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요리를 할 때면 프라이팬을 먼저 꺼내 들었다. 작은 팬에 불을 올리고 기름을 둘러 달걀 한두 개를 톡 까서 넣고 지글지글 구워 만든 달걀 프라이는 가장 만만한 집 반찬이었다. 조금 더 시간을 낸다면 채소를 잘게 썰어 넣은 계란물을 프라이팬에 얇게 부어 돌돌 말아 속까지 잘 익혀 먹기 좋게 썬 다음 케첩을 위에 살살 뿌려 주면 맛있는 계란말이 완성. 마찬가지로 주로 해 먹는 요리였다. 프라이팬과 뒤집개, 키친타월은 주방에서 내가 가장 많이 만나는 삼총사였다.
파스타가 먹고 싶을 땐 커다란 팬에 파스타 면을 삶고 물을 따라 버리고 면을 채반에 건져 둔 다음 다시 팬에다 기름을 붓고 양파와 베이컨을 볶기 시작했다. 유리병에 든 파스타 소스를 넣어주고 모든 재료가 한데 어우러지도록 잘 섞은 다음 그릇에 옮겨 담아 파슬리 가루를 솔솔 뿌리면 그럴듯한 요리가 완성되었다. 그릇에 옮겨 담아 후루룩 맛있게 먹고 나서 일어나 보면 커다란 프라이팬이 싱크대에 떡 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설거짓거리가 한가득 쌓여 있다. 아, 요리를 한다는 건 이런 거구나. 그땐 그게 당연했다.
집에서 요리를 하려면 갖가지 요리도구가 구비되어 있어야 하는 줄 알았다. 프라이팬도 냄비도 크기 별로, 종류 별로 있어야 했다. 파스타를 먹기 위한 포크도 필요했고 토스트를 썰어 먹을 칼도 따로 필요했다. 면 요리를 할 때 쓰는 기다란 나무젓가락도 필요했고, 볶음 요리를 할 때 쓸 크고 작은 주걱도 필요했고, 팬의 코팅이 벗겨지지 않게 쓸 수 있는 넓은 뒤집개도 필요했다. 와플과 크로플을 만들기 위해서 와플 팬도 구입했고 삶은 달걀을 만들기 위해서 계란찜기도 구입했다.
지금은 계란을 먹지 않지만 그냥 냄비에 물을 넣고 삶으면 되는 것을, 그때는 왜 계란찜기가 따로 필요했던 걸까? 사실은 계란찜기를 세척하는 일이 더 번거로운 일인데, 정작 구매한 뒤로 몇 번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대체 편리함이란 뭘까? 나의 시간을 빼앗지 않는 것? 내가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정말 그게 편리함일까? 반대로 그 도구가 내가 그 일에 집중해야 하는 시간을 빼앗는 건 아닐까? 도구 하나로 활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와 창의력을 빼앗는 건 아닐까?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을 모두 빼앗기고 있는 건 아닐까? 냄비로 계란을 삶는 방법을 내 손으로 익힐 기회마저 박탈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대체 요리에 필요한 게 왜 그렇게 많았을까? 왜 그게 당연하다고만 여겼던 걸까? 건강을 계기로 요리법을 바꾸면서 요리에 대한 고정관념이 부서지자 수많은 요리도구들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주로 하던 볶음 요리 대신 요리법을 삶기, 찌기로 바꿨다.
이제는 스테인리스 냄비 하나로 요리를 한다. 요리에서 기름에 볶는 과정 하나만 생략되었을 뿐인데 코팅 프라이팬도 주걱도 필요가 없어졌다. 오래된 프라이팬에 음식이 들러붙는 게 성가시다고 더는 불평하지 않아도 된다. 프라이팬은 코팅이 벗겨지면 버리고 교체를 해야 하는 반면 스테인리스 냄비는 반영구적으로 사용이 가능하다. 도구를 관리하는 수고로움도 덜었다. 그때그때 밥을 해 먹고 설거지만 잘해서 잘 닦아 넣으면 끝이다. 설거지도 금방 끝난다.
냄비 하나로 요리를 하기 시작하니 레시피도 없이 내 마음대로 요리를 한다. 요리가 더 자유로워졌고 더 편해졌고 더 쉬워졌다. 나 하나 먹이는 데 대체 무슨 도구가 그리 많이 필요하단 말인가. 특별한 요리를 하지 않아도 매일매일 내 입맛에 맞는 맞춤 요리를 즐기니 더 부러울 게 없으니. 예쁜 식기류에 대한 욕심도 자연스레 없어졌다. 밥그릇, 국그릇에 과일 담아 먹을 접시 하나, 포크 하나만 있으면 된다.
이참에 와플 팬도 정리해야겠다. 으깬 고구마에 통밀가루를 섞어 반죽한 다음 고구마와플을 구워 먹어 보려 했으나 감감무소식, 귀찮기만 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방치해 둔 와플 팬을 꺼내어 다시 한번 깨끗하게 닦아서 주인을 찾아줘야겠다. 이렇게 게으른 요리사 말고 잘 사용해 줄 부지런한 요리사에게로.
없이 살기 68. 프라이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