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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Jun 29. 2020

깨 심은 데 깨 안 나면 어때

실패의 가능성 받아들이기

대학시절 나와 동기들에게 '아님 말고'로 불렸던 한 선배가 있었다. 겉보기에도 수더분하고 숫기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선배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던 동기 A양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 것은 모두가 놀랄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선배의 용기 있는 고백은 로맨스가 아닌 놀림거리로 회자된다. 데이트 신청에 대한 답이 채 이뤄지기 전에 덧붙인 '아님 말고'라는 말 때문이다.


'아님 말고', '안되면 말고' 식의 말은 지금 들어도 멋이 없다. 일관성 없고 줏대 없는 사람이 쉽게 할 법한 이야기로 들리기 때문이다. 선배의 고백 일화를 놓고 '차라리 말을 꺼내질 말지'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시작했다가 그만둬 버릴 테면 시작도 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도 느껴진다.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잘라야 한다는 이야기다. 


선배를 한심하게 생각했던 사람 중에 한 명인 나 역시 시작을 했으면 끝을 봐야 하는 사람으로 살았다. 목표를 정하면 그럭저럭 해내는 편이었고,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어려서부터 꿈꿨던 직업을 가졌다. 성취하는 모습, 앞서 나가는 모습, 남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컸다. 안 될 거라는 생각을 하는 것부터가 패배였다. '아님 말고'가 될까 봐 도전하지 않은 일도 많아졌다.


그런 내게 '아님 말고' 투성이인 시골생활은 낯설게 다가왔다. 프로 농사꾼들의 여유 속에는 언제나 '아님 말고'가 있었다.  70여 년 평생을 농사짓고 살아온 이모도 그랬다. 


5월 초 파종한 깨가 싹을 틔우기 시작할 즈음 이모의 밭에선 실패의 전조가 보였다. 이랑에 촘촘히 심은 깨에서 연둣빛 싹이 올라온 이웃 밭들과는 달리 이모의 밭에서는 한참을 기다려도 싹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한 주를 더 기다려도 마찬가지였다. 


산책길 이웃의 밭을 엿보며 걱정을 키우던 엄마와 나와는 달리 프로 농사꾼의 반응은 의외로 덤덤했다. 끝내 싹을 틔우지 못한 이랑들을 바라보며 "싹 안 나면 말지 뭐"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환하게 웃으면서. 


처음에는 1년 농사를 망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아님 말고'를 외칠 수 있는 것이 대단해 보이면서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후 깨심은데 깨가 안나도 다른 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이모가 여유로울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알았다.


깨에서 싹이 안 나면 따로 길러둔 깨 모종을 심으면 되고, 그것도 아니면 참깨를 심으면 그만이었다. 처음 계획이 실패하더라도 다른 길이 많았다는 것을 이모는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님 말고'가 가능했던 가장 큰 이유는 모든 것이 뜻한 대로 될 수 없다는 자연의 섭리를 누구보다 밀접하게 체득했기 때문이리라. 


이런 섭리를 아는 사람에게 실패는 대단한 일이 아닌 듯했다. 마늘농사가 잘 안 되는 것 같다며 푸념하는 농부, 풀을 매고 또 매도 계속 난다고 하소연하던 이웃들은 눈은 언제나 웃고 있었다. 해보는 데까지 해보고 아니면 어쩔 수 없다는 그들의 생활에는 실패가 있을지언정 패배는 없었다. 


시골에서의 생활은 성패에 대한 내 오랜 생각을 돌아보게 했다. 깨 심은 데 당장 깨가 안 나면 어떤가. 해 보지도 않고 접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어차피 모든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될 수 없다. 실패의 가능성을 유연하게 받아들일 때 또 다른 길도 보이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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