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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결 May 07. 2023

MZ도 시장에 갑니다만

제로웨이스트


MZ라는 이름을 제목에 떡하니 붙였지만 사실 파릇파릇한 새내기 MZ는 아니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새파랗게 어린지 상인 분들은 내게 "뭐 줄까?" "이거 가져가" "그것도 맛있어" 말을 툭툭 던지신다. 이런 화법에 도무지 면역력이 없는 나는 정겨움보다는 불편함을 먼저 느낀다. 시장의 이런 문화는 처음 보는 어린아이에게도 함부로 말을 놓지 않는 나로서는 좀처럼 적응하기 힘든 과제다.


그런데도 굳이 내 발로 시장을 가는 이유는 '쓰레기 없이 장보기' 위해서다. 이왕이면 유기농 채소를 먹고 싶지만, 일회용 포장이 되지 않은 과일과 채소를 판매하는 유기농 매장은 오프라인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그냥 시장에서 일반 농산물을 사 먹기로 했다. 내가 유기농 음식을 먹는 것보다 '유기농적인 삶'을 사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낱 제로웨이스터는 유기농 vs 일반 농산물 사이에서 많은 고민 끝에 잠정적 결론을 내렸다.




시장에서 장을 보는 데 가장 필요한 스킬은 바로 ‘재빠르게 움직이는 것’이다. 마트에 가서 느긋하게 둘러보는 여유로움이란 이곳에 없다. 도착하면 빠르게 스캔하고 원하는 걸 말해야 한다. 그리고 장바구니를 먼저 꺼내어 손에 들고 있어야 한다. 안 그러면 시커먼 검은 봉지에 이미 채소가 담긴 뒤 일 테니까. 내가 장바구니를 꺼내기도 전에 사장님들의 손에 봉지가 들려 있기 일쑤다. 그 속도를 따라가기가 벅차서 가게 앞에 서자마자 나는 장바구니부터 꺼내고 본다. 그리고 매번 다급히 "봉투는 필요 없어요" "여기 담아 주세요"를 외친다.


가끔 흙이 묻은 당근이나 물이 묻은 잎채소를 살 때 어차피 씻을 거니까 묻어도 상관없지만 사장님들은 기어코 비닐에 담아 주시려 하신다. 괜찮다고 말해도 사장님들의 비닐 사랑(?)은 쉽게 꺾이지 않는다. 비닐봉지를 쓰느냐 마느냐의 싸움에서 끝내 승리를 쟁취하려면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외출할 때 늘 가방에 넣고 다니는 장바구니. 집에 있던 비닐도 하나 챙긴다.



시장에 가면 과일, 채소 가게 사장님들은 내가 '엄마 심부름으로 당근 하나 사러 온 학생'으로 보이거나 '한 번 오고 마는 손님'으로 보이는지 내가 이 가게의 장기 고객, 그러니까 단골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못하는 듯하다. 내가 아니었어도 다른 손님에게도 그랬을까 하는 피곤한 생각을 하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


한 번은 무를 사는데 거의 내 팔뚝만 한 길이의 커다란 무였다. 가격을 묻고 잠시 이걸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상인분이 내 동의도 없이 커다란 무를 식칼로 잘라 버리는 거였다. 반값에 반만 가져가란 소리다. 흙이 그대로 묻어 있는 무가 눈앞에서 댕강 잘리는 것을 본 나는 당황함을 감춘 채 반쪽짜리 무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ㅇㅇ있어요?"하고 묻는 말엔 대답보단 손짓이 돌아오곤 한다. 며칠 전엔 채소 가게 앞에 서서 유채(겨울초)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가게에 손님이 왔는데 사장님은 내가 부르자 그제야 고개만 돌릴 뿐 손은 하던 일에 열중이시다. 천 원어치만 살 수 있냐고 묻자 고개를 내저으며 2천 원을 뜻하는 V자만 그리신다.


가끔 이렇게 조금만 살 수 있냐고 물어보면 단박에 거절당한다. 시장은 몇 천 원어치, 원하는 만큼 살 수 있는 거 아니었나. 시장 초짜는 모를 수밖에. '얼마 이상은 안 판다'라는 일반적인 룰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물론 가게의 사정도 이해하지만, 1개당, 100g당 단위로 원하는 만큼 담아서 바코드만 찍으면 살 수 있는 마트가 새삼 편하다고 느끼는 순간이다. 마트 계산대에서는 거절당할 일도 비닐을 거절할 일도 없으니 말이다.


필요한 만큼만 조금 사고 싶은데, '혼자 먹기에 너무 많다'라는 사정까지 보태야 하는 비용도 발생하는구나. 그래서 시장에 장을 보러 오는 1인 가구가 그렇게도 없는 건가. 그래서 사장님들은 조금씩은 안 파시는 걸까. 지금까지 시장에서 좀처럼 내 또래를 찾지 못한 이유에는 이런 속 사정이 있는 걸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한다. 무엇보다 마트에서는 가장 먼저 친절함을 얼굴에 쓰고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시장이 아닌 마트를 찾는 것도 공감이 간다.



그래도 아직 시장 인심은 살아 있다. 유채 천 원어치가 이렇게 한 가득이다. 이것도 내가 시장에 가는 이유 중 하나.



계속되는 도전에 수확이 없진 않다. 최근 가까운 시장에서 단골 채소 가게를 찾은 것 같다(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 사장님 생각은 다를 수 있다. 조금씩만 사 가는 나를 싫어할지도). 처음부터 항상 웃는 얼굴로 맞이해 주시는 사장님은 내가 이것저것 물어도 귀찮은 내색 한 번을 안 하시고 친절히 답해 주신다. 몇 번 가니 나를 기억하시곤 채소를 사면 덤을 더 챙겨 주시고, 이번엔 내가 찾는 나물이 없자 오늘 울릉도에서 갓 올라온 '부지깽이'라며 내게 새로운 봄나물도 소개해 주셨다. 무슨 맛인지, 어떻게 먹는지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누니 왠지 VIP 대접이라도 받는 느낌이다. 그래, 이게 마트 계산대에서는 들을 수 없는 시장에만 있는 고급 정보가 아닐까? 왠지 시장의 또 다른 메리트를 발견한 듯하다.




내가 이런 일상의 사소함을 기억하는 이유는 아마 클릭 한 번에 집 앞까지 배송되는 시대에서 '얼굴을 보고' 물건을 사고파는 일에 아직 서툴러서인지 모르겠다. 그러니 더욱 시장에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눈으로 보고 가게 주인과 눈을 맞추고 내 입으로 들어갈 과일과 채소를 직접 골라야 한다. 거기서부터 건강한 한 끼가 나오는 법이니까.


"입에 들어가는 거니까 얼굴 아는 판매자에게 사고 싶어요."
- 아즈마 가나코, 『궁극의 미니멀라이프』


어쩌면 나는 시장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먹거리를 사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게 친환경, 유기농 인증 마크만 찍힌 채소보다 택배로 받은 과일 상자보다 시장에 나온 투박한 채소 꾸러미에 더 끌리는 이유인지 모른다.



시장표 무, 유채로 만든 '유채 비빔밥'



시장에서 장보기 도전은 계속된다.

경험치를 쌓으면 나도 언젠간 흥정하는 스킬도 발휘할 수 있을까? 앞선 기대를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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