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 영화
“어느 날 아침 눈을 떠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더는 바랄 게 없다고요.”
영화 ‘조블랙의 사랑’의 한 장면이다. 떠나야 할 것을 아는 주인공 빌이 자신의 생일파티에 모인 사람들에게 전하는 말. 과연 그렇게 떠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내가 아끼는 영화 중에 하나가 ‘원더풀라이프’이다. 평론가 이동진도 자신의 영화라고 하는 걸 보면 나와 통하는 면이 있는 듯싶다. 누구라도 살면서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하는 아름다운 장면이 있을 것이라고 전제를 한 고레에다 히로가즈 감독. 영화에서는 방금 죽은 사람들에게 살면서 멋지고 행복했던 그 순간을 영화로 재현하여 만들어준다. 그래서 상영회가 시작되고 그 영화에 마음이 동화되는 순간에 저승으로 가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그 행복한 순간이 영원히 반복해서 기억되도록 해 주는 것이다. 인간적인 저승사자들이라 할 수 있다. 영화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등장한다. 쉬지 않고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이야기하는 친구도 있지만 딱히 생각나는 기억이 없다는 친구부터 아주 사소한 순간을 이야기하는 사람까지. 한 친구는 눈밭에서 놀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 이유가 차가워서가 아니라 뭔가 고요해서, 소리로 그 순간을 기억했다. 또 다른 친구는 달리는 버스를 겨우 잡아타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얼굴에 맞는 순간, 그 촉각을 기억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기억도 나지 않고 고르지도 못해서 자기가 살았던 인생을 녹화한 영상을 며칠씩이나 뒤져보기도 한다.
어찌 보면 우리의 기억은 착각이자 엉터리가 많다. 예를 들어, 한 시간 동안 LP판으로 음악감상을 잘해놓고도 마지막에 판에서 지직대는 소음을 들었다고 하자. 음악감상이 어땠느냐고 물으면 사람들은 마지막의 한차례 소음을 크게 기억하면서 감상이 별로였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 많은 시간을 즐겁게 감상해 놓고서도 말이다. 강한 자극만 기억하기 쉽다는 노벨경제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카너먼의 연구한 내용이다.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을 기억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 장시간 비행기 여행을 하면서 우연히 박하경 여행기라는 웹드라마를 보았다. 답답한 일상을 벗어나 하루만이라도 숨을 쉬고자 무작정 떠나는 여행 스토리이다. 마치 영화 리틀포레스트를 보듯 잔잔한 내용으로 각본이나 구성이 짜임새 있었다. 그러나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영화, 천만영화나 할리우드영화에 익숙해진 일반인에게는 상대적으로 일상처럼 무료해 보일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 말했던가. 영화란 일상에서 지루한 부분을 덜어낸 부분이라고. 일상에서 벗어나려고 영화관을 찾는 데 거기에 또 반복되는 일상의 스토리가 전개된다면 과연 관심을 끌 것인가. 그러나 고레에다 감독은 일상적인 삶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일 수 있다.
많은 타임루프영화들도 봐도 그렇다. 매일이 반복되는 ‘사랑의 블랙홀’, 사랑을 위해 시간을 되돌리는 ‘어바웃 타임’, 그리고 ‘시간여행자의 아내’나 ‘이프온리’ 등에서도 마찬가지다. 대단한 삶이나 순간을 찾으려는 게 아니다. 그저 특별하지도 않고 무료하지만 따뜻한 느낌이 있는 일상, 그것을 찾아 시간을 바꾸고 장소를 바꾸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몸을 바꾸는 영화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천만배우에서 매니저로 바뀌는 영화 ‘스위치’나 늙음에서 젊음으로 바뀌는 ‘수상한 그녀’등.
알고 보면 소중한 일상을 우리는 그냥 스친다. 바쁘다는 핑계로 나와 가깝다는 이유로, 돈이 안된다는 논리로. 어느 시인의 글귀가 떠오는다. ‘내려올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고릴라 효과라는 심리측정 결과가 생각난다. 공놀이하는 영상을 보여주면서 두 사람이 서로 몇 번이나 패스를 하는가를 세어보라고 했다. 그러면서 영상 속에는 두 사람 앞을 가로질러 고릴라가 지나가게 했다. 영상이 끝난 후 고릴라를 보았냐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못 보았다고 했다. 패스라는 과제에 몰두한 나머지 그렇게 튈만한 고릴라가 지나갔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우리 생과 닮았다. 돈, 권력, 지위란 것에 빠져 사느라 젊음과 행복이 지나가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 아니겠는가.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 두 가지라 했다. 하나는 그저 바쁘게 지나가는 패싱(passing)이고, 다른 하나는 순간을 제대로 살아가는 리빙(living). 어느 삶을 살지는 우리가 판단할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시간이 흐른 후에야 각성하게 된다는 데 있다.
자, 과연 원더풀라이프에서처럼 내 삶 중에 딱 한 가지 순간을 끄집어내라 하면 어떤 장면을 내놓을 것인가. 패싱 했던 시간 중에서 나올 수 있을까.
이제부터라도 우리의 삶(life)을 만든 어원인 리빙(living)의 순간을 제대로 살아야겠다. 순간을 사랑해야겠다. 반복되는 일상을 어루만져 줘야겠다. 어제 떠난 사람이 놓친 오늘이란 평범한 일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