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못러에서 벗어나기
고전 전쟁영화 중에 '서부전선 이상없다' 가 있다. 유명한 소설을 기반으로 1930년 첫 작품 이래 여러 차례 리메이크 된 영화이다. 그 영화에는 다음 장면이 있다.
제 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 참호에 독가스가 살포된다. 여기저기서 "개스" "개스" 소리가 들리고 다들 정신없이 방독면을 착용한다. 이 때 한 병사가 허둥지둥 대다가 방독면 쓰는 타이밍을 놓치고 만다. 급한 김에 이미 죽은 병사의 방독면을 벗어서 쓰려고 하지만 이미 고장난 방독면이다. 그는 고통 속에서 죽고 만다.
생사가 오고 가는 짧은 몇 초의 순간에서 이 병사가 조금만 더 침착했으면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사람은 서두르다 보면 허둥지둥댄다. 평소에는 쉽게 할 수 있는 일도 못하는 경우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위에서 말했던 '서부전선 이상없다' 외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오는 전쟁 영화가 있다. 제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공격을 다룬 영화 '진주만' 이다.
수많은 환자들이 병원으로 밀어닥치게 되고, 여기저기서 터지는 비명소리로 병원은 아비규환이 된다. 이 때 간호사는 수많은 환자들을 치료하느라 허둥지둥대고, 약통을 실수로 쏟는 등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서두르게 되는가? 위기 상황, 돌발 상황이 닥쳤을 때 서두르게 된다.
어제 회사 리더십 세미나가 있었다. 사장부터 팀장까지 대강당에 모여서 외부 강사 리더십 강의를 듣는 과정이었다. 갑자기 팀장이 나에게 사장님이 보실 강의 교재를 빨리 제본해서 가져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아니, 진작에 말할 것이지 갑자기 제본을 하라니..
그게 도깨비 방망이 한 번 뚝딱하면 나오는 줄 아나'
혼자서 투덜거리면서 급하게 제본을 하는데, 아뿔사..실수의 연속이었다. 프린터기는 종이가 계속 안에서 걸리고, 펀치를 엉뚱한데 뚫어서 다시 출력해야 하고..왜 이러는건지 답답하기만 하다. 평소에 안 생기는 실수들이 소나기 쏟아지듯이 한 번에 몰아친다.
겨우겨우 종이를 인쇄해서 스프링으로 껴서 책으로 만들어 갖다줬다. 팀장은 내 수고를 아는지 모르는지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이 휙하고 교재를 가져간다. 내가 인쇄소 직원도 아니고 이러려고 회사다니나 자괴감이 밀려오는 순간이다.
사람은 위기가 찾아오면 시야가 좁아진다. 그리고 몸이 경직된다. 온 신경이 위기를 빨리 탈출해야 한다는데 쏠리기 때문에 이것저것 다양한 것을 신경쓰지 못하게 된다.
호랑이가 내 눈 앞에 나타났다. 이 때 오늘 애인이랑 어떤 식당에서 저녁 먹을까? 이런 고민하는 사람은 없다. 온 마음과 생각을 다하여 탈출방법을 생각해야 하는데 현실은 무섭다! 외에는 별 생각이 들지 않는다. 몸이 얼어붙은 채 그 자리에 서있게 된다.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서부전선은 참호전이었다. 4년 내내 상대의 참호로 "닥치고 돌격!" 만 반복하다가 끝난 전쟁이다. 100명이 뛰어가면 죽거나 다치지 않고 돌아오는 사람은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상대 기관총에 다 갈려 나간 것이다.
이 때 생존했던 병사들의 증언이 재미있다. 돌격 호루라기를 기다릴 때는 엄청나게 두려운데 막상 돌격할 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고 한다. 옆에서 같이 뛰는 동료가 하나 둘씩 픽픽 쓰러지는게 현실이 아니라 마치 영화 속 장면처럼 느껴진다고 증언했다.
사람은 위기의 순간이 오면 이성이 마비된다. 그냥 그 순간 하나 밖에는 눈에 보이는게 없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합리적 사고, 생각의 구조화 이런게 가능하겠는가.. 주변 상황이 보이지 않게 되니 당연히 실수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게 가장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그래서 뭘 어쩌라고..사실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최선이다. 미리미리 준비해서 여유 있게 일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상과는 다르다. 직장에서는 수많은 돌발상황이 터진다. ASAP, 아삽으로 날라오는 수많은 일들이 나에게 화살 처럼 꽂힌다.
갑자기 날라오는 급한 일을 혼자 처리하려고 하면 망하기 쉽상이다. 특히나 많이 해보지 않은, 나도 잘 모르는 일을 나 혼자 하는 것은 망하는 지름길이다.
이 때 나를 잡아줄 사람이 필요하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때도 혼자서 물에 뛰어들면 안된다. 밖에서 밧줄을 잡아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내가 멘붕이 와서 흔들릴 때 나에게 조언을 해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팀장이나 임원이 갑자기 급한 돌발 업무를 휙 던지면 꼭 말하자. 나도 잘 모르는 부분이 있고 혼자서는 쉽지 않으니 같이 일할 사람을 붙여달라고. "그걸 혼자서 못해!" 면박을 줄 수 있지만, 면박을 당할지언정 일이 잘 해결되는 것이 혼자서 폭탄 안고 있다가 터져서 죽는 것보다는 100만배는 더 낫다.
물론 정말 초 단위를 다투는 울트라 슈퍼 급한 일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게 아니라면 시간을 더 달라고 하자. 그렇게 시간에 쫓길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쉽게 던지는 것은 함량 미달 리더이다.
아직 여유가 있는 일이면 당당하게 시간을 더 달라고 요청하자. 평정심을 잃고 엉망으로 처리된 일 넘기는 것보다,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제대로 된 결과물을 가져가는게 훨신 낫다.
야구나 축구 선수들을 보면 씹는 담배나 껌을 질겅거리는 경우가 많다. 메이지리그 경기를 보면 타자가 공을 기다리면서 풍선껌을 불기도 한다.
긴장이 밀려오는 순간에는 조금이나마 긴장을 낮추는 이완도구가 필요하다. 껌이나 커피가 그 탈출구가 될 수 있다.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업무가 아니라면 이어폰을 끼고 볼륨을 높여 노래를 듣는 것도 방법이다. 박태환 선수가 수영장에 입장할 때 커다란 헤드폰을 끼고 나타나는 것도 시합 전 긴장을 낮추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하면 초조한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
급하고 초조한 상황을 좋아하는 사람은 지구상에 아무도 없다. 사람은 누구나 예측 가능한 상황을 좋아하며, 갑자기 들이닥친 일은 돈 받으러 온 빚쟁이 마냥 증오의 눈길로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이걸 어쩌나..이게 나에게 밀려오는 경우가 분명히 발생한다. 피할 수 없다고 즐길 수는 없지만 그래도 긴장을 낮출 수 있는 방법은 분명히 존재한다.
긴장하고 서두르면 반드시 실수한다. 내가 정말 자신있는 일에서도 실수가 나오는데 그렇지 않은 일에서야 뭐 실수가 팝콘 마냥 툭툭 튀어나오게 된다.
혼자서 하지 말고 여럿이 같이 하자. 그리고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자. 껌을 씹으면서, 노래를 들으면서 최대치까지 높아진 긴장지수를 낮추자. 세상에 불가능한 일은 없다. 할 수 있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