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젠 들라크루아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은 고대 그리스 역사가 디오도루스 시쿨루스의 역사서에 나오는 아시리아의 왕 사르다나팔루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낭만주의 시대의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풍부하고 선명하며 따뜻한 색채와 넓은 붓 터치를 사용합니다. 바이런 경의 희곡 사르다나팔루스(1821)에서 영감을 받아 헥터 베를리오즈의 칸타타 사르다나팔레(1830)와 프란츠 리스트의 오페라 사르다나팔루스(1845-1852, 미완성)에도 영감을 주었습니다. _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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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미술 기법, 역사적 배경 등 일체의 객관적 사실을 배제한 하루키의 감각과 추상표현으로 쓴 감상입니다.)
+ 하루키 감상
* 하기 아리아(2분 29초)는 리스트가 '사르다나팔루스'에서 영감 받아 만든 오페라의 일부로 (리스트의 미완성 오페라) 음악학자 데이비드 트리펫이 완성시킨 오페라 속 아리아입니다. 음악을 반복해 들으며 그림을 감상해 보길 추천해요 :)
조지 고든 바이런의 극 사르다나팔루스를 바탕으로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가 계획했던 오페라. 1막의 스케치만 쓰인 채로 약 170년 동안 방치되었으며 이후 영국의 음악학자 데이비드 트리펫이 완성시켜 2018년에 바이마르에서 초연되었다. _나무위키
1821년 혁명 지도자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는 오랫동안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그리스인의 민족정신을 규합해 독립운동을 시작합니다. 오스만 제국(현 튀르기예의 전신)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크레타, 콘스탄티노폴리스, 키프로스, 마케도니아, 에게 해 제도 등에 살고 있는 수많은 그리스인을 학살합니다.
당시 프랑스는 그리스 독립을 지지하였고, 오스만 제국을 비난했습니다. 외젠 들라크루아는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아 키오스 섬*을 1823년 방문합니다. 처참했습니다. 성한 건물이 하나도 없었고, 사람들은 거리에서 먹고, 자고, 반쯤 벌거벗은 상태였습니다. 눈동자는 초점이 없었습니다.
좀비 같은 사람들 사이를 굶주린 늑대처럼 눈을 희번덕이며 말을 타고 돌아다니거나, 무기를 든 병사들은 모두 오스만 제국 군인이었습니다. 누군가 아포칼립스(종말)를 봤다면 바로 키오스 섬일 것입니다.
키오스 학살은 1822년 그리스 독립 전쟁 중 오스만 군대에 의해 키오스 섬에 살고 있던 그리스인 인구의 약 5분의 4 (최대 10만 명이 학살되었거나 노예가 되었고, 최대 2만 명이 난민으로 탈출)가 재앙적 피해를 입은 사건 _Wiki
심한 충격을 받고 (프랑스) 파리로 돌아온 들라크루아. 그는 작업실에 틀어박혀 한 달 내내 그림만 그리더니 <키오스 학살>을 완성합니다. (하기)
들라크루아는 예술가가 단순히 아름다운 그림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목소리를 듣고 이를 창조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하며,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가게 하기 위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짐을 느낍니다. <키오스 학살>을 완성하고 떠오른 희곡이 있었습니다. 들라크루아가 가장 좋아하는 영국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 그가 쓴 아시리아(기원전 2450년 ~ 서기 609년 동안 번성했던 중동의 국가)의 마지막 군주 사르다나팔루스의 폭주에 대한 희곡 <사르다나팔루스*>
* 광기에 사로잡힌 폭군의 마지막 모습을 담고 있다. 아시리아의 전설적인 군주 사르다나팔루스. 수도 니네베가 적군에 의해 포위되자 자신이 아끼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사르다나팔루스 왕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바이런의 문학적 상상력이 결합한 작품
"한 인간이 절대 권력을 손에 쥐었고, 그러한 인간이 극한의 궁지에 몰렸을 때 광기, 폭력, 파괴성을 그리고 싶다. 인간 심연의 본성을 그려 권력자와 시민들에게 경각심을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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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케치한 그림 위로 수평선 두 개를 그었습니다. 상, 중, 하, 삼등분됩니다.
상)
사르다나팔루스 왕의 침실. 커다란 침대. 그 끝에 무심한 표정의 왕. 왕은 한쪽 손으로 얼굴을 받치고 있습니다. 흰색 옷을 입고 있는 사르다나팔루스 왕. 그의 뒤편으로 둘러싼 벽은 마치 잿빛 안개처럼 비밀스럽습니다.
중)
빛에 바래진 붉은 침대 보가 덮인 침대. 전체의 5분의 3을 차지하게 묘사합니다. 마치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 아홉 번째 파도를 맞이하는 망망대해의 조각배 같습니다. 일촉 즉발의 상황에 사르다나팔루스 왕은 현 세계의 존재가 아닌 듯 고고합니다.
하)
왕의 지시에 따라 부하들은 살아있는 것(시녀와 첩, 동물들)을 죽이고, 예술품을 파괴합니다. 찌르고, 베고, 절단합니다. 모든 것을 파괴하라, 아시리아가 곧 짐이고, 짐이 곧 아시리아다. 먼지 하나, 물 한 방울, 공기의 입자까지 모두 나의 것. 짐은 모두 회수한다.
2. 전경, 중경, 후경, 그리고 그림자 속 움직임
▶ 전경 - 전경에는 사르다나팔루스 왕의 심복이 크림색 피부의 농염한 여인의 목 아래 쇄골뼈 부분부터 단검의 끝을 서서히 눌러 넣고 있습니다. 여인은 원망 가득한 눈으로 왕을 노려봅니다.
한편, 흑인 부하는 화려하게 장식한 왕의 말 목을 절단하려 합니다. 살려고 하는 말과 죽이려는 검은 병사의 힘겨루기. 마치 삶의 의지와 죽음과의 힘겨루기 같습니다.
▶ 중경 - 침대 밑 끝에는 두 개의 황금 코끼리 얼굴 상이 보이고, 반라의 죽은 여인의 시체와 왕의 발이 보입니다. 광기, 살육, 관능, 절망 등 이성이 상실된 힘의 축제 같습니다.
▶ 후경 - 사르다나팔루스 왕은 동요가 없습니다. 사방에서 비명과 부서지는 소리, 피 냄새가 진동하는 왕의 침실. 사르다나팔루스 왕은 과도한 힘에 취해 공포와 두려움 없이 파괴적 광경과 힘의 실현에 살아있음을 감각합니다.
▶ 그림자 - 왕의 침실에는 숨은 그림처럼 어렴풋한 그림자들이 곳곳에 보입니다. 살기 위해 숨어 있거나 혹은 죽은 척하고 어쩌면 사르다나팔루스 왕을 암살하려는 자일지 모릅니다. 혼돈입니다. 미스터리합니다.
3. 들라크루아는 완성된 스케치 위로 기본색을 입히고 다시 색을 입히기 시작합니다. 굉장히 오랜 시간과 에너지가 소요되는 작업. 이 작업의 최종 목표는 '파괴'입니다. 단어나 문자가 아닌 감각으로 느낀.
다르게 말하면,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을 관람하는 관객이 광기에 파괴되는 것'을 목표로.
* 화가 -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 ~ 1863, 프랑스)
+ 전기(1798-1822)
외젠 들라크루아는 1798년,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가 남아있던 시기에 태어납니다. 그의 유년기는 나폴레옹의 집권과 몰락이 겹치는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그의 예술 세계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1816년, 18세 들라크루아는 파리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해 신고전주의 화가 자크-루이 다비드의 제자인 피에르-나르시스 게랭에게 수학합니다. 이 시기에 그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고전 작품들을 모사하며 기술을 연마합니다.
그는 전통적 교육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만의 표현 방식을 모색해 갔습니다.
+ 중기(1823-1845)
1824년 <키오스 섬의 학살>을 발표하며 큰 성공을 거둡니다. 이 작품은 그리스 독립 전쟁의 참상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줍니다. 1825년 영국에 방문하였고 존 컨스터블, 윌리엄 터너 등의 작품에 큰 영감을 받습니다. 특히 영국 풍경화의 색채 사용법에 깊은 인상을 받아 자신의 화풍에 적극 반영합니다.
1827년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을 발표. 과감한 구도와 선정적인 주제로 논란을 일으켰지만, 동시에 들라크루아의 예술적 독창성을 확실히 보여줍니다. 1832년, 모로코 여행을 떠나 북아프리카의 이국적 풍경과 문화에 매료됩니다. 이 여행은 그의 예술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이후 그의 작품들은 오리엔탈리즘이 근간이 됩니다.
1833년부터 1861년까지 파리의 여러 공공건물 벽화를 제작합니다. 부르봉 궁전, 룩셈부르크 궁전, 루브르 박물관 등에 그의 작품이 남아있습니다. 이 시기 그는 대규모 역사화와 종교화를 통해 자신의 예술적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이 시기 들라크루아는 프랑스 낭만주의 미술의 대표 주자로 확고히 자리매김합니다.
+ 후기(1846-1863)
1848년, 프랑스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나 루이 필리프 왕정이 무너지고 제2공화정이 수립됩니다. 들라크루아는 이 역사적 사건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라는 작품으로 표현합니다. 이 그림은 혁명의 상징이 되어 현재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습니다. 1850년대에 들어서면서 들라크루아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작품 활동을 이어갑니다. 특히 이 시기에 그는 자연과 동물을 주제로 한 작품을 많이 그립니다.
1860년대에 들어서면서 들라크루아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고, 1863년, 65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사망합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성 안나와 성모>로, 미완성인 채로 남겨집니다.
+ 비평적 관점
일부 비평가들은 들라크루아의 작품에 나타나는 강렬한 감정 표현을 두고 과장되고 연극적이라 비판합니다. 이들은 그의 작품이 이성적 판단보다는 감정에 호소하는 경향이 있다고 봅니다. 역사적 사건을 다룬 그의 작품들이 실제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묘사되었다는 부분도 지적받습니다. 이는 예술적 해석의 자유와 역사적 정확성 사이의 갈등을 보여줍니다. 또한 그의 오리엔탈리즘 작품들이 서구의 편견에 기반한 환상과 이국적인 동양의 모습만 부각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이는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문화적 전유나 오리엔탈리즘의 문제로 지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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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특징
1. 역동적인 구도와 극적인 장면 구성
들라크루아는 정적인 신고전주의 화풍에서 벗어나 움직임과 에너지가 넘치는 구도를 선보입니다. 대각선 구도를 자주 사용하여 긴장감과 운동감을 표현하고, 인물들의 포즈와 제스처를 과감히 드라마틱한 효과로 만들어냅니다. 또한 주제의 중심을 화면 중앙에서 약간 벗어나게 배치하여 역동성을 더합니다.
2. 대담하고 표현적인 색채 사용
들라크루아는 색채를 통해 감정과 분위기를 전달하는 데 탁월했습니다. 보색 대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시각적 충격과 생동감을 줍니다. 따뜻한 색과 차가운 색의 대비를 통해 깊이감과 공간감을 창출합니다. 깨끗한 원색 대신 미묘한 중간색 톤을 많이 사용합니다.
3. 자유로운 붓 터치와 표현적인 기법
들라크루아는 정교한 마감보다는 감정과 에너지를 전달하는 붓질을 중시했습니다. 빠르고 자유로운 붓 터치로 생동감과 즉흥성을 표현합니다. 물감을 두껍게 바르는 임파스토 기법을 사용하여 질감을 강조합니다. 세밀한 묘사보다는 전체적인 인상과 분위기 전달에 집중합니다.
+ 의식 안의 미술관
들라크루아의 그림은 색. 생동감. 사회. 역사. 오리엔탈리즘이 특징인 것 같습니다. 들라크루아는 인상주의 이전의 낭만주의 화가이지만, 인상주의에서 느껴지는 색채적 인상이 느껴지고, 당시 사회와 역사에 대해 알고 보면 지적 유희도 덤으로 즐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현대 음악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인물을 만날 시간,
이 곡을 통해 1월 최고의 기분을 만끽하시기를." _1일 1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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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과 차이. 에서 느껴지는 우주의 진동과 떨림. 느껴보시기 - ㄹ _하루키
* 미니멀리즘 음악의 선구자인 스티브 라이크가 작곡한 "Electric Counterpoint"의 첫 번째 파트를 선보입니다. 이 작품은 1987년에 발표되었으며, 전기 기타를 주로 사용하여 다양한 리듬과 톤을 통해 반복과 대비를 활용한 카운터포인트 기법을 특징으로 합니다
+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