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일치기 뉴욕주 업스테이트 (Upstate) 베어 마운틴 주립공원 나들이
11월 4일, 뉴욕시는 한창 투표 열기가 뜨거운 하루였다. 높은 투표율을 바탕으로 조란 맘다니 (Zohran Kwame Mamdani)가 당선되었고, 그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무슬림·아시아계(인도계)·밀레니얼세대 뉴욕시장으로 거듭났다. 뉴욕의 역사가 또 한 페이지 새로 써졌던 그날, 나를 포함한 우리 연구실 동료들은 함께 등산을 떠났다. 가을맞이 나들이를 떠나고 싶다는 몇몇 박사과정생 및 포닥 친구들의 제안에 따라 랩미팅마다 의견을 모았고, 단풍이 절정일 11월 초 직접 업스테이트 (Upstate) 뉴욕으로 등산을 가게 된 것이다. 왜 하필 뉴욕 시장 선거일이었냐고 하면 당일은 컬럼비아대학교 휴일이었고, 주중이었기 때문에 랩에서는 연구, 집에서는 육아를 이어가는 "아빠 포닥" 친구들을 위해 제격인 날이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연구 외적의 연구실 활동을 딱히 즐기지 않지만 (물론 학회는 다른 이야기다. 연구를 빌미 삼아 여행을 떠나고, 같은 분야지만 다른 연구실에서 연구 활동을 이어가는 동료 과학자들과 교류할 수 있는 훌륭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이번만큼은 달랐다. 한국에서는 운전 경력이 4년이 넘지만 미국으로 넘어올 때는 일부러 뚜벅이 삶이 가능한 도시를 선택한 탓에(?) 차 없이 지낸 지 벌써 8개월이 넘어가던 시점이었다. 그러다 보니 뉴욕 근처, 또는 미국 동부에 있는 주립공원이나 국립공원에 가보는 일은 엄두도 못 냈기 때문에 연구실 나들이를 통해 미국의 가을 산을 조금이라도 경험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물론 뉴욕에서 지내는 동안 맨해튼, 브루클린을 누비며 도시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액티비티를 경험하고 즐겨왔지만, "미국"하면 떠오르는 "자연"의 맛은 아직 맛보기 전이었다.
우리가 선택한 곳은 뉴욕주의 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주립공원인 베어 마운틴 (Bear Mountain) 주립공원이다. 11월 첫째 주 기준 은행과 단풍이 만개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모두 다 한마음이 되어 가을 정취를 느끼고자 떠난 나들이였다. 두 대의 봉고차를 대여해서 연구실 건물 앞 오전 9시에 집합하여 떠난 여정이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굉장히 복잡하고 시간도 오래 걸리지만 차를 타고 가면 시원시원하게 뚫려있는 고속도로 덕분에 한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도착하여 Tomkins Cove (톰킨스 만) 근처에 주차를 마치고 곧바로 등산을 시작했다. 베어 마운틴까지 가는 길에는 톰킨스 만뿐만 아니라 Hessian Lake라는 호수도 구경할 수 있었는데 가을 산을 배경으로 한 호수의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 (물론 당일 바람이 너무 심하게 불어서 제대로 눈을 뜨고 구경하기는 어려웠지만 말이다.)
그렇게 등산을 시작했는데 구글 검색 결과를 바탕으로는 "보통 난이도"에서 "다소 힘든 수준”이라던 베어 마운틴 등산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느껴졌다. 초반이라 그랬을 수도 있지만 더 높이 올라간다고 힘들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들었는데 워낙 바위로 만들어진 등산로도 잘 가꾸어져 있고, 경사도 그리 가파르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다. 가족을 데려온 교수님과 포닥 친구들도 있어서 약 스무 명 정도가 함께 등산을 이어갔는데 나는 이 모든 사람들을 이끌 만큼 빠른 속도와 강인함으로 등산을 이어갔다. 지금까지 "체력"으로 칭찬을 받거나 이름을 알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굉장히 낯선 상황이었다. 게다가 중간에 쉬어갈 때마다 연구실 대학원생들이 "평소에 운동 열심히 하냐"는 질문을 던졌는데 나보다 족히 5-6살은 어린 친구들이 힘들어하며 질문하는 모습이 재밌게 느껴졌다. "운동"이라고는 일주일에 한두 번 요가 수련이 전부인, 이제 제대로 삼십 대를 진입한 포닥인 내가! 체력이 좋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다니 말이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한국은 지형의 70%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은 다 산을 잘 탄다고 말이다. 괜한 애국심과 뿌듯함이 스멀스멀 차오르는 순간이었다.
등산 내내 계속해서 멋진 풍경들이 펼쳐졌다. 바위 위로 떨어져 있는 단풍잎의 합창도, 새롭게 물들고 있는 파스텔톤의 나뭇잎 들고 모두 규모가 뛰어난 모습들이었다. 그리고 서로를 위해 간식을 조금씩 챙겨 온 연구실 친구들 덕분에 중간 지점에서 스니커즈바와 귤, 그리고 옥수수 등을 먹었는데 개인적으로 찐 옥수수가 가장 맛이 좋았다.
그리고 스스로도 꽤나 놀랐던 점은 문득 한국이 그리워졌다는 생각이다.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던 감정이었다. 워낙 화려하고, 복잡한,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서 정신없는 도심 속에서는 (다소 죄책감이 드는 발언일 수는 있겠으나) 고향을 그리워할 일은 거의 없었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물론 한국에 있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리운 순간은 많았지만, 한국 그 자체가 그리운 적은 아직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베어 마운틴 정상에 서서 풍경을 바라보니 문득 서울의 인왕산, 그리고 대전의 계룡산이 그리워졌다. 그리고 혼자서만 생각했다. 한국의 정서가 가득 담긴 그 산길들이 훨씬 더 멋지다고 말이다. 갑자기 애국심이 폭발한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등산 중 먹은 옥수수는 한국의 초당 옥수수를 떠오르게 했고, 산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은 가을철 계룡산으로 등산을 데려갔던 학부생 시적 학과 행사가 생각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 추워도 하산 후 먹는 닭볶음탕과 도토리묵, 그리고 해물파전과 막걸리가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신기하게도 뜨끈한 한국 음식이 그리운 데서 멈추지 않고 그날 연구실 점심 회식 메뉴는 바로 BCD Tofu House, 즉 북창동 순두부찌개 집이었다. 내가 한국인이어서 배려해 준 것은 아니었고, 실제로 등산 후 점심 메뉴를 정하는 투표를 진행했었는데 내가 제안하기도 전에 외국인 친구들이 먼저 투표 항목에 올려서 민주주의적 과정을 통해 선택받은 메뉴였다. 아시아권 친구들은 익숙하게 주문을 시작했고, 추가로 나온 날달걀까지 야무지게 까서 뜨거운 뚝배기 국물에 넣어먹었지만 그 외 외국인 친구들은 약간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어떤 "단백질 메뉴"가 맛있는지, 너무 달달한 소스보다는 조금 더 매콤한 불고기를 원한다든지, 한국 음식은 반찬부터 메인까지 먹는 순서가 따로 있는지 계속해서 질문했다. 모처럼 모국어 실력을 발휘할 기회이기도 했고, 한인 커뮤니티가 활발한 뉴저지 Fort Lee에 있는 식당이다 보니 한국어로 직접 메뉴 선정을 도왔다. 그리고 테이블마다 등산을 기념하기 위한 사이드 메뉴인 파전을 주문해 주었고, 매콤한 떡볶이가 궁금했다는 대학원생 친구를 위해 떡볶이를 따로 주문해 주었다.
"컨크리트 정글"이라는 별명을 가진 뉴욕에서 지내면서 "자연"을 즐길 기회가 있으려나 싶었는데 연구실 나들이 덕분에 그 풍경을 살짝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차를 타고 조금만 동네를 벗어나면 저 멀리서 보이는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을 제외하고는 이곳이 뉴욕인가 싶은 의구심을 품게 하는 시간이었다. 어찌 보면 높은 건물 없이 자연에 둘러싸여 있고, 일상생활을 위해서는 반드시 운전을 해야 하는 업스테이트 뉴욕의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미국의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예상치 않게 베어 마운틴에서, 그리고 뉴저지로 돌아와 한국 음식을 먹으며 오래간만에 한국을 그리워할 시간을 갖게 되었는데 머지않은 미래에 한국의 정서를 잔뜩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물론 그전에는 뉴욕에서의 추수감사절과 새하얗게 변할 도심 속 블링블링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먼저 즐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