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츠 폰 슈빈트
이 그림은 아침 시간의 평화로운 순간을 포착합니다. 슈빈트는 일상적인 장면을 서정적이고 낭만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아침 시간>은 슈빈트의 특징적인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일상의 소소한 순간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슈빈트가 민간 설화, 기사도, 그리고 민중의 노래에서 영감을 얻어 창작했던 그의 예술 세계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_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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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미술 기법, 역사적 배경 등 일체의 객관적 사실을 배제한 하루키의 감각과 추상표현으로 쓴 감상입니다.)
+ 하루키 감상
1857년 당시 뮌헨 아카데미 교수였던 슈빈트는 루트비히 왕으로부터 명을 받아 영국을 다녀옵니다. 당시 영국은 라파엘 전파* 운동이 한창이었습니다.
* 라파엘 전파는 1848년 영국 화가들이 결성한 개혁적인 문예 유파로, 목적은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운 화풍을 되살리는 것. '중세로의 동경'이란 주제가 강했습니다.
슈빈트는 영국에서 본 사실주의적이며 현실과 동떨어진 라파엘 전파 그림들에 큰 실망을 합니다. 하지만 (낭만주의 화가) 윌리엄 터너, 존 컨스터블 그림을 보고 큰 감동을 받습니다. 슈빈트는 뮌헨에 돌아와 루트비히 왕에게 임무를 보고 하고, 집으로 향합니다. 한동안 그림을 그릴 수 없었습니다. 영국에서 본 그림들로 인한 감동, 절망, 영감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고, 강렬한 빛이 만든 짙은 그늘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6개월이 흘렀습니다.
1858년 늦은 봄. 오늘도 작업실에서 아무런 그림도 그리지 못한 채 잠이 든 슈빈트. 암막 커튼이 처진 작업실에선 밤낮의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문득 밖이 궁금해 작업실을 나왔습니다. 복도가 보이고, 창 사이로 스며든 햇빛이 마치 조명처럼 슈빈트가 가야 할 길을 밝힙니다. 빛을 쫓아 걷다 보니 딸 로렌의 방 문이 나타납니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들어오세요" 로렌의 경쾌한 목소리가 들렸고, 방문을 열자 방안의 빛이 한 번에 동공으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눈이 부셨습니다. 얼마쯤. 빛은 썰물처럼 사라지고 실루엣이 보입니다. 창문을 열고 밖을 보고 있는 로렌의 뒷모습.
"오~ 로렌, 사랑. 아침 햇살. 감사합니다. 이제 그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슈빈트는 로렌과 가벼운 인사를 끝내고 발을 돌려 작업실로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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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체적으로 회색 톤. 위로 우드 질감에 흰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적색과 녹색으로 특색을 줍니다. 열린 창문 너머로 보인 풍경. 깊이감과 몰입감을 일으켜 현실에서 본 비현실. 동경을 만듭니다.
2. 1850년대 독일 중산층 가정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방. 한 소녀가 창문을 열고 창밖 풍경을 보고 있습니다. 흰 드레스를 입은 소녀. 소녀의 뒷모습에서 아침을 맞이한 기쁨과 설렘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뒷모습은 빛의 이면. 그늘이 보입니다.
3. 창밖 풍경은 제한적으로 보이지만, 소녀가 발 딛고 있는 방안 마룻바닥엔 풍성한 그림자 풍경이 보입니다. 캔버스 삼분의 일. 소녀, 서랍장, 의자, 침대, 가운, 협탁, 닫힌 창 등 창밖의 빛이 만든 다양한 그림자들. 빛의 이면 풍경들.
4. 아침. '해가 뜬 후부터 낮이 되기 전까지의 하루' 24시간이 만든 '하루'가 아닌, 6시 ~ 11시 사이의 '하루'. 소녀는 '하루'를 맞이합니다. 짧은 하루지만 기쁨(빛)과 두려움(빛이 만든 이면의 그늘)이 교차하는 <아침 시간>
* 화가 - 모리츠 폰 슈빈트Moritz von Schwind(1804 ~ 1871, 오스트리아)
+ 전기(1804-1828)
모리츠 폰 슈빈트는 1804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태어납니다. 그의 유년 시절은 비엔나의 문화적 환경 속에서 형성되었고, 미술 교육과 자유로운 청년기를 보냅니다.
슈빈트의 전기에서 주목할 점은 작곡가 프란츠 슈베르트와의 교류입니다. 슈빈트는 슈베르트의 친구 그룹에 속했으며, 슈베르트 가곡의 삽화 작업도 합니다. 슈빈트의 예술적 감성과 음악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중요한 경험이 됩니다.
그러나 슈빈트는 비엔나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해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고, 때때로 카페의 간판을 그리며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습니다.
1828년 슈베르트가 사망한 해 슈빈트는 뮌헨으로 이주합니다. 이는 그의 예술 인생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 중기(1829-1847)
뮌헨으로 이주한 후 슈빈트는 화가 율리우스 카롤스펠트와 친분을 쌓았고, 당시 뮌헨 아카데미의 원장이었던 페터 코르넬리우스의 지도를 받습니다. 이러한 만남은 슈빈트의 예술적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1834년, 슈빈트는 루트비히 1세의 새 궁전 벽화를 장식하는 중요한 의뢰를 받습니다. 이 작업은 그의 명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합니다. 또한 그는 괴테와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삽화를 작업하여 인정을 받습니다.
이 시기 슈빈트는 자신만의 예술 영역을 구축해 나갑니다. 시적 상상력의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기사도, 민속학, 민중의 노래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만듭니다. 1839년에는 새로운 프레스코화 작업을 맡았는데, 이는 괴테의 아이디어를 구현한 것입니다.
1844년부터 슈빈트는 프랑크푸르트에 거주하며 작업하였고, 자신의 대표 이젤화 중 일부를 제작합니다.
+ 후기(1847-1871)
1847년 슈빈트는 뮌헨 아카데미의 교수로 임명되어 뮌헨으로 돌아갑니다. 슈빈트의 명성이 절정에 달한 것은 1855년경입니다. 그는 바르트부르크 성에 "가수들의 경연"과 "헝가리 엘리자베스의 역사"를 주제로 한 벽화를 완성합니다. 관객들의 찬사를 받았고, 이를 기념하는 대규모 음악 축제에 슈빈트는 바이올린 연주자로 참여했다고 합니다.
1857년 독일을 대표해 영국을 방문하고 돌아와 맨체스터 미술품에 대해 루트비히 왕에게 공식 보고 합니다. 또한 슈빈트는 친구 슈노르와 함께 글래스고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을 합니다.
슈빈트는 점차 건강이 악화되자 고향 비엔나로 돌아옵니다. 멜루지네 전설에 기반한 연작과 비엔나 국립 오페라 하우스를 기념하는 작업을 하였고, 1871년 (67세) 뮌헨에서 사망합니다.
+ 비평적 관점
동시대 비평가들은 슈빈트가 민화, 중세 기사도, 동화 같은 주제에 집중하며 19세기 사회적 변화(산업화, 1848년 혁명 등)를 외면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예술사가 루돌프 아이트엘베르거(Rudolf Eitelberger)는 그의 작품이 당시 부르주아 계층의 향수와 환상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피적 예술"에 머물렀다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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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특징
1. 낭만주의적 역사화
슈빈트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이상화된 모습을 그립니다. 그의 작품에는 기사, 성, 그리고 당시 지역적 매력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는 19세기 초 독일 낭만주의 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역사적 주제와 민족적 정서를 결합한 표현입니다.
2. 서정적 풍경화와 장르화
슈빈트는 일상적 순간들을 포착하면서 깊은 감성과 의미를 담아냅니다. 그의 작품 중 <신혼부부>, <이별하는 사람들>, <명상하는 방랑자>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작품들은 서정성이 돋보이며, 때로는 감상적이지만 정확한 세부 묘사와 견고한 장인 정신으로 균형을 이룹니다.
3. 동화적 상상력
슈빈트는 동화를 회화의 주제로 삼아 새로운 예술적 영역을 개척합니다. 1852년부터 1854년까지 제작한 "신데렐라"는 동화 그림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여러 전통을 결합하여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화가-시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접근은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시도였으며, 슈빈트만의 독특한 예술 세계를 구축하는 데 기여합니다.
+ 의식 안의 미술관
신데렐라 하면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익숙한데,
하기 1852년 슈빈트가 그린 신데렐라를 보면,
낯설면서 성모 마리아 같은 신데렐라가 보입니다.
월트 디즈니 신데렐라보다 성숙하고, 신성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색다른 신데렐라를 감상해 보실까요. :)
* 유럽, 지중해 문화권에서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정확한 원작자가 누군지는 불분명하다. 현존하는 신데렐라류 이야기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후 1세기 스트라본의 『지리학』에 기록된 로도피스(Rhodopis) 설화로, 고대 이집트의 그리스계 여성 로도피스가 목욕을 하던 도중 독수리가 그녀의 샌들을 채가 파라오의 궁정에 떨어뜨리는데, 이를 기이하게 여긴 파라오가 사람을 파견해 신발 주인을 찾다 로도피스를 알게 되어 멤피스 궁정으로 불러 결혼했다는 내용이다. 이 로도피스는 기원전 5세기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실존 인물로 언급되고, 기원후 2~3세기 아일리아누스의 글에서도 설화와 함께 언급되는데, 작중 배경과 서술 시점을 고려해 보면 못해도 기원전 6세기까지는 거슬러 올라가는 설화라고 할 수 있다. _Wiki
"아주 좋구나, 얘야. 그런데 음악은 남자들이 하는 일이야."
동생 펠릭스가 유럽 순회공연을 시작했을 때,
누나 파니는 집에만 있어야 했다." _1일 1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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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월이다. 1월은 창 밖 나뭇가지에 잠시 앉았다 날아간 까치처럼, 기척을 알리고, 순식간에 날아갔다. _하루키
* 어렸을 때 파니는 동생 펠릭스와 같이 음악을 배웠다. 13살의 파니는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암보로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파니 멘델스존이 15살 때 동생 펠릭스의 장래를 위해 음악가의 길을 포기해야만 했었다. (중략) 파니가 만든 6개의 가곡집은 동생 펠릭스 멘델스존의 이름으로 출판됐다. 훗날 펠릭스 멘델스존은 "내 누이가 나보다 뛰어난 작곡가였다" 라고 말했다. _Wiki
삶이 고양될지 혹은 무해할지, 의식 안의 미술관을 꿈꾸며 ... 감사합니다.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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