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는 따뜻한 단호박 라테
단호박을 엄청 좋아한다.
딱딱하고 투박한 겉껍질을 자르고 나면 보기 좋게 노란 속살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필자는 특히나 노란색을 좋아하는 터라 단호박의 외관은 (아니 내관이라고 표현해야 하나) 단호박을 '더'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다. 게다가 일반 호박보다 당도도 높아 확실이 이름값을 해나가면서도 당질과 영양분에 비해 열량이 낮아 죄책감 없이 즐길 수 있는 (나름의) 다이어트 식품 중 하나다.
단호박을 즐길 수 있는 데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단호박 찜부터 시작해서 단호박 수프, 단호박전, 그리고 방금 네이버에 검색해보니 단호박 '에그 슬럿'이라는 '힙'한 음식도 있다. 단호박 안에 씨앗을 파내고 "촉촉한 계란과 치즈를 듬뿍~"넣고 쪄내는 음식이라고 하는데 상상만 해도 군침이 돈다. 나중에 개인 주방이 생기면 반드시 도전해봐야지. 아, 그리고 단호박 샐러드도 참 맛나다. 집에서 만들 때는 단호박을 쪄내 온갖 견과류와 (보통 크랜베리랑 아몬드, 호두 정도가 좋다) 사과, 계란 등을 넣고 요구르트와 약간의 마요네즈, 그리고 머스터드를 섞어 비벼주면 완성이다. 열심히 냉장보관 후 청결한 덜어먹기를 실천한다면 오랜 시간 반찬으로든 우유 한 잔과의 간단한 식사로든 단호박 샐러드를 즐길 수 있다. 밖에서 사 먹을 때는 '카페 마마스'의 단호박 샐러드가 일품인데 (광고는 아니다, 슬프게도 아직(?) 나한테 광고가 들어올 이유도 하나도 없는 듯 하지만) 아주 흐물거리지도 않고 아주 딱딱하지도 않고 딱 씹는 맛 좋게 단호박을 쩌낸 후 깍둑썰기를 해서 채소와 (감자 치아바타라고 알고 있는) 세상 부드럽고 쫀득한 흰 바게트 빵과 같은 것 네 조각과 함께 서빙이 된다. 침이 고인다. '클린 한' 입맛을 자랑하는 필자는 이렇게 감칠맛 넘치면서도 건강식인 (또는 건강식일 것만 같은) 단호박 요리를 매우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1등을 뽑으라고 하면 망설임 없이 단호박 스무디/라테라고 답할 수 있다. 사실 좋아하는 카페에서 살짝 추운 날 몸과 속을 녹이기 위해 (무릎엔 카페에서 친절하게 빌려주는 담요를 덮고) 따뜻한 단호박 라테 한 잔 마시는 일을 가장 좋아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무더위가 시작된 7월 초이고, 당장 저번 주 주말이 너무 더웠어서 라테보다는 차가운 스무디가 더 먼저 생각이 났다. 사실 라테 종류가 다양한 카페에서는 녹차라테, 홍차 라테처럼 고구마 라테나 단호박 라테와 같은 메뉴를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는데 시원하게 판매하는 '단호박 스무디'는 생각보다 흔치 않다. 나도 한 단호박 음료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열심히 찾아다녀봤는데 결국 맘에 쏙 드는 단호박 스무디를 파는 곳은 (또는 내가 진짜로 심적 위로를 받기 위해 단호박 스무디를 주문하러 가는) 한 곳 밖에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만큼 흔하지 않기 때문에, 어디서나 팔지 않기 때문에 더 소중하게 느껴지고 더욱 일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또는 그 날 외출의 동선을 조금 수정해서라도 책 한 권 챙겨서 단호박 스무디를 마시러 가는 일을 좋아한다. (이쯤 되면 겉 멋든 힙스터이려나.)
이쯤 되면 "그래서 도대체 그 카페가 어딘데?"하고 궁금해질 수도 있는데 (누군가 내 글을 읽어줄 거라는 엄청난 가정이 들어간 생각이지만) 그건 바로 상수동에 위치한 '이리카페'다. 내가 좋아하는 개성 넘치는 친구가 (이 친구 역시 한 '힙'한다) 몇 년 전 연말에 소개해준 카페인데 그 후로 서울에 갈 때마다 꽤 자주 방문했다. 딱히 약속 장소로 이리카페를 선택하거나 그 동네에 볼 일이 있었던 게 아니라 "아 오늘은 이리카페 가서 단호박 스무디 한 잔 해야지"하는 마음으로 카페에 간다. '자주'간다고 까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되는대로 오직 '카페 방문, ' 아니 단호박 스무디/라테 한 잔을 위해 상수를 찾아가고 있다.
처음에는 추운 겨울이었던지라 따뜻한 단호박 라테를 시켰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거의 수프처럼 진한 단호박 맛에 "우리 진짜로 단호박을 갈아 넣었어요!"라고 주장하듯 단호박의 잔해가 매 모금마다 기분 좋게 느껴진다. 양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우유가 들어간 라테류는 금방 속을 든든하게 해 주니 많지 않은 양도 딱 적당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 후로 이리카페에 가면 메뉴판은 받지도 쳐다보지도 않고 단호박 라테를 주문했다. (나름 성심성의껏 만드신 메뉴판일 텐데... 어떻게 보면 죄송하기도 하다.) 그 후에는 날씨도 따뜻해지고 애매하게 식사 시간을 놓쳤거나 배고픈데 약속 시간까지는 서너 시간 여유가 있을 때 카페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아이스 단호박 스무디"라는 메뉴를 보고 (이때도 메뉴판은 아니었고 계산대 옆에 붙어있는 계절메뉴 홍보 느낌의 프린트 물이었다) 고민 없이 주문해버렸다. 결과는 역시 대만족. 설탕 대신 꿀맛으로 단맛을 내서 더 진하면서 무겁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단호박 스무디 한 잔을 아껴마시면서 좋아하는 책 한 권을 들고 창가 자리에 앉아 독서를 하면 스트레스 투성인 일상에서 벗어나 세상으로부터 단절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데 필자는 그 감각을 너무 필요로 했고 너무나 좋아한다.
이런 행복한 휴식의 '센세이션 (sensation)'이 반복되다 보니 '이리카페에서의 단호박 스무디/라테 한 잔'은 나에게 가장 효과적이고, 보장성 그리고 가성비가 훌륭한 '쉼'의 방법으로 필자의 삶에 자리 잡았다. 어찌 보면 단순히 '단호박 스무디/라테'를 좋아하기보다는 특정 공간에서 내가 선택한 여가 활동으로 시간을 보내는 방법, 즉 '단호박 스무디/라테와 함께하는 시공간'을 좋아하는 듯하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살짝 배고파지는 것 같기도 하고.
살짝 배고픈 오후 단호박과 같은 든든함을 선물해주는 구황작물이 베이스가 되는 라테 한 잔이면 기분이 좋아진다. 괜히 따뜻한 벽난로 옆 흔든 의자에 앉아 음악 감상 또는 독서를 하고 있는 안락한 이미지가 떠오른달까. 실제로 성탄절에 이리카페에 방문한 적도 있는데 이건 이야기가 너무 길어질 것 같으니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고. (이런 게 바로 '클리프행어 (cliff-hanger)' 수법인가? 크크) 내가 좋아하는 단호박에 대해서 실컷 써보니 엄청 먹고 싶어 졌다. 이번 주말엔 마트에 가서 단호박 한 통을 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