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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결 Sep 02. 2023

그냥 내가 손해 보고 사는 게 낫지

잘못 온 택배


요즈음 확고해진 생각이다.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끼치는 것보다야 차라리 내가 손해를 보는 게 낫다는 것. 정말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구나를 피부로 와닿았던 일이 얼마 전에 있었다.


8월이면 햇고구마가 나온다. 여름 내내 감자를 먹으며 햇고구마 시즌만 기다리고 있었다. 8월 중순이 지나자 자주 이용하는 농산물 직거래 사이트에 햇고구마가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했는데 어째 너무 비싼 거다. 예년과 비교하면 거의 두 배에 달하는 가격. 그래서 일단 5kg만 주문해서 먹었다. 며칠 후 한 박스를 다 먹고서 다시 고구마를 사려고 보니 좀처럼 고구마 가격이 떨어질 기미가 안 보인다.


그러다 저렴한 공품,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못난이 고구마가 그나마 싼 가격에 올라와서 냉큼 장바구니에 담아 결제를 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공품을 이 가격에 먹는 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어서 결제를 취소했다. 돈이 아까운 것보다도 조금만 기다리면 되는 걸 못 참는 게 아까웠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제법 냉철한 척을 했다.


그랬는데 이틀 후 주문 취소한 고구마가 집 앞으로 배송됐다. 어? 뭐지? 보자마자 너무 당황스러웠다. 택배 운송장 번호가 등록된 문자도 못 받았는데. 급히 판매자에게 연락을 했다. 확인해 보니 판매처에서 실수가 있었던 모양이다. 곧바로 수거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신속한 처리는 감사한데 고구마는 어떡하죠? 사장님? 고구마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대로 다시 택배 차에 실리면 배송 중에 상할 텐데. 그러면 상해서 못 팔 텐데. 그러면 고구마가 너무 아까운데. 머릿속엔 최악의 상황이 그려지고 다급한 말들이 쏟아졌다. '그래, 그냥 내가 먹자. 어차피 고구마 먹고 싶었는데 잘 됐어.' 찰나에 마음이 정해졌다. 카드 결제는 이미 취소되어서 무통장 입금으로 고구마 값을 입금하는 것으로 오배송은 해결되었다.


휴, 고구마도 사장님도 다행이야. 복잡한 마음이 평화를 되찾았다. 고구마처럼 신선 식품이 아니었다면 그냥 수거해 가도록 두었을지 모른다. 음식이 버려지는 걸 싫어하는 내가 내 마음 편하자고 한 일이지 부러 남 좋으라고 한 일은 아니다. 단지 사장님도 손해 안 보고 택배기사님도 수고하지 않고 나도 고구마를 먹을 수 있으니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된 것뿐.


이런 내 마음을 마주하자 갑자기 자아성찰이 되기 시작했다. 작년에 먹었던 참외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는 반대로 참외가 실수로 더 왔다. 5kg를 샀는데 10kg가 온 것. '아니 이게 웬 횡재!'가 아니고. 사장님, 어떻게 된 거죠? 물어봐도 답이 없다. 몇 시간째 묵묵부답에 지쳤다. 기다리던 참외가 왔는데 먹지를 못하다니. 목이 타서 짜증이 올라올 무렵 연락이 닿았다. 돌아온 답변은 "그냥 드세요." 네? 그게 다인가요? 감사해야 하나 미안해야 하나 몰라 머쓱했다.


그런데 사장님. 만약 제가 혼자 사는 사람이었으면 이 많은 걸 어떻게 먹으라고요? 엄연히 실순데 사과 먼저 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당시 내가 했던 생각이다. 이내 마음이 풀렸지만 분명 그런 마음이 스쳤다. 참 속 좁았다. '참외는 참외고 그건 그거지.' 따지고 들기 바빴다. 지금이라면 5kg 참외값을 선뜻 내밀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라면 미안하고 고마워서 몇 번이고 재구매를 했을 것. 아쉬운 응대에 기분이 상하기보다는 그 마음을 헤아리려고 하지 않을까. 미안한 마음이 더 크지 않을까.


사람 마음이 이리도 변하나. 신기한 일이다. 그동안 참외를 몇 박스씩 먹으면서 정신 수양이라도 한 걸까. 모르겠다. 그냥 기분이 좋은 하루였는지 모른다. 귀찮은 일이 생겼다며 화가 나지도 수고롭지도 않았으니.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괜한 돈이 나간다며 아까워했다면 내가 먼저 지갑을 여는 일은 없었을 터. 이 정도면 고구마를 보고 무장 해제된 게 아닌가 싶다.


아무래도 고구마 요정이 다녀 간 모양이다. '너는 지금 고구마를 먹어야 된단다. 참지 마렴.' 뾰로롱 주문을 건 게 틀림없다. 고구마가 먹고 싶었다는 말을 아주 돌려 돌려 말했다. 사실 이 글은 고구마가 먹고 싶었다는 이야기다. 이 동화 속 주인공은 이미 내 뱃속으로 들어갔고 새로운 햇고구마가 오고 있다. 설렌다. 한여름을 제외하고 일 년 내내 고구마를 달고 사는 사람은 고구마 철을 맞이하여 제대로 신이 났다. 그래서 오는 고구마는 두 팔 벌려 안 막고, 고구마 주는 사람은 그저 착한 사람으로 보였다고 한다. 고구마 인간은 행복하게 살았다. 고구마 동화 끝.




생긴 건 이래도 맛만 좋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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