 미웠다. 그러지 않아도 이미 나는 어둡고 깊은 자책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 섬의 모든 사람들이 내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 같았다. 진짜와 가짜, 구분조차 힘들었다. 다이빙도, 이 작은 섬도, 내가 그리 아름답다 여겨왔던 이 섬의 커뮤니티도, 사람도, 내 삶도, 모두 산산조각 났다. 알게 모르게, 여기저기, 안으로부터 밖으로부터 나는 조금씩 상처를 입었고, 아주 오래도록 피가 배어 나왔다. 하지만 그때 나는 그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


한국에 있는 엄마는 당장 돌아와 심리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나는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바닷속 세상을 처음 만났던 일본 이시가키 섬으로 떠났다. 그곳엔 내가 다이빙 입문 과정을 도와준 다이빙 강사이자 프랑스 친구 벤이 여전히 살고 있었다. 그곳에 도착한 후로도 한동안 벤은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며 따져 묻지 않고 그저 말없이 내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고, 짙은 어둠이 깔린 한밤 중 달빛 아래 내가 겪은 일을 벤에게 조용히 말했다. 영어로 내 감정을 표현하니 마치 그 감정이 내 것이 아닌 듯 객관화됐다. 마치 밖에서 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느낌,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을 기술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아지랑이처럼 흐릿하고 뒤엉켰던 모든 것이 점차 선명해지고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클라우드는 스스로 세상을 떠나기로 택했다. 내가 미리 알았다면, 그래서 그의 자살을 막을 수 있었다면, 그의 삶은 달라졌을까. 그가 세상을 떠나기로 한 이유를 내가 수백, 수천 가지를 떠올린들 그게 이제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앞으로 사는 내내 이 죄책감과 슬픔과 분노를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 나는 스스로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앞으로, 또다시, 어떻게 살 것인가.  


내가 애정을 갖고 가꾸던 것은 모두 상처로 귀결된다. 가족, 친구, 커뮤니티, 회사, 나라, 지구, 규모와 성격만 다를 뿐 스스로 상처투성이라 이름표를 붙인 나는 이 세상 어떤 관계에서든 계속 상처만 받을 뿐이다. 클라우드의 죽음으로 자괴감에 빠져 스스로 괴롭힌 나머지 자기 파괴에 가까워지도록 상처를 마주하고 들여다본 후, 나는 일본 이시가키 섬에서 태국 꼬따오로 돌아가기로 했다. 나에게 희망이었던 섬이 저릿한 상처가 되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순 없었다. 평생을 살던 한국에서 이 외딴섬까지 도망쳤는데, 여기에서 또다시 도망치면, 나는 계속 도망만 다니게 될 것 같았다. 슬픔과 절망과 외로움, 인간의 민낯을 인정하고 마주하기로 했다. 감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치유의 시작이라는 걸 깨달았다. 스스로 못 본 척, 모른 척했던 감정을 마주했다. 그리고 조금씩 나 자신을 용서하기 시작했다. 때론 누구의 잘못도, 의도도 아닌 기묘한 일이 생기기도 한다.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이 세상과 내 삶의 모든 걸 통제할 수 없다. 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나에게만 상처를 주는지 억울해 울부짖던 외침도 멈췄다. 내가 받은 모든 상처는 스스로 만들었다. 


다시 이 섬에 돌아와 다이빙 강사 일을 이어갔다. 클라우드에게 배운 모든 가르침을 내가 이어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까이 아끼고 존경하던 이의 죽음이 나에게 가르쳐준 비밀은 바로 ‘삶’ 그 자체였다. 죽음이 있기에 유한하고 아름다운 삶. 그가 어떤 삶을 살다 갔다 느끼는지 클라우드 자신 말곤 말해줄 사람이 없으나,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가 살다 간 45년간의 경험 자체가 하나의 삶인 거니까, 그에 의미를 두면, 나는 지금 괜찮다. 다이빙 팬츠를 고이 세탁해 접어두고 세상을 떠난 그의 마음을 이제는 조금,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세상에 ‘좋은’ 삶과 ‘나쁜’ 삶은 없다. 우리는 그저 어떤 형태로든 나름의 삶을 살다 갈 뿐이다. 그래서 모든 삶은 빛나고 소중하다. 그래서, 내 남은 삶을 충실하게 살기로 했다.


클라우드가 떠난 지 몇 년 후, 서로 기대며 돌보던 케빈도 세상을 떠났다. 꼬따오에서 만난 태국인 여자 친구와 함께 섬을 떠나 태국 북부 시골마을로 이사 간 지 얼마 안 되어서다. 며칠 전에도 영상 통화로 사랑과 응원을 전하던, 나에겐 또 다른 아빠 같은 존재였다. 내가 다이브마스터가 되었을 때도, 강사가 되어 첫 교육생을 가르칠 때도, 이후 커리어를 발전시켜 갈 때도, 다른 대형 다이브 센터로부터 스카우트되어 떠날 때도, 케이브 다이빙에 도전하기 위해 멕시코로 떠날 때도, 그리고 다시 이 섬으로 돌아왔을 때도, 언제나 케빈이 거기 있었다. 입수 전 다이빙 보트에서 케빈이 아침에 깨어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바닷속에서 한참을 조용히 울었다. 영국에 있는 케빈의 딸 엠마에게 소식을 전했다. 팬데믹으로 그의 가족은 태국으로 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케빈의 장례식은 온라인으로 치러졌다. 그래서 나에겐 케빈의 죽음이 지금도 현실 같지 않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기억은 점점 망각의 바다로 빠져간다. 끔찍한 기억을 스스로 지우려는 본능이다. 점점 클라우드와 케빈의 죽음은 나에겐 일어난 적 없는 상상처럼 멀어져 간다. 이십 대와 삼십 대, 나에게 ‘죽음’이라는 건, 잡지사 에디터 시절 인터뷰했던 영화감독이나 뮤지션과 나누던 추상적인 대화 소재였다. 얼마나 교만하고 어리석었나. 이 섬에서 처음으로 죽음이 내 곁에 가까이 맴도는 걸 체감했다. 그리고 겸손해졌다. 엄마, 아빠, 내 주변 가까운 모든 이의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이 모든 상념은 결국 나, 바로 나 자신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아직도 모자라고 부족하고 갈 길이 먼 나는 여전히 죽음이 끔찍하게 무섭고 두렵기만 하다. 내 마지막 순간을 예상하거나 직접 결정하고 통제할 수 없다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나에게 주어진 삶의 1분 1초를 살아내는 것뿐이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며 사는 삶. 


케빈이 떠난 이후, 그가 입버릇처럼 헤어질 때면 하던 말 “Be Good”을 기념비에 새겨 바닷속 클라우드 옆에 내려놓았다. 오래된 커플처럼 늘 옥신각신하던 두 사람이 이제 바닷속에서 영국식 티타임을 가지며 축구 얘기도 하고 내 흉도 보면서 지낼 모습이 선하다. 사람들의 영혼은 죽음 이후 모두 어디로 가는지 궁금했다. 나는 이제 그 영혼이 바다로 간다고 믿는다. 내가 사랑했던,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바닷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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