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 책
“여행을 떠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습관의 마비작용에서 벗어나리라.”
술자리가 거나해지면 내게 눈짓을 하는 친구들이 있다. 한번 읊어 달라고. 그러면 마지못해 하며 일어나 그 긴 시를 연극조로 읊곤 한다. 바로 헤르만 헤세의 ‘단계’라는 시, 그의 마지막 대작이며 노벨문학상을 가져다준 이 책에 나오는 시다.
젊은 시절 누구나 접했을 ‘데미안’의 헤세. 그를 접하고 나서 목마르듯이 이어나간 ‘차륜밑에서’, ‘크눌프‘,’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당시 논리학자이며 수학자인 버트런트 러셀이나 과학철학의 대가인 라이엔바흐에 푹 빠져 있던 시절, 나를 이끌어 경계가 없는 걸침이라는 호를 짓게 만들고 지구라는 행성의 오지를 떠도는 여행광으로 만들어 놓은 장본인이다.
그는 딱딱하고 규정된 이성에만 치우치는 것을 경계하고 언제나 자유로운 시나 음악, 미술등의 예술에의 관심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보이는 논리만을 우선으로 하는 서양적 시각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서로의 세계에 경계가 없는 동양의 노장자 사상과 명상이란 부문을 접목시킨 정원사이다. 앉아서 머릿속으로 사유만 하는 정신집단보다 실제 현실에서 행동으로 참여할 것을 역설한다. 그는 질문한다. 밑에서 불이 났는데 위층에 앉아 사색만 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하고. 결국 그는 카스탈리엔이라는 거대한 정신집단의 책임자 위치를 팽개치고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제자 티토의 가정교사를 자임하여 시골호수가로 간다. 습관이 되어가는 스스로를 탈피하여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자 했던 용기 있는 행동이다. 그의 시 ’ 단계‘의 첫 구절이다.
“모든 꽃이 시들 듯이 청춘이 나이에 굴하듯이 일생의 모든 시기와 지혜와 덕망도 그때그때 꽃이 피는 것이며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는 것이다. 생의 외침을 들을 때마다 마음은 용감히 서러워하지 않고 새로이 다른 속박으로 들어가듯이 이별과 재출발의 각오를 해야 한다. 대개 무슨 일이나 처음에는 이상한 힘이 깃들어있다. 그것이 우리를 지키고 도움을 주는 것이다.”
특히 뒤에 있는 구절은 젊은 시절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집안의 권유로 들어간 전공에 흥미를 잃어갈 즈음, 내가 하고 싶은 분야로 변화를 꾀할 수 있을까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이별과 재출발을 두려워하지 말라, 무슨 일이나 처음에는 이상한 힘이 깃들어 있고 지켜준다는 문구, 그것은 실로 커다란 격려이자 응원이었다. 나중에 다른 직업이나 취미를 시작할 때도 늘 주문 같은 글귀였다.
에리히프롬의 ‘자유로터의 도피’에서도 그렇다. 근대사회 들어 봉건제와 기존의 종교가 쇠하고 자본주의가 몰려오면서 사람들의 많은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자유를 소유해보지 않았기에 두려워했다. 다시 기존의 조직이나 사람에게 예속되어 살아가는 편이 한결 편하다. 여기서 프롬은 자발성을 강조한다.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과감히 해 나가야 한다고. 그래야 자유가 무서워 나치의 깃발 아래 들어가려는 욕구를 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찾아가는 출발점엔 언제나 이상한 힘이 깃들어 있다는 헤세의 제언은 젊은이에게 주는 구원의 종소리였다.
술자리가 익어가며 내가 읊는 시구도 힘이 생겨 사람들의 귀를 끌어들인다.
“우주의 정신은 우리를 구속하려 하지 않고 우리를 한 단씩 높여주고 넓혀주려고 한다. 어디서나 고향에 대해서와 같은 집착을 느껴서는 안 된다.”
마치 사랑에 대한 경고문 같이 들리기도 하는 구절. 서로 자유롭게 놓아두고 인정하는 것, 늘 새로운 여행을 떠나는 설렘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 사랑 아닐까. 서로의 습관을 고집하고 이기적 태도에 마비되어 있는 뉴스가 번지는 하루. 헤세의 이 책 ‘유리알 유희’가 그리워지는 시간이다.
오늘은 어디로 여행을 떠나가볼거나. 어느 영화 속으로, 어떤 책 속으로, 누구의 눈길 속으로...
그전에 우선 내 마비된 생각부터 풀어야겠다. 자, 하나, 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