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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Oct 10. 2024

15. 웰컴 투 네버랜드


 다음 날 아침, 그녀는 다시 다이빙 센터를 찾았다. 입구 앞에서 눈치를 보고 쭈뼛거리고 서 있는 그녀를 발견한 케빈은 오랫동안 못 본 사람이 찾아온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큰 웃음을 지으며 반겼다. 그는 부드러운 포옹과 함께 그녀의 양쪽 볼에 입을 맞추는 시늉을 했고 여전히 그런 인사가 어색한 그녀는 허리를 숙인 채 어정쩡한 자세로 얼어붙었다. “헬로, 선샤인! 어서 이리 와 앉아. 차 한 잔 줄까?” 케빈은 자신을 닮은 미니언즈 캐릭터가 그려진 커다란 머그잔에 이제 막 티백을 넣고 우려낸 뒤 우유를 조금 부은 참이어서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그의 머리 위로 열대 섬의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며 송골송골 땀이 맺히기 시작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실 달콤하고 구수한 한국식 커피믹스가 간절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얼마 전 영국 친구가 가져온 요크셔 티백이 있는데 아주 맛이 좋단다.” 케빈이 새 머그잔에 그녀의 차를 한창 준비하고 있는데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격에 은발의 곱슬머리, 투명하고 날카로운 파란빛의 눈을 한 남자가 나타나 무심하게 그들의 테이블 의자에 풀썩 앉았다. 순간 그녀는 자신이 즐겨보던 미드의 주인공 휴 로리가 걸어들어온 줄 알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날의 숙취로 욱신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F**k, f**k, f**k!”을 외치며 짜증 내는 그의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 그녀는 불쾌하기보다 재미있게 느꼈다. 익숙하다는 듯 케빈은 그에게 “티?”하고 물으며 대답을 듣기도 전에 미리 준비된 빈 머그잔에 티백을 넣고 물을 부었다.      


 “인사해, 하나. 이 친구는 이 다이빙 센터 매니저 클로드야. 클로드, 이쪽은 내가 어제 말한 친구, 하나.” 그러자 잔뜩 찌푸린 미간 아래 충혈된 눈을 반쯤 뜨고는 클로드가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오, 미안.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벌받는 중이야.” 그녀는 씽긋 웃으며 “괜찮아. 그런데 ‘닥터 하우스’ 닮았다는 소리 많이 듣지 않아?” 하고 물었다. “호호호호!” 클로드는 산타클로스 같은 소리를 내며 입으로만 웃고 눈으로는 ‘요것 봐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농담에 놀란 건 누구보다 그녀 자신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긴장하며 거울을 보고 오늘 이어질 대화를 예상하며 영어로 수십 번을 연습했건만 이런 내용은 애초에 없었다. 그녀의 가벼운 농담이 의도대로 전해지지 않으면 어쩌나, 클로드가 자신을 건방지게 보면 어쩌나 잠시 걱정했지만, 어차피 존댓말이 있는 언어를 쓰는 것도 아니고 이미 그녀 앞에서 아주 편해 보이는 그에게 대단한 격식을 차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쩌면 한국에서 나고 자란 한국인들끼리 한국어로 대화하는 게 그녀에겐 더 힘든 일이었다. 행간 사이사이에 숨은 의미와 미묘한 감정을 알아채야 하고 때론 기싸움도 불사해야 한다. 적어도 케빈과 클로드는 영어가 그녀의 모국어가 아니란 걸 안다. 그래서 그녀의 실수에 관대하리라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케빈과 클로드는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또는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그녀를 자유롭게 했다. 그녀는 엄마와 아빠, 주변 사람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 유아기로 돌아간 것처럼 영어를 좀 더 용감하게 쓰기로 작정했다.    

  

 이미 맨발이었던 클로드는 점점 강해지는 햇빛에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고 던지고 보드쇼츠만 입은 채 느릿한 걸음으로 이곳저곳을 걸어 다니며 몇 가지 일을 체크하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한국에서 왔다고?” 클로드는 티백이 우려진 거뭇한 차에 우유를 조금 붓고 저으며 말했다. 그렇다는 그녀의 말에 케빈은 클로드에게 귓속말하는 척하면서도 모두 들리게 “사실 하나는 북한에서 온 스파이야. 닌자 같은 거지”라며 키득거렸다. 이어서 “하나, 우유 좀 부어줄까?” 케빈이 물었고 영국식 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악의라곤 하나도 없는 귀엽기까지 한 그의 농담에 신경이 쓰였다. 그녀는 이 섬에서 많은 서양인을 만나며 조금씩 이 ‘북한’과 ‘남한’에 대한 농담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는데 한편으론 딱히 알려진 게 없는 나라의 몇 안 되는 주제가 분단이라는 게 어쩐지 서글프기도 했다. 그녀는 사르카즘 가득한 농담을 차를 홀짝이며 우아하게 주고받는 게 하루 대부분의 일과인 두 영국인의 일상 가운데 앉아 있음을 실감했다.     

 

 “닌자는 일본이고….” 그녀는 소심하게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케빈이 만들어 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웩!” 그녀는 하마터면 입에 머금었던 차를 뱉을 뻔한 걸 겨우 참았다. 뭉근하고 밍밍하고 뜨끈한 맛에 비릿한 우유 냄새가 더해져 역한 느낌이 몰려왔다. 동시에 그녀는 이 충격적으로 맛없는 느낌을 어떻게 영어로 예의 바르게 설명해야 하는지 재빨리 머릿속의 단어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미 모든 걸 설명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케빈과 클로드는 배를 잡고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녀는 조금 더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영국식 티가 뭐 그리 유명한가 기대했는데… 정말 미안하지만… 이걸 왜 먹는 거야?” 여전히 표정을 풀지 못한 채로 그녀가 불평하자 클로드가 바로 답했다. “오, 우리가 괜히 영국 출신이겠니. 우리는 맛 따위는 신경 안 써. 호호호호. 우리가 이걸 하루에 몇 잔이나 마시는지 알면 엄청나게 놀라겠군.” 

    

 “케빈이 그러더라. 너 다이빙 잘한다고….” 클로드가 본격적으로 다이빙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케빈에게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맞아. 하나, 정말 너 다이빙 잘해. 물속에서 얼마나 편안하고 우아하게 움직이던지….”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이 다이빙을 잘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형식과 함께하는 코스 동안 그녀가 얼마나 못하는지 집요하게 세뇌당했기 때문이다. “내가 다이빙을 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이빙을 사랑하는 것만은 확실해. 그래서 말인데… 나, 여기서 트레이닝할 수 있을까? 여기 한국인이 없다는 건 케빈에게 들었어. 하지만 나 좋은 강사가 되고 싶거든. 정말 열심히 할게.” 그러자 클로드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안 될 게 뭐 있어?” 하고 까칠하고 친절하게 말했다. “내가 이 섬에서 다이빙하며 산 지 한… 15년쯤 됐나? 이젠 내가 런던에서 왔다는 걸 알려주는 건 이 형편없는 맛의 티백뿐이지. 호호호호. 여긴 네버랜드 같은 곳이야. 네가 어디서 왔든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지. 아, 그리고 열심히 할 게 따로 있지, 다이빙을 왜 열심히 해? 재미있게 해야지.” 마침, 부드럽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와 다이빙 센터 앞 낮은 티테이블에 옹기종기 둘러앉은 세 사람의 웃음소리를 기분 좋게 감쌌다. ‘열심히 하지 말라고?’ 그녀는 이전에 살던 곳에선 절대 만날 일 없었을 두 피터팬과 네버랜드에서 마주 앉아 입맛에 영 맞지 않는 그들의 티만큼이나 낯선 삶의 방식을 목도했다.  

     

 케빈은 그녀를 다이빙 센터 이곳저곳을 보여주며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소개했다. 리셉션에서 일하는 태국인 미미와 진, 식당에서 일하는 마이, 모두 그녀를 반갑게 맞았다. 이곳을 총괄하는 매니저 클로드와 다이브마스터 케빈을 제외한 다른 강사와 다이버들은 지금 바닷속에 있었다. ‘바닷속에 있다’라는 문장은 언제나 그녀를 설레게 했다. 앞으로 여기서 트레이닝하는 동안 그녀가 원하면 언제든지 다이빙할 수 있다고 클로드가 말했을 때 그녀는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소리를 질렀다. 들뜨고 흥분된 마음으로 그녀는 또다시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저… 미안한데, 뭐 하나 물어봐도 돼?” 그녀가 묻자 클로드가 답했다. “너 그동안 예의 바르게 사느라 엄청 피곤했겠다. 호호호호. 앞으로는 적어도 나에겐 언제든, 무엇이든 미안해하지 않고 물어봐도 돼.” 맞는 말이었다. 그녀는 과도하게 예의를 따졌고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기준에 맞는 도덕성을 따랐다. 그리고 그에 대해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당신은 왜 눈은 웃지 않고 입으로만 웃어?” 오늘 조금 터득한 영국식 사르카즘이 섞인 농담을 서툴게 건네자,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말했다. “그게 바로 파라다이스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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