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때 담임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뵀던 건 내가 마흔이 목전이던 제법 나이가 들었다 생각되던 때다. 퇴직하신 지 시간이 꽤 흐르고 선생님도 그즈음에는 제자에게 속내를 보여도 된다 생각하셨던 것 같다.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는데 그중 대화 끝에 하신 한 마디가 평생 귓가에 울렸다.
“내가 말하는 직업을 가졌었잖니, 그래서 듣는 게 참 어려웠어. 이제부터는 듣기를 잘해보려고 해”
제자는 선생님이 됐고 교단에서 강단으로 오가며 그렇게 긴 시간을 보냈다. 전공수업은 세 시간이 기본이고 시작과 끝이 정확히 원하는 곳에서 시작되고 마무리가 될 때쯤 알게 됐다. 하루 종일하는 강의는 익숙하지만 듣기는 서투르다는 것을…. 그리고 나의 선생님처럼 흰머리가 성성해질 무렵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됐다.
그리움이 가득한 선생님의 부드러운 음성이 귓가에 맴도는 날이 있다. 스스로 ‘듣기’가 취약하다는 생각이 들 때다. 마음으로 다짐하고 연습하고 되새겨도 부지불식간에 끼어드는 자신을 느낄 때마다 속으로 나무라게 된다.
‘저런…. 또 그런다…’
누구도 나무라는 사람은 없다. 지적도 하지 않는다. 홀로 겪는 부끄러움이다. 나이가 드니 단점은 스스로 발견해서 고치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는 걸 알게 됐을 뿐이다.
잘 듣는 사람이 좋다. 아니 운 좋게도 난 늘 잘 듣는 사람들 곁에 있었다. 뒤늦게 자신의 문제를 발견하게 된 이유라고 핑계를 대고 싶다. 자신의 부족함을 핑계 대는 일은 이제 멈춰야 하는 때가 왔다. 늦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안에 담긴 언어가 모여 그 사람을 만들고 밖으로 튀어나오는 순간 생각이 드러난다. 마음으로 공감을 해도 잘 듣기의 배려가 없다면 마음으로 와닿는 부분이 작아질 테고 눈을 맞추며 귀를 기울이는 행동만으로도 부족한 자신이 의미 있는 사람이 됨은 덤이리라.
겉모습만 나이가 들고 있다. 들통나기 전에 스스로 철이 나려 무진 애쓰는 중이다. 여러 가지 목표를 세우고 실천하는 중이지만 그중 제일 신경 쓰이는 것이 ‘잘 듣기’다. 귀 기울여 듣는 경청. 그 경청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바람이다. 아는 것을 다 말하지 말라했던가 …. 이제는 아는 것을 말하는 대신 듣는 차례가 됐다.
귀 기울여 잘 듣고 마음으로 공감하고 머리로 이해하는 노년. 부지런히 자신을 돌아보고 공부하는 이유다. 섬처럼 대양에 둥둥 떠서 살 수는 없다. 어울더울 살아가는 세상에 못난 혹은 모난 어른이 되지 않으려면 말단속이 우선이다. 그러니 말하기는 최소화하고 듣기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시간이다. 선생님의 마지막 가르침. 경청하는 노년, 스스로 바라는 모습이다.
입을 다물고 새겨듣고 지갑은 열어야 하나? 그럴 여력이 있다면 금상첨화다.
https://youtu.be/8SbUC-UaAxE?si=7IuSGnFmtIanJSM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