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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묘보살과 민바람 Oct 15. 2024

분홍 초콜릿 줄까 파랑 초콜릿 줄까

자신으로 자란다는 것의 어려움

 - 야, 니가 여자냐? 분홍색은 여자색이야. 남자면 파란색 골라야지!


깜짝 놀라 고개를 드니 계산대 앞 매대에서 깐더조이 초콜릿을 고르는 남자아이를 같이 온 여자아이가 혼내고 있었다. 나는 내 목소리가 급히 달려나가는 걸 들었다.


 - 색깔엔 여자남자 없는 거야. 남자도 분홍색 좋아해도 되고 여자도 파란색 좋아해도 돼.


 - ...거 봐!


 움츠러들던 남자아이 어깨가 펴지는 게 보였다. 머뭇거리고 서 있던 여자아이는 문쪽으로 다가가더니 나가려고 한다. 손에는 계산하지 않은 킨더조이를 든 채다. 무안하게 만든 내가 미웠던 걸까? 아니면 당황해서 잊은 걸까? 나는 빠르게 걸어가서 아이를 붙잡은 뒤 작은 몸집을 껴안고 말했다. "깜빡한 거지?" 아이는 반색하며 외친다. "깜빡했어요!"  


 이 깐더조이 초콜릿은 알 모양 초콜릿 안에 작은 장난감이 들어있는 상품으로, 포장이 하늘색과 연분홍색 두 종류로 나뉘어 있다. 궁금해서 어른 손님에게 물어보니 하늘색에는 공룡 같은 남아용 장난감이, 연분홍색에는 머리핀 같은 여아용 상품이 들어 있다고 했다.


 비슷한 일이 전에도 있었다. 지정성별 여성인 둘째 조카가 5살이었을 때 아이는 우리 본가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크레파스를 고르면서 흥얼거리다가 즐거운 듯 혼잣말을 했는데, 그 말을 듣고 나는 몸이 굳었다.


 - 핑크색 골라야지. 나는 여자니까!


 아, 마침내 이런 순간이 왔구나. 저렇게 생각하는 걸 그대로 두면 안 되는데. 당시에는 고모 역할에 익숙하지도 않았고 오빠네 부부에게 교육에 대한 참견을 하기도 뭐해서 당황한 채 지나가고 말았다. 그게 한동안 마음에 걸렸다. 그때, 앞으로 또 그런 말을 듣는다면 꼭 바로잡아줘야겠다고 마음먹은 게 있어서 편의점에서 곧바로 말이 나왔던 것이다.


 내 조카는 분홍색을 엄청나게 좋아해서 물건이 대부분 분홍색이다. 이번에 할머니가 보내준 꽃분홍색 여름 이불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꼭 껴안고 사진도 찍고 여행에도 들고 다닌다. 엄마에게 왜 항상 분홍색 이불만 주냐고 투덜거리던 나와는 정반대다. 나는 늘 분홍색이 싫었다. 분홍색을 선택하면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는 생각의 틀 안에 고분고분 들어가 갇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방식이 좀 다르긴 해도 나 역시 '분홍색=여자색'이라는 도식 안에 갇혀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색깔에 얽힌 성별 개념은 백 년전까지만 해도 반대였다. 1918년, 어린이 잡지 <Earnshaw’s Infants’ Department>에는 이런 설명이 실렸다.  “일반적으로 분홍색은 남자 아이에게 어울리고, 파란색은 여자 아이에게 어울리는 색깔이다. 확실하고 더 힘찬 색깔로 여겨지는 분홍이 남자 아이에게 더 잘 어울리고, 여자 아이들은 연약하고 앙증맞은 색깔인 파랑을 입었을 때 더 예뻐 보이기 때문이다.” 색상만 서로 바뀌었지 성 역할 고정관념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셈이다. 하지만 색상과 성별의 관계는 사람이 임의적으로 연결지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0년 동안 아기와 어린이의 옷차림을 연구한 역사학자 파올레티(Jo B. Paoletti) 교수는 194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아이의 성별에 따른 색깔이 정해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소매업계와 의류 제조업체들이 소비자의 기호를 고려해 상품을 세분화하는 방식으로 수익을 높이기 시작한 때다. 뱃속의 아기 성별을 미리 알 수 있게 되면서 성별에 따라 미리 물건을 사두고 방을 꾸미게 되었고, 첫째가 아들이면 전부 파란색으로 사고, 둘째가 딸이면 같은 물건이라도 전부 분홍색으로 다시 사는 식으로 구매가 증가했다.


 이렇게 시장이 아이의 성별을 소비와 연결짓기 전까지는 아이에게 중성적인 옷차림을 시켰다고 한다. 성별에 상관없이 치마를 입혔고 머리도 자르지 않았다. 1884년 찍힌 루즈벨트 미국 전 대통령의 세 살 때 사진을 현재의 기준으로 보면 영락 없는 여자아이다. 사진 속 아기 루즈벨트는 어깨에 닿는 긴 머리에 깃털달린 모자를 손에 쥐고, 하얀 치마 밑에 에나멜 구두까지 신고 있다.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이 사둔 '여자색' 또는 '남자색' 옷을 입으며 자라온 아이들이 색깔과 성별을 연결지어 고정관념을 갖는 일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 그렇게 서서히 자라난 성 역할 고정관념은 장난감과 문구류 선택에서도 이어진다. 여자아이들의 놀이가 미용, 소꿉놀이와 엮이는 반면 남자아이들의 놀이는 그보다는 경쟁, 직업, 금전과 관련됐을 가능성이 높다(소라야 시멀리, 2022, p.134).


 여자아이들은 공주가 나오는 동화와 애니메이션을 보며 공주나 공주를 닮은 캐릭터가 그려진 물건들을 사고 공주가 되기를 꿈꾼다. 물론 여기서 공주란 강인하고 진취적인 최근 디즈니 스타일 공주가 아니라 여성적이고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한 공주다. 소라야 시멀리에 따르면 "모든 매체에서 여자아이와 성인 여성은 자그마한 체구에 저체중, 취약하고 연약하며 무력한 모습으로 최소 4배 더 많이 묘사된다. 신체적으로 더 많은 기준을 통과할수록 사회적 인기는 올라간다." 아동에 관한 각국의 연구는 "여자아이들은 이미 열 살만 되어도 자신이 정말로 힘없고 약하며 남자아이처럼 용감하지 않고 '보호'가 필요하다고 믿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겨울왕국> 엘사의 등장으로 여자아이들의 우상에도 조금 다른 선택지가 생기기는 했다. 엘사가 그리고 있는 새로운 여성상은 여성다움이 아닌 자기다움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엘사는 공주에 머물지 않고 여왕이 되는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사가 그려진 옷이나 엘사의 옷을 따라 만든 여아의 옷은 '공주 드레스'의 변형일 뿐이다. 옷에 붙은 화려한 레이스, 반짝이는 장식품이 여자아이들의 판타지를 자극하려 애쓴다. 이렇게 변함없는 시장의 경향성은 편의점에 오는 3~7세 여자아이들 모습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많은 아이들이 레이스나 프릴이 달린 긴 치마에 왕관을 쓰거나 분홍색 요술봉을 들고 편의점에 온다.


 어린 딸을 키우는 내 동기가 해준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는 아이가 성 역할 고정관념에 물들지 않도록 신중하게 동화책을 고르고 영상 매체를 통제하지만, 그렇게 해도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다녀오면 금세 배워온다고, 사회의 영향을 가정에서 다 막을 수가 없다고 했다. 정말로 그렇겠다 싶었다. 최근 2년 간 편의점에서 일하면서 신기하게 본 현상이 있다. 많은 여자 중고등학생들이 고개를 숙이는 대신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하는 것이다. 집에서 무릎을 굽혀 인사하라고 가르쳤을 리는 없을 테니 일종의 사회적 유행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2010년대 중반의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에 청소년기를 맞은 이들이 오히려 더욱 고전적 여성성에 맞춰진 듯한 행동을 하게 된 연유가 무엇일까? 궁금한데 아직은 답을 찾지 못했다.




 초등학교 고학년 여학생인 하영이는 점포에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싹싹하게 인사를 한다. 웃는 모습이 온화하고 목소리도 참 여리고 부드럽다. 만나면 기분이 좋고 고맙다. 그런 하영이를 볼 때 흡족함보다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게 된 건 하영이가 남동생 주영, 도영이와 같이 온 다음부터다. 그때 주영이와 도영이는 인사는커녕 큰 소리로 무례한 말을 하고 거칠게 행동했고 하영이는 두 동생을 대신해 연거푸 사과를 하다가 갔다.


 - 죄송해요. 죄송해요. 정말 죄송합니다.


 누나랑 동생들이 저렇게까지 다른가 싶긴 하지만, 애들이니까 그러려니 할 수도 있는 건데 어쩔 줄 몰라하며 내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그건 그냥 하영이의 천성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그 애의 모습에 나를 겹쳐보고 마음을 쓴다. 철 없이 굴어도 좋을 나이에 여자다움에 자신을 맞추는 데 더해 K-장녀로서의 역할까지 떠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안쓰럽다.


 최근 몇 년간, 자신으로 자란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에 대해 생각이 많았다. 나는 예전부터 사과를 너무 많이 하는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죄송하지만"이란 말도 "실례지만"으로 바꾸어서 말하려 노력하는데 여전히 버릇처럼 "죄송하지만"이 튀어나오곤 한다. 늘 내가 부족한 존재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던 데는 ADHD와 부모님이 나를 대한 방식이 깊이 연관되어 있는데, 그 외에 나도 모르는 사이 '여성스러움'에 대해 흡수한 문화도 한몫을 했다고 느낀다.


 특히 '이게 진짜 나다운 모습일까'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이런저런 성추행에 많이 노출되었는데, 삼대 후반의 나이에 다시 성추행을 당하면서 '그만두라'는 말을 분명히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내 감정이 타당하다는 확신이 없었고, 노년의 남자에게 내 주장을 강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압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 압력은 경험적이고 신체적인 것이었다. 입을 열어 말을 하고 싶던 순간, 얌전하고 순종적인 여자아이로 행동해야 한다는 무의식, 상대의 의견과 감정에 나를 맞춰온 역할 굴레가 치밀어오르는 목소리를 붙잡아 속으로 끌어내렸다. 지압사인 가해자가 나와 같이 지압을 받는 직장동료에게는 성폭력을 저지르지 않고 나를 타깃으로 삼은 이유도 알수 있었다.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는 그와 달리 나는 늘 고분고분한 태도만 보였다. 


 성 역할 고정관념은 단순히 옷차림과 직업과 연봉만을 결정하지 않는다. 그건 자신의 목소리를 스스로 듣고 목소리를 내야 할 순간마다 그렇게 할 수 없도록 만든다.


 틀에 갇히기 쉬운 것은 여자아이들뿐만이 아니다. 남자아이들은 '타고나길' 자동차와 공룡 같은 장난감을 좋아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동의 장난감과 텔레비전 선호도 연구에서 이저벨 처니와 카멀라 런던이 밝힌 바에 따르면, "혼자 남겨진 5~13세 남자아이들 절반은 누군가 자신을 지켜본다고 생각하기 전까지는 '여아용' 장난감과 '남아용' 장난감을 같은 비율로 골랐다". 특히 아이들은 아빠가 자신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지 걱정했다고 한다.(소라야 시멀리, 2022, p.135) 남자아이들에게서도 젠더 유연성과 양육의 본능이 관찰되는데, 무리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이 두려워 자신을 바꾸는 것이다.


 편의점에서 일하면서 남자 고등학생들이 서로에게 "*발년아"라고 욕하는 것을 종종 듣는다. 이 아이들은 '*발놈'보다 '*발년'이 더 상대방에게 굴욕감을 줄 수 있는 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남성성에서 벗어난 존재, 여성에 가까운 존재로 만드는 것이 비하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남자아이들이 여성적인 특성을 많이 포함한 행동을 할 때는 또래에게 배척받는다. 무리에 적응하기 위해 '남자다움'을 몸에 익히고 '맨박스(manbox. 가부장제 하에서 남성이 남성다울 것을 강요하는 것)'에 들어간다.


 나는 남자아이들 중 내게 인사를 하는 아이가 현저히 적은 데에도 감성과 다정함 등 여성적 특성으로 해석되는 행동을 피하려는 사회화의 영향이 있지 않나 추측해 본다. 우리는 은연중에 '감정'을 여자들의 영역으로 학습한다. 그래서 남자아이들의 무뚝뚝함은 여자아이들의 경우보다 넓게 허용된다.

 

 그만큼 인사를 잘해주는 아이들을 만나면 고맙지만, 인사와 양보를 잘하는 아이들에게 "너 정말 착하다"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 칭찬이 남의 기대치에 자신을 맞추는 습관을 만든다는 것을 잘 알아서다. 그 말이 올라오면 꾹 누르고 대신 관심과 감사를 표한다.


 - 너 이름이 뭐야? 인사 잘해줘서 고마워.


 나는 아이들이 정말 목소리를 내야 하는 순간에 자기 목소리에 귀기울일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최대한 자기 자신으로 자라나길 바란다. 내가 그렇게 되기까지 정말 길고 지난한 시간을 거쳤기 때문이다. 한 차례 아픈 깨달음을 겪은 뒤 몇 년간 나는 내 감정을 바로 인지하고 표현하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사실 나는 하영이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네가 끌어안지 마. 남을 기쁘게 하려고 너무 노력하지 마. 그럼 세상이 널 계속 고개숙이게 만들 거야.'


 남자애라면 파란색을 골라야 한다고 말하던 작은 여자아이에게도 마음으로 속삭였다. 계산을 깜빡해도 네가 누군지는 깜빡하지 말고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네가 아닌, '분홍'이 되기를 선택하지 말라고.


 그런데 어제는 다른 방식으로 나를 놀라게 하는 아이들을 만났다. 계산대에서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는 세 남자아이의 계산을 하던 중이었다. 그 애들은 어떤 여자아이의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 가운데에 있던 남자아이가 말했다.


 - 성적으로 남자일 수도 있지. 너네들이 왜 정해 그걸.


 아이의 목소리는 단단했다. 앞부분의 이야기를 잘 듣지 못했지만, 아이가 성별 이분법적인 고정관념을 가진 친구들에 반대 의견을 내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아이는 이야기 속 여자아이가 인터섹스(intersex. 간성. 선천적으로 남성과 여성 양쪽의 신체적 특징을 불완전하게 함께 가지고 있는 것 또는 그런 사람. 전체 인구에서 최대 1.7%의 비율로 존재한다)나 젠더퀴어(genderqueer. 젠더를 남성과 여성으로만 나누는 이분법적인 구분에서 벗어난 성 정체성. 또는 그런 정체성을 가진 사람)일 수 있다고,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그 아이를 규정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었다.


 양쪽에 선 남자아이들은 당황하여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여기서 그런 얘기하지 말아줄래." "선 넘었다, 너." 두 아이는 가운데 아이의 말이 금기를 건드렸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선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은 가운데 아이였다. 다른 사람의 성별 정체성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는 뜻이었으니까. 친구들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느긋하고 확신에 차 있는 가운데 아이의 태도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 아이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었지만 앞부분의 대화를 잘 듣지 못해 첨언을 할 수 없는 게 아쉬웠다.

 최근 나는 아이들이 성별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교육하는 한 교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가운데에 서 있던 남자아이도 그런 교사나 부모님께 배운 것이 아닐까. 편의점에서 손님들이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듣지만 그런 얘기를 들은 건 처음이라서 신선하고 신기했다. '젠더'의 'g'만 꺼내도 피터지는 싸움으로 번지는 게 현재의 대한민국인데 누군가는 용기를 내서 벽에 부딪치고 있다. 세상은 아닌 듯해도 변하고 있다.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방향으로.


 레이스옷을 입고 왕관 머리띠를 한 여자 초등학생들이 다녀갈 때, 약속한 듯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하는 여자 중학생들과, 애교살 눈화장을 하고 헤어롤을 만 여자 고등학생들이, 잘 웃어서 예쁘다는 말을 들어왔을 여자 단골들이 다녀갈 때, 나는 그들에게서 분홍색을 걷어내는 상상을 한다. 분홍색으로 물들지 않았다면 만들어졌을 그의 색깔은 무슨 색이었을까. 어쩌면 스로를 여자로 정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나는 여자라고 부르는 것은 아닐까.


 내 안에도 '사회적 분홍색'이 짙게 배어있다. 말하자면 그건, 머리로 외운 적이 없어서 잊을 수도 없는 색깔이다. 학습된 여성스러움을 벗고 나다운 친절로 사람들을 대하려 노력하지만, 완전히 벗어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오히려 요즘 나는 분홍 색상이 좀 좋아졌다. 내 퍼스널 컬러가 '봄/여름 브라이트'라는 것을 알게 된 후의 일이다. 옅은 분홍이나 밝은 하늘색 상의를 입었을 때 얼굴이 확 살아나는 게 내 눈에도 보여서, 연분홍색도 피하지 말고 입어 봐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분홍색 물건만 모으는 남자도 아무 문제가 없고 고분고분하거나 다정다감하지 않은 여자도 잘못된 게 아니듯이, 취향도 성격도 성적 지향도 각자의 특징일 뿐이니까. 좋아해야 한다는 법도 싫어해야 한다는 법도, 서로 같거나 달라야 한다는 법도 정해져 있지 않으니까. 색깔은 단지 색깔일 뿐이고, 우리는 우리 내면과 외면의 다채로움을 한껏 즐기며 살아가면 되는 거니까.



*참고: 소라야 시멀리(2022), 류기일 옮김, <우리의 분노는 길을 만든다>, 문학동네.


* 아이들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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