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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에 Aug 13. 2022

4. 오렌지족

이사무는 대학에 합격하자마자 돈을 벌기로 했다. 마침 어머니가 아시는 분이 압구정동에 있는 유명 레스토랑에서 매니저를 하고 계셔서 면접 날짜를 잡았다.

드디어 면접일이 되었다. 인생 최초의 면접이라 그런지 긴장감이 많이 느껴졌다.

"S대 합격했다며? 공부를 잘했나 보네"

"네. 그런 저럭요"

"근데 왜 놀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해?"

"돈을 벌고 싶어서요"

"주말에도 쉬지 않고 일해야 하는데 괜찮겠어?"

"네.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내일 아침부터 출근해"

"네. 감사합니다"

1990년대 후반 당시에는 압구정동이 서울의 핫 플레이스였다. 강남에 거주하는 부자 부모를 두고 화려한 소비생활을 즐기는 오렌지족이 1990년대 초에 압구정동에 모이면서 크게 이슈가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사무가 근무하던 레스토랑에도 당시 큰 인기를 누리고 많은 돈을 버는 아이돌 가수와 프로야구 선수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특히 이사무가 가장 좋아하던 핑클의 멤버들도 그곳의 단골이었다. 그래서 항상 핑클의 테이블은 이사무가 담당을 하였고 주문이 끝나면 설레는 마음으로 사인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네 명의 멤버 중 이사무가 가장 좋아하는 한 사람에게는 끝까지 싸인을 요청하지 않았다. 왠지 강한 남자로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사무도 자신감이 넘치던 시절이라 긴 생머리의 그녀와 연인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한 것 같다.

손님이 별로 없는 평일 아침에는 드라마나 영화 촬영도 자주 이루어졌다. 이사무가 직접 보진 못했지만 비밀연애를 하던 유명 연예인 커플이 한적한 구석 테이블에 앉아 스킨십을 하는 모습을 목격한 동료 알바도 있었다.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이 되면 외국에 유학을 가있던 부유층 자제들이 귀국해서 한자리에 모였다. 낮에는 레스토랑에 모여 영어를 자연스럽게 섞어가며 대화를 나누고 밤이 되면 근처 유명 나이트클럽에 고급 외제차를 끌고 가서 이성을 만나는 것이 그들의 생활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훗날 이사무와 결혼하게 된 김실장도 그 시절 친구들과 함께 그 레스토랑을 자주 방문하였다고 한다.

가난한 가정형편 때문에 돈을 벌고 싶던 이사무는 그곳에 오는 유명인들과 부유층 자제들의 생활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삶의 방식에 물들기 시작했다. 월급날이 되면 힘들게 번 돈을 저축하는 게 아니라 같이 일하는 직원들과 압구정동을 누비며 유명 브랜드의 옷과 신발을 사고 밤새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즐겼다. 학기가 시작되면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다가 방학이 되면 다시 그 레스토랑에서 일하면서 욜로의 삶을 보냈다. 

당시 압구정동을 배경으로 정우성과 이정재가 주연 배우로 출연한 '태양은 없다'가 인기를 끌면서 이사무도 그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되었다. 영화의 OST인 Love Potion No.9를 들으면서 압구정 로데오 거리를 활보했다. 또 레스토랑에 자주 오던 힙합그룹의 노래를 좋아하게 되면서 국내외 유명 래퍼들의 음반을 수집하였다. 가장 좋아하던 드렁큰타이거를 따라 술을 뜻하는 한자로 만든 은목걸이를 목에 항상 걸고 다니기도 했다.

그 무렵 이사무는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던 여자아이와 친해져서 사귀게 되었다. 압구정 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였는데 둘이 만나면 같이 스티커 사진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그 아이의 동네 친구들과 함께 만나면 뭔가 알 수 없는 이질감이 들곤 했다. 그리고 몇 달 후 그 아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할 얘기가 있다고 했다.

"오빠. 나 할 말이 있는데..."

"뭔데?" 

"나 미국으로 이민 가게 됐어. 그래서 우리 더 못 만날 거 같아"

"원래 가기로 했던 거야?"

"아니. 아버지 일 때문에 갑자기 가게 됐어"

"나는 괜찮은데. 전화나 메일로 연락하면 되잖아."

"나는 그렇게 하기 힘들 거 같아. 미안해"

"그래... 알았어....."

한동안 이별의 아픔으로 고통스러워하던 이사무는 문득 그 아이가 이민을 간 게 아니라 자신의 친구들과 수준이 맞지 않아 헤어지자고 한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2년간 생각 없이 살았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렇게 오렌지족처럼 인생을 즐기던 이사무는 당초 목표로 했던 돈을 하나도 모으지 못하고 대학 2학년을 마치고 훈련소에 입소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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