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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묘보살과 민바람 Oct 23. 2024

염치 있는 염세주의로 살기

수동적 허무주의에 죽비를 내리치는 생각들

편의점 일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사회생활을 위한 페르소나와 본래의 나 사이 간극이 다른 일에 비해 크지 않다는 점이다. 그런데 한 가지 끊임없이 인지부조화를 겪는 부분도 있다. 바로 쓰레기 문제다. 평소 손님으로서의 나는 상점에서 비닐봉지를 거절하고 배달 음식은 1년에 한두 번도 잘 시키지 않는다. 음식을 담아서 다닐 때도 되도록 텀블러와 반찬통을 이용한다. 카페에서 플라스틱 컵을 쓰기 싫어서 매장에서 마신다고 말했는데도 머그컵이 아닌 플라스틱 컵에 담겨 나오면 당황스럽고 힘이 쭉 빠진다.


 물론 나도 완전하지 않고, 오히려 모순덩어리 같이 느껴질 때도 많다. 요즘은 많이 해이해져서 점포에서 일할 때 플라스틱 용기에 든 도시락을 사먹는 경우도 늘었다. 그래도 대원칙은 최대한 일회용품이나 플라스틱을 안 쓰고 안 버리는 것인데, 편의점은 일회용품과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진 곳이나 다름없다.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편의점에서 끊임없이 마주한다. 매대와 시식대에 빨대와 나무젓가락을 꼼꼼히 채워 넣고 재활용도 안 된다는 즉석밥 용기들을 보기 좋게 진열하며 기후위기 심화에 적극 협조하는 기분을 느낀다. 컵얼음이 시원시원하게 팔려나갈수록 마음이 조금씩 무거워진다.


 사장님과 다른 직원들은 바닥과 시식대를 닦을 때 물티슈를 이용하지만 그렇게 하면 플라스틱이 하루에도 몇 십장씩 버려지는 것에 죄책감이 들어서 걸레로 닦거나 냅킨에 물을 묻혀서 닦는다. 그럼에도 물티슈를 몇 장 달라는 손님에게 마지못해 물티슈를 뽑아 내밀 때는, 뭐랄까, 시험 때 답을 알고 있지만 일부러 틀린 답을 써 넣는 것 같은 기분이다.


 비닐봉투 유상제공이 막 시행되고 친환경 봉투가 보급되기 이전이었을 때는 어떻게 하면 손님들이 비닐봉투를 덜 쓰고 장바구니를 들고 오게 할 수 있을까 잔머리를 굴렸다. 봉투가 플라스틱임을 강조하기 위해 "봉투 드릴까요?" 대신 "비닐 사용하시겠어요?"로 접객 용어를 바꿔보기도 하고, 재사용 종량제봉투를 눈에 띄도록 계산대 위에 올려두기도 했었다. 어떤 경우는 무상제공이 위법이라고 설명해도 손님 얼굴에서 '여긴 인정머리가 없군'이라는 표정이 읽혀서 속으로 외쳤다. '봉투는 인정이 아닙니다. 세상이 차근차근 망하고 있다고요.이놈의 플라스틱 때문에…!'


 힌동안은 나무젓가락에 꽂혀 있었다. 컵라면 상자에는 나무젓가락이 컵라면 수만큼 포함되어 오는데, 주택가에 있는 점포는 챙겨가는 사람이 없어서 나무젓가락이 한 상자씩 쌓인다. 나무젓가락의 유통기한은 4개월이니 점포끼리 알아서 나눠쓰지 않으면 대부분은 시원하게 쪼개져 보지도 못한 채로 버려진다. 나는 이게 아까워서 라면업체 4사와 편의점 기업 측에 편의점 나무젓가락의 발주식 공급에 대해 제안 글을 남겼었다. 그 중 한 곳에서는 '관련 부서에 잘 전달하겠다'는 답변이나마 받았지만, 그 후로 몇 년이 흐른 지금도 컵라면 상자에는 나무젓가락이 딸려온다.


 하지만 어묵/커피용 종이컵과 컵 홀더, 플라스틱 컵 뚜껑, 빨대와 플라스틱 숟가락 등 따로 제공하는 일회용품은, 내가 계산대에 올려놓고 찍는 수많은 상품들이 모두 플라스틱 포장 제품인 것에 비하면 큰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친구가 온라인 플랫폼 물류센터에서 일할 때 들려준 얘기가 생각난다. 물류센터에서는 칫솔 하나, 껌 하나를 각각 커다란 비닐에 담는다. 그렇게 해서 10개를 주문한 사람에게 10개의 상자를 보내는 일이 많다. 이유는 물건을 빠르게 배송하기 위해서. 상상으로 조감해 본다. 커다란 물류센터에서 수백 명의 직원이 하루 수만 장의 비닐 쓰레기를 만드는 모습. 그런데 그게 겨우 하나의 공장이다. 그러고 보면 마스크만 해도 코로나가 유행하고부터 거의 전 세계 사람들이 매일 하루 1장씩 버렸을 테니, 이런 것들의 양을 상상해 보면 채 상상이 되지 않고 그저 소름이 잔뜩 돋는다.


 플라스틱은 재활용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린피스에 따르면 플라스틱 10개를 버릴 경우 그 중 2개만 재활용되고, 대부분은 소각 또는 매립된다. 2020년 10월 미디어 '닷페이스'는 갈 곳 없는 플라스틱 500톤이 쌓여있는 쓰레기 선별장의 영상을 공개했다. 플라스틱 쓰레기가 판로를 찾지 못하고 쌓이는 것은 플라스틱을 재활용하는 것보다 새로 만드는 것이 비용이 덜 들기 때문이다.


플라스틱 쓰레기 500톤이 쌓여 있는 선별장의 모습

 

 그러다 보면 생각은 회의적인 쪽으로 빠진다. 평소 텀블러를 챙겨 다니고 물티슈를 덜 쓰려고 노력하는 게 무슨 소용 있나 싶다. 이미 늦은 거 같은데. 나도 편한 대로 쓰고 버리면서 되는 대로 살아버릴까. "괜찮아! 다 같이 망할 거니까. 세상 오래 못 간다." 염세적인 농담에 맛을 들였다. 하지만 그렇게 달관한 척하고 나면 역시 뒷맛이 쓰다.


 어려서는 야무진 포부가 있었다. 살면서 내가 환경에 해를 끼친 만큼은 돌려놓고 떠나리라는 생각. 나무도 심고, 바다에서 쓰레기도 건지고, 뭘 해서라도 그러고 싶었다. 좋은 목표였지만, 태어나서 더럽힌 만큼이 어느 정도일지 매우 과소평가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권태에 빠지기 쉬운 인간일 줄 몰랐다. 지금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원활동가로 참여하려고 노력하지만 전 같은 열정은 잘 돌아오지 않는다.




 최근에 한 자원활동 중 하나는 기업의 그린워싱(Green Washing. 위장환경주의. 제품 생산 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오염 문제는 축소시키고 재활용 등의 일부 과정만을 부각시켜 마치 친환경인 것처럼 포장하는 것)과 그린 버블(Green Bubble. 친환경 관련 기업들의 가치가 과도하게 부풀려지는 것) 사례를 조사하는 일이었다. 조사를 하면서 흥미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됐다.


 5대 편의점 중 CU와 GS25는 즉석 커피에 대해 텀블러 할인을 시행 중인데, 점주의 재량이기 때문에 실제로 텀블러 할인이 시행되는 점포는 많지 않다. 재미있는 건 커피 기계에 텀블러를 끼워 넣을 수 없는 곳이 많다는 것이다. 기계가 종이컵 높이에 맞춰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텀블러를 기울여서 커피를 받을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텀블러에 따라 화상의 위험이 있고, 이런 경우 커피를 일회용 컵에 담아서 다시 텀블러에 옮겨담아야 해서 할인의 취지가 무색해진다.


 한 편의점에서 자체브랜드로 판매하는 소주컵, 종이컵, 접시 등 일회용품 8종에는 '친환경'이라는 이름이 크게 붙어 있다. 종이컵은 국제산림경영인증을 받은 크라프트지로 제작했고 화학적 처리를 대폭 줄였으며, 접시류는 플라스틱 원료 사용량을 절반 이하로 줄였다는 것이 업체 측의 설명이다. 분명 기존 일회용품보다는 한 발 나아간 것인데, '친환경 일회용품'이라니, 가려운 곳을 두고 다른 자리를 긁는 느낌은 어쩔 수 없다.


 편의점에서 일회용품 판매를 중단할 수는 없을 테지만, '친환경'이라고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건 보는 내가 좀 부끄럽다. 플라스틱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소비자들은 '친환경이라고 하니 생분해가 되나 보지'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일회용품을 소비하기 쉽다. 더구나 국제산림경영인증은 숲을 관리하는 기준일 뿐 생산 과정의 탄소배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편의점 업계도 플라스틱과 일회용품 소비를 줄이기 위해 변화의 길을 찾고 있기는 하다. 2030년까지 전 업종에 걸쳐 비닐봉투를 퇴출한다는 환경부 방침으로, 편의점마다 기존 비닐봉투를 생분해성 수지로 된 친환경 봉투로 전면 교체하거나 다회용 부직포 쇼핑백, 종이봉투를 판매하고 있다. 사실 ‘친환경 생분해 봉투’ 역시 매립지 부족으로 대부분의 쓰레기가 소각된다. 거기에 생산 과정의 탄소 배출량을 생각하면 사실상 ‘친환경’이라고 할 만한 의미를 갖기 어렵다고 한다. 종이봉투가 비닐봉투보다 탄소 배출량이 더 많다는 점도 ‘종이냐 비닐이냐’의 딜레마에 빠지게 한다. 그래도 어떤 변화를 계속 모색하고 있다는 점은 다행이라고 할까.


 한 음료회사의 무라벨 음료에는 '에코'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기존 상품과 구별하고 라벨이 없어 생기는 불편에 이해를 얻기 위해 이런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전체가 플라스틱인데다 묶음포장마저 비닐로 되어 있는 물건을 '에코'라고 부르려니 껄끄럽다. 물론 이런 건 한 업체에서만 보이는 모습은 아니다.
  

 페트병 겉면의 라벨을 떼고 만든 '무라벨 생수'가 처음 나왔을 때는 단지 그 생수를 사보기 위해 우리 편의점에 들른 손님이 있었다. 요즘도 계산대에서 일반 생수보다 무라벨 생수를 더 자주 만난다. 한 편의점의 자사브랜드 무라벨 생수는 출시 후 한 달 간 판매량이 라벨이 있던 제품 대비 80% 가까이 늘었다. 환경 인식이 높아진 소비자들이 죄책감을 덜고 간편하게 분리 배출할 수 있는 상품을 택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여기서 또 흥미로운 점은, 무라벨 열풍으로 같은 기간 생수 전체 매출이 20% 넘게 늘었었다는 점이다. 얇은 비닐 띠 한 장씩을 제거하고서 엄청난 페트병 생산을 촉진하게 된 셈이다. '친환경'이라는 단어가 모든 생산과 소비의 면죄부가 되지는 않는다. 소비자가 먼저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 아는' 수동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관련 정보를 따져보고 소비가 환경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조사를 하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환경을 위하는 척하며 환경을 파괴한다는 면에서는 나도 위장 환경주의자가 아닐까? 혹시 사람들이 환경 문제를 신경 쓰지 않고 지낼 때는 ‘나는 달라’라는 선민의식으로 열심히 실천하다가 모두의 의제가 되니까 시들해진 건 아닐까? 환경 문제가 일상 문제 그 자체인데 일상이 버겁다는 핑계로 SNS에 올라온 환경단체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르며 죄책감을 퉁치고 있는 것도 같다. 인생의 반은 살았으니 지구를 쓸 만큼 쓰고 ‘쓰튀’를 하자는 마음이 드는 것 같기도 하고.


 한 번은 충격을 받았다. 몇 년 전의 일인데, 그린피스에서 시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플라스틱 집콕 조사'에 참여했었다. 단 일주일 간, 당시 2인 가구인 우리 집에서 나온 비닐은 자그마치 114개. 마지막 날 엑셀시트에 쓰레기 정보를 기록하는 중 정크푸드주의자인 동거인에게 장난스럽게 호통쳤다.


- 누가 이렇게 비닐을 많이 버렸어!


 입력을 마친 후 목록을 다시 살펴보며 민망해졌다. 대부분은 그가 아닌 내가 만들어낸 쓰레기였다. 왜 내가 만드는 쓰레기는 적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환경에 관심을 갖고 노력한다는 만족감 때문에 현실을 똑바로 보지 못한 게 아닌가 싶었다.


 따지고 보면 환경운동가로 유명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도, 그레타 툰베리도 모순된 행동을 한다고 욕을 먹는다. 현대 도시인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누가 완벽할 수 있을까? 확실한 건 아예 신경 쓰지 않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신경 쓰면서 사는 게 초미세먼지 한톨만큼이나마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는 거다. 그런 사람들이 꾸준히 있었던 덕분에 작년부터 손님들에게 “일회용 봉투 판매가 금지돼서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됐으니까.


 몇 년 사이 내가 진열하는 편의점 상품들의 포장재에도 변화가 생겼다. 재작년부터 상자 과자 카스타드, 엄마손파이, 홈런볼 안의 플라스틱 받침이 종이로 바뀌었고, 플라스틱 컵에 들어있던 칸쵸와 씨리얼도 종이 재질 컵에 담겨 나오게 되었다. 작년부터 생생우동 안의 플라스틱 받침과 비닐 포장도 제거되고 종이로 바뀌고 양반김은 플라스틱 받침이 사라졌다. 롯데제과의 경우 연간 350t, 동원F&B는 200t으로 추정되는 양의 플라스틱을 줄이게 됐다고 한다. 2021년 환경운동연합이 펼친 '플라스틱 트레이 제로' 캠페인이 3개월 만에 큰 성과를 거둔 결과이고 초미세먼지 한톨의 영향력을 믿는 사람들의 끈질긴 요구 덕분이다. 이제는 떠먹는 요거트도 플라스틱 뚜껑 없이 나오는 제품들이 생겼다. 


 진열하고 판매하는 마음이 전보다는 한결 가볍지만, 이제야 좀 시작인 것 같은 기분이다. 음료의 묶음포장은 대부분 비닐이고 매일 물건 정리 후 나오는 비닐 포장재는 구기고 접어도 큰 상자 두 개에 다 담기지 않는다.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물건들이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 슬프고 지친다. 그래도 상상해 본다. 언젠가 편의점에서 일회용품과 플라스틱이 완전히 사라지는 날이 올 수도 있을까?


 편의점에서 아이들을 보면 종종 생각한다. 너희들은 지금 태어난 죄로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세상을 대신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구나. 코로나가 유행하던 시기에는 마스크를 어린 아이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또 그저께예년보다 달이나 길어진 여름 뒤 갑자기 추워져 '지금이 무슨 계절인가'를 놓고 진지하게 토론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런 마음이 들었다. 썩지 않는 포장으로 가득한 주전부리를 사 먹게 한 것부터 미안해진다.


 그러다 나를 정신차리게 하는 아이들도 만난다. 예를 들면, 단지 모양 우유의 윗면을 앞니로 깨물어 구멍 내고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해서 빨아먹으면 빨대 안 써도 돼. 되도록 안 써야지" 라고 가르쳐주는 아이. 간혹 이런 아이를 보면 생각하는 것이다. 40년간 지구를 알차게 써먹고 엄청난 플라스틱 쓰레기와 미세먼지를 물려주는 어른 명인 내게 염세주의에 빠질 자격이 있을까? 한참을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이렇게 세상을 포기할 권리가 내게 있을까?


 사실, 빠르게 변하는 기후에 지치지 않고 좀처럼 변하지 않는 세상에 지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회의주의와 염세주의에 젖게 되는 것도 이 시대에는 지극히 자연스럽다. 마음은 일회용처럼 갈아끼울 수가 없으니. 그러니까 그저 물건을 되살려 쓰듯이 마음도 한 번씩 닦아서 들여다볼 일. 지친 마음부터 잘 살펴줘야겠다.


 그러고 나면 전처럼 좀더 주변을 둘러볼 수 있게 되겠지. 환경 문제에 무관심한 기업의 상품을 사지 않기 위해 정보를 찾아보고, 환경 기사를 자주 열어볼 수 있겠지. 환경 얘기를 다룬 글들을 다시 쓸 수 있게 되겠지. 그런 게 내가 매일 새로 지는 빚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니체는 허무주의를 '수동적 허무주의'와 '능동적 허무주의'로 나누었다. 수동적 허무주의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는 느낌에 사로잡힌 상태로, 염세주의에 가깝다. 반 능동적 허무주의는 '의미가 없으면 만든다'는 생각에 가깝다. 주어진 의미를 찾는 데서 나아가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나가려는 태도다.


 더 나아질 것이 없어 보일 때도 믿음을 남겨두고 싶다. 믿는다고 반드시 뭔가 바뀌지는 않지만, 믿지 않으면 아예 바꿀 수 없으니. 그래도 허무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면 실천이 있는 능동적 허무주의를 가지면 좋겠다. 어차피 망하는 세상이라면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고 아이들에게 덜 부끄러운 어른으로 살다 가고 싶다. 더럽힌 만큼 치우고 떠나는 게 가능하진 않겠지만 그 마음을 포기하는 것과 실현할 수 없더라도 가지고 사는 건 차이가 있다. 내가 노력했다는 걸 나 자신은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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