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루키 Feb 29. 2024

거울

1975년작 《거울》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감독. ㅡ  그의 영화를 두 번째로 본다. 러시아 감독으로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감독 ㅡ 며칠 전 뉴스를 접했다.



(2024.02.16일) 알레세이 나발니는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71세의 푸틴은 이제 방해물이 없다. ㅡ 이번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면 최장 2036년까지 집권이 가능하(다고 한)다. 2036년이면 83세까지 집권이 가능하다는 계산 ㅡ 푸틴은 현재 (나발니의 죽음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는 상황.


지난주 『기억의 기억들』이란 러시아 작가의 책을 읽었다. 차르의 폭정, 러시아혁명, 두 차례의 세계대전, 레닌그라드 포위 전, 스탈린 시대, 그리고 냉전에서 벗어나자 푸틴이 등장한 것이다. 150여 년의 지난한 격동의 역사. 그럼에도 러시아는 문학, 시, 미술, 음악, 과학 등에서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다. 사실 ... 러시아는 세계 영화사에서도 중요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말이 있다. 종교적 예술론. 예술을 숭배하는 무신론자들 사이에서 예술을 통해 숭고와 무아를 경험한다. 인간의 경험과 지식 너머의 그것(초월 혹은 신) 과의 만남. 나我는 사라지고 궁극을 경험한다. ㅡ 존재는 바람(예술)을 맞는다. 바람이 불면 존재하다 멈추면 사라지는 연기煙氣같은, ㅡ 영화감독들이 인정하는 감독들의 감독, 러시아 시인(영화감독) 타르콥스키. 영화 《거울》의 감상을 시작한다. "딸깍, 딸깍"



+

1936년 2차 대전 중 한 여인이 통나무 울타리 위에 앉아 남편이 돌아오길 기다린다. 갑자기 의사가 등장해 여인에게 다가간다. "우리는 늘 불신하고 서두르죠. 생각할 시간이 없어요."라는 말을 남긴 채 떠난다. 바람과 함께,


소년 알렉세이의 어머니 마루샤(마가리타 테레코바) - 성인 알렉세이의 부인 나탈리아(마가리타 테레코바)


어머니 마루샤와 부인 나탈리아 연기를 한 마가리타 테레코바는 1인 2역을 한다. 데칼코마니, 거울에 비친 상처럼. ㅡ 과거와 현재를 흑백과 컬러로 교차하다 후반에는 구분이 없어진다. ㅡ 영화의 내용은 타르콥스키의 자전적 이야기로 꿈 - 현실 - 기억을 오간다.


?. 흑백과 컬러


영화의 시작과 함께 (흑백 화면으로) 말더듬이 소년과 여자 의사가 등장해 최면을 통해 말더듬이 소년을 치료하는 장면. 약 4분간 보여준다. ㅡ 옥에 티도 나온다. 마이크 그림자가 ... ㅡ TV를 본 것인지, 기억인지, 꿈인지 알 수 없다. 일종의 염원이 느껴졌다. 불안의 치유.


화면은 컬러로 전환된다. 한 여인이 먼 곳을 응시한다. 누군가를 기다린다. 갑자기 한 남자가 등장한다. 자신은 의사라 말하며 접근해 온다. 여인의 뒤쪽에는 (10대로 보이는) 남매와 눈이 마주치자 담배만 피우고 떠난다. 그는 손을 흔든다. 바람은 수풀을 눕힌다. 바람이 멈추자 그는 사라진다. 카메라가 알렉세이의 어머니의 얼굴을 비추자 얼굴에는 그리움이 가득했다.

복잡하다. 어린 알렉세이와 어머니 마루샤는 과거가 되고, 현재 성인 알렉세이는 부인 나탈리아와 똑같이 생겼다. (1인 2역) 그리고 인서트* 되는 장면들 (불타는 헛간, 이를 보는 남자와 여자, 소년,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그림이 들어있는 책등), 흑백 다큐도 등장한다.


* 영화의 장면과 장면 사이에 어떤 물건이나 글자를 집중적으로 확대하여 끼워 넣는 일. 또는, 그 화면


인간은 눈(동공)이 아닌, 뇌의 시각 신경만으로도 사물을 볼 수 있다고 한다. ㅡ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꿈같은 과학적 발전이다. ㅡ 그렇게 눈(동공)을 통해 보지 않은 세상은 흑백으로만 보인다고 한다. 바꿔 말하면 눈(동공)으로 본 것은 의식이 되고. 뇌의 시신경으로 본 것 무의식(꿈, 기억이 될 수 있는)이 된다. 세상은 흑백이다.


그렇다면 컬러의 세상은 무엇일까? 실재이면서도 환시일 수 있다. 눈(동공)이란 필터를 거친, 그래서일까? 흑백 다큐로 보여준 레닌그라드 포위 전, 전쟁 훈련을 받는 10대 초반, 피난을 하는 아이들, 세계 최초로 성층권에 진입하는 소련, 1944년 소련 군대, 1945년 히로시마 원폭 폭발, 1965년 문화대혁명까지, 흑백으로 보여준다. 2024년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과거는 꿈일 수 있다. 하지만 사실이기도 하다. 흑백으로 된.


?. 마루샤(어머니) - 나탈리아(부인) - 거울


알렉세이와 나탈리아 사이에는 아들 이그니트가 있다. 이그니트는 (어머니) 나탈리아를 보고, (할머니) 마루샤도 본다. (1인 2역이다) 나탈리아는 거울을 보고, 마루샤도 거울을 본다. 거울을 통해 두 여인은 서로의 상을 비춘다. 예술에서 모방과 재현이라는 치열한 논쟁을 보는 듯했다. 그림은 사진이나 영화와 달리, 완벽한 모방이 불가능하다. 끝없이 반복되는 재현일 수밖에 없다. 눈으로 본, 빛의 찰나를 그린 것이기에 ...


이그니트는 거울을 통해 어머니 나탈리아를 보고, 할머니 마루샤의 환시를 본다. 나아가 거울을 탈출한 이미지는 독자적으로 이그니트와 소통을 한다. 아마도 이그니트의 꿈속 체험이 아닐지- 이그니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책을 본다. 어머니의 이미지는 <지네브라 데 벤치의 초상>과 겹쳐진다. 어머니를 예술의 이상향으로 삼고 싶은 것 아닌지- 이그니트를 구원할 예술을 찾고 싶은 방황. 기억 - 꿈 - 현재

(좌) 나탈리아이자 마르샤(마가리타 테레코바) ( (우) 레오나르도 다빈치 <지네브라 데 벤치의 초상>, (1474 ~ 78) 출처: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 목소리


(시각적) 장면들이 철학적이었다. 자주 등장하는 롱테이크에서는 명상적이었다. 이상하게 눈에서 맴도는 것이 아닌 귀로 맴도는 것이 느껴졌다. 목소리. 중간중간 나오는 내레이션 목소리는 시를 읊는다.


(중략)


결국 우리는 모두 해변가에 닿아

그물을 끌어올리게 될 것이다

불멸이 물고기 떼처럼 몰려올 때

집에서 살면서 집이 버티게 하라

나는 내가 좋아하는 시대를 불러 내서

그곳에서 나의 가정을 꾸미리라

그리하여 당신의 아내와 아이들이 나와 같은

식탁에 앉게 되고

증조할아버지들과 손자들이 같은 식탁에 앉게 될 것이다


(중략)


나는 내 운명을 안장에 묶고

지금도 어린 소년처럼 미래가 등자에 서 있는 것을 본다

내 피가 한 세기에서 다음 세기로 흐르는 것만으로 불멸이라 할 수 있다.

따뜻하고 아늑한 구석을 위해서라면

항상 내 삶을 자진해서 바치리

나는 덧없는 인생의 바늘귀에 실처럼 꿰어서

온 세상에 옮겨질 수 있으리 _실제 타르코프스키 감독 아버지의 시


어디서 나오는 목소리일까? 《거울》 속 목소리는 영화와 영화를 보는 관객과의 양자에 얽힌 목소리가 아닌 제3의 존재 같았다. 흑백과 컬러로 교차해 전개되는 영상에서 흔들리는 경계들, 영화를 감상하는 관객들은 각자의 무의식 속 목소리를 듣는 것 아닐지- 아직 들어보지 못한 깊은, 저 너머의 무의식



#트리비아 #trivia #나무위키 #뒷이야기

ㆍ사이트 앤 사운드 선정 역대 최고의 영화 19위,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선정작으로 꼽히는 등, 작품 자체는 타르콥스키 감독 작품 중에서도 또한 손꼽히는 걸작이다. 단, 타르콥스키 영화 중 가장 난해하기로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다.

ㆍ영화 내내 감독의 아버지의 자작시가 내레이션으로 흘러나오며(낭송도 아버지가 직접), 마지막 장면에는 감독의 어머니가 출연하는 등 감독 자신의 개인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그의 아버지는 러시아 시인으로 유명하다)

ㆍ영화를 보다 보면 옥에 티가 몇 번 발견된다. 오프닝의 말더듬이 치료 장면에서 벽에 마이크 그림자가 비친다던지, 할머니가 유리 앞에 서 있는데, 그 옆으로 카메라 렌즈가 보인다던지, 엔딩의 숲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에 카메라 레일이 보인다던지...



인상impression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공포영화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롱테이크가 많아 지루한 예술영화라 할 수 있다. 초현실적인 몽환적 장면에서는 철학 하게끔 (질문하게끔) 한다. 다양한 함축과 상징들. 영상적, 예술적 시詩를 봤(읽었)다. ㅡ 영화에 대한 해석은 자의적임을 밝힙니다. ㅡ 철학 시집.


덧 1, 나름의 해석을 하나 더 추가하면, 후반 나탈리아는 불타는 나무*, 모세처럼 계시를 받고 싶다는 말을 알렉세이에게 말한다. 이는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하고 싶었던 말 아니었을지. 감독의 철학(종교적 예술론)에서 갈구하는 계시, 구원 받고자 하는 바램-


불 붙은 떨기나무의 의미 (출애굽기 3장 1절 ~ 8절)

떨기나무는 이집트에서 노예로 지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뜻한다. 여기에 불꽃은 연단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겐 불의 심판을 내리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떨기나무는 아랍 쪽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작은 가시덤불로 연약하고 쓸데가 없는 나무이다. 이 하찮은 것들에 하나님이 거룩함을 입힌 것이다.


덧 2, 엔딩에서 바흐의 요한수난곡*이 흘렀다.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삶과 영화 ... 러시아의 역사와 문화. 같은 궤를 따라 돌고 있는 것 아닐지 ...


* 수난곡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를 표현한 곡으로, 예수가 그의 제자들과 최후 만찬을 나눈 때부터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까지의 고통받은 역사를 노래한다. 수난곡은 신약성서의 4복음서인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기초하고 있다.

.

.

.

☞ 하루키의 영화 생각

1. 영화는 시詩라 생각합니다.
2. 평점을 매기지 않습니다.
3. 감상은 미니멀을 추구합니다.




* 영상 소개

매거진의 이전글 타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