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입자이다

문제의 글쓰기

by 걸침

영화 원더풀라이프의 한 장면이다.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을 찾아보라는 말에 한 남자가 대답한다. 젊은 시절, 놓칠 뻔했던 버스를 겨우 잡아타서 헐떡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기사 뒷자리에 앉았을 때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땀이 송송한 뺨에 스칠 때의 그 상쾌한 촉각이었다고.


던져진 질문의 크기에 비해 얼마나 소소한 답변인가. 또 하나의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다. 거기에는 기쁨, 슬픔 등을 포함한 장기기억들이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거대한 지하창고에 마치 연탄재 버려지듯이 널브러져 있는 수없는 잊힌 기억들. 난 그들을 보며 울컥했다. 몇몇 주요 기억들만 대접을 받고 나머지 허름한 기억들은 내팽개쳐지는 우리의 삶. 과연 소소한 기억들은 설 위치가 없는 것인가.


그러한 질문을 하고 있던 차에 내 머리를 망치로 친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최초의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 이 양반의 저서 ‘생각에 관한 생각’에 따르면 인간의 기억은 시간의 길이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 시간 동안 일어났던 가장 강한 기억과 가장 약한 기억의 평균으로 그 시간의 가치를 평가한다는 것이다. 아픔도 불행도 행복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즉 강도의 평균이 높은 것만 기억하는 착오를 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 시간 내 각각의 순간에서는 셀 수 없는 행복감을 느꼈음에도 말이다. 이른바 주목착각이다. 최근기억이나 강도가 높은 것에 주목을 한다는 말이다. 인사이드 아웃의 저 버려진 소소한 기억들도 당시에는 행복하고 소중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다만 강도가 높은 기억에 밀려서 기억회상 순위에서 밀려나 있을 뿐.


오키나와 여행을 하면서 에어비엔비에 묵은 적이 있다. 음악을 하는 젊은 주인이 마당에 불을 피워놓고 세 살 된 어린아이에게 기타를 쳐주고 있었다. 저 아이가 나중에 기억이나 하겠냐고 물었다. 주인의 대답에 놀랐다. “저 아이는 기억을 못 할지라도 기억의 서랍에는 들어 있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족하지요.”


현대물리학에서 빛은 파동이자 입자라고 한다. 단, 평소에는 파동이었다가 관찰자가 나타나 보기 시작하면 순간적으로 입자가 된다는 것이다. 사랑도 그런 것 아닐까. 누군가 나에 대한 관심을 갖은 순간 흩어졌던 내 모습은 정색을 하며 달라질 것이다.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무심코 파동처럼 흐르던 반복적 하루를 어느 순간 유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그 순간이 생명을 얻고 새롭게 피어나는 것 아니겠는가. 일기가 그렇고 글쓰기가 그런 것 아닐까. 내가 책상에 앉는 이유일 것이다. 흐르는 강물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번뜩하며 쳐다보면 반짝이는 윤슬 하나를 건지게 되는. 그렇게 다이아몬드를 채굴하는 작업일 것이다.


오늘도 책상에 앉는다. 노트북을 켜기 전에 생각이 흘러 다니도록 연필로 그리거나 낙서를 한다. 이 단어에서 저 문장으로 글자들이 출렁댄다. 그러다가 낚싯줄에 걸린 찌가 쑥 하고 까만 글물속으로 빠져 들 때 날래 잡아채서 노트북으로 건지기만 하면 된다. 단 낚시의 시간은 쪼이는 맛이 있어야 한다. 마감이 있어야 짜릿하다. 돌아갈 시간이 있어야 집중이 된다. 나아가 훌륭한 낚시꾼은 고기의 입장에서 생각한다고 했다. 내가 어디쯤 있어야 아늑할까. 어떤 미끼가 맛있을까. 고기는 크지 않아도 좋다. 조그만 놈이 귀하고 맛있을 때가 있다. 오늘도 난 낚여 올려질 고기를 기다리며 집어등 같은 스탠드를 켠다. 마냥 흘러가는 일상에서 소소한 입자를 콕 집어 건질 시간이다.

이크! 하나 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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