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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Jul 20. 2020

플렉스 하지 않아도 괜찮아

적게 벌어 적게 쓰기

취업 후 갓 돈을 벌기 시작할 즈음 책 한 권을 인상 깊게 읽은 기억이 있다. 소비를 주제로 실험적인 삶을 사는 일본의 작은 공동체 이야기였다. 일본 수도인 도쿄 외곽 주택에 사는 이들은 적게 벌어 적게 쓰는 것을 목표로 여러 시도를 해 나갔다. 마당에 작은 텃밭을 가꿔 식재료를 자급자족하고, 태양광 시설과 빗물탱크를 설치해 물과 에너지를 얻었다.


여기까지 읽으면 이들의 삶은 그저 자급자족에 초점을 맞춘 전원생활로 보인다. 하지만 내가 흥미를 느낀 부분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농부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도시 외곽에서 살뿐 모두 별도의 직업이 있었다. 대중교통을 타고 도심으로 출퇴근하는 일상은 여느 도시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특별한 점이라면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많은 현대인의 소망과 달리,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적게 버는 삶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이들인 직업 선택에 있어 돈이 아닌 관계와 여유를 중심에 둔다. 내가 지역 사회의 구성원들과 어떤 유기적인 관계를 맺을 것인가, 그리고 그 관계에서 오는 행복에 감사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가가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이렇다 보니 9 to 6의 직장생활에서 벗어나 짧은 시간만 일하는 사람도 있고, 남들이 보기에 그렇게 멋들어지게 보이는 직업에 종사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적게 벌어 적게 쓴다는 신념대로 이들이 버는 돈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최저생계비 수준의 월급만 받아도 크게 상관없다. 소비를 적게 하는 구조를 이미 갖춰놓았기 때문이다. 자급자족할 수 있는 집에 살며 아파트 대출에 허덕이지 않는다. 돈 대신 선택한 여유 시간에는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고, 직접 물건을 만들거나 텃밭을 가꾸는 등 하고 싶은 일을 충분히 하며 여가시간을 즐긴다. 스트레스 해소를 목적으로 충동적인 소비를 할 일이 없는 셈이다.


엄마랑 이모랑 10리 걸어 마트 가는 길


나에게 이번 시골생활은 직접 적게 벌어 적게 쓰는 실험을 할 기회였다. 이 책을 읽을 때만 해도 다른 세상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시골에서는 가능했다. 이 곳에서는 기본적으로 돈 쓸 일이 적다. 집부터 보자면 우선 아파트 관리비가 안 든다. 창문만 열어도 산바람이 불고, 종일 해가 잘 들어 냉난방비도 적게 나온다. 식재료는 꼭 농부가 아니더라도 먹을 만큼 텃밭을 일구며 절반 정도 자급자족할 수 있다. 웬만한 생활을 모두 마을 안에서 하니 교통비도 안 든다.


무엇보다 쇼핑에 돈 쓸 일이 없어졌다. 물건이 눈에 보이면 사고 싶어 지는 법이지만 여기서는 동네 마트도 차 타고 10분을 나가야 한다. 거리가 멀다 보니 귀찮아서라도 소비를 지양한다. 보여줄 사람이 없으니 사치품을 사지 않는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부를 과시한다는 의미로 쓰는 '플렉스'도 시골에선 소용없는 말이다.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날이면 홧김에 소비하곤 했던 시발 비용도 없어졌다. 덕분에 휴직 후 통장에 들어오는 돈이 없더라도 아주 적은 돈으로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


이 생활에서 느낀 점은 아예 시골로 이사를 해야겠다던가 허리띠를 극도로 졸라매야겠다는 비현실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도시에 살면서도 내가 원한다면 적게 벌어 적게 쓸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봤다. 욕심내서 빚을 만들지 않고, 도시 내에서도 소비지향적인 곳을 벗어나 커뮤니티 활동이 가능하고 자연친화적인 곳에 터를 잡는다면 말이다. 적게는 홧김에 하는 소비나 보여주기 위한 소비만 줄여도 한결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싶다. 눈 앞에 한 푼을 더 벌기 위해 영혼을 갈아 넣는 직장생활보다는 마음의 여유와 행복에 중심을 두는 삶이 나는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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