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내 보리!
-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의 ‘나’/ 희곡
무대에 조명이 비치면 아버지, 형을 비롯한 우리 가족과 일꾼들 그리고 이웃까지 모여 한 줄로 서서 보리밟기를 시작한다. 앞에서 선소리꾼이 선창을 하면 일렬로 선 사람들이 후렴구를 외친다.
소리꾼: 엄동설한 다 지나고
다 같이: 에헤, 어어허야
소리꾼: 춘삼월 호시절에
다 같이: 에헤, 어어허야
소리꾼: 우수 경칩이 되었구나
소리꾼: 에헤, 어어허야
무대 조명 바뀌고 오뉴월 계절이 되면 사람들은 보리타작을 시작한다.
소리꾼: 이 보리가 웬 보린고
다 같이: 옹헤야
소리꾼: 진땀 흘려지은 거라
다 같이: 옹헤야
소리꾼: 중놈 보린가, 이것 봐라
다 같이: 옹헤야
소리꾼: 양반 보린가, 심도 많다
다 같이: 옹헤야
이때 어머니와 큰형수, 누나들이 참을 이고 나온다
어머니: 자, 다들, 막걸리 한잔하고 하세요.
소리꾼과 사람들이 반가운 듯이 새참상으로 몰려들어 막걸리 한 사발씩 마신다. 이들을 보는 어머니와 누나들 흐뭇한 표정이다. 이제 저 많은 식구들의 보릿고개를 넘는 것이다.
무대 바뀌고 집안 마당. 서울로 향하는 형님과 어머니가 길을 서두른다. 둘째 형은 나와 아홉 살 차이로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다. 어머니는 이번에 막내인 나도 서울에 올려 형과 함께 지내며 초등학교를 다니게 할 생각이다.
형: 어머니 서두르세요. 기차 놓쳐요.
어머니: 알았다. 이제 첨 서울 올라가는 네 동생이나 잘 챙겨라.
형: 야. 빨리 와. 꾸물거리지 말고.
나: (별로 가고 싶지 않다는 표정으로 늑장을 부린다)
형: 아. 뭐 해. 빨랑 나서지 않고.
나: (대답 없이 천천히 다가간다)
어머니: 저 보릿자루 잘 간수해라. 너희들 서울 올라가 먹을 식량이니.
형: 예. 알았어요.
일꾼 두세 명이 보릿자루 네 다섯 덩어리를 등에 메고 나서고 형은 가방을 메고 내 손을 벌컥 움켜잡고 대문을 나선다. 어머니는 이것저것 잔뜩 든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서둘러 따라나선다.
무대는 서울의 성동역. 역에 도착한 가족들이 기차에 내려 대합실까지 짐을 운반하려 한다. 보릿자루 큰 것 한 개와 중간 것 두 개 그리고 작은 것 몇 개, 어머니 보따리 등 한살림이다. 마침 앞집의 당숙 어른이 동행을 하게 되니 조금 마음은 놓인다.
어머니: 이 큰 것을 내가 머리에 이마.
형: 아이고 어머니. 놔두세요. 그건 나중에 하고. 저 작은 것부터 나르세요.
어머니: 어쨌든, 복잡한 대합실엔 나른 짐을 누가 봐야 할 것 아니냐.
형: 어. 그렇네...... (잠깐 생각을 하더니) 아. 대합실에는 당숙 어른이 좀 봐주시면 되겠네요.
당숙: 그래. 그러지.
형: 그리고 여기는 잠깐 얘한테 맡기지요. 여긴 복잡하지도 않으니.
어머니: 얘라니. 얘보고?
형: 예. 그래 놓고 어머니하고 저하고 부지런히 옮기면 돼요. 멀지고 않은데요 뭐. 자 어서요.
어머니: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그게.. 그래두..
형: 아이. 괜찮아요. 둘이서 얼른 뛰어서 왔다 갔다 하면 돼요.
어머니: 쯧. 어쩔 수 없구나. 그래 그럼 난 이거 먼저 옮긴다.
형: 너, 여기 꼼짝 말구 서있어. 이거 누가 가져가나 잘 보구.
나: 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다)
처음으로 서울이라는 데를 올라온 7살인 나는 주변부터 생소하다. 형이 명령조로 다그치고 자루 두 개를 짊어지고 벌써 저만치 사라지니 그저 멍하니 눈만 껌벅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이)
그때 한 남자가 다가온다.
사내: 어이구. 우리 꼬마 착하게 생겼네. 짐이 많지?
나: (의아한 눈초리로).......?
사내: 어머니 짐 나르고 계시지?
나: 예.
사내: 어머니가 짐이 많다고 좀 들어다 달라셔서 왔다.
나: 예? (조심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한 표정으로)
사내: 그래. 짐이 이렇게나 많으니 어머니가 힘드시겠지? 어떤 거부터 날라 드릴까.....
나: (속으로 너무나 고마워하면서 큰 자루를 가리킨다) 저.. 저거요.
사내: 어? 그래. 그게 제일 무겁겠구나. 그럼 이거부터 날라 드릴 테니 나머지 잘 보고 있어라.
나: 예.(꾸벅 인사를 하며 고맙다는 표시를 한다)
사내는 얼른 큰 보릿자루를 들쳐 업더니 빠른 걸음으로 대합실 쪽으로 발을 옮긴다.
나: 어?
그런데 이상하다. 대합실 쪽으로 향하던 보릿자루가 얼핏 보니 기찻길을 가로질러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때 어머니가 거의 뛰다시피 하며 나타났다.
어머니: 엉? 여깄던 큰 거는?
나:?... 저기 저 사람이 들어다 준다 해서.... 엄마가 부탁했다고....(얼굴이 붉어지며 말을 잇지 못하며 사내가 가고 있는 쪽을 가리킨다)
어머니: 저 사람이? 누군데? 대체 누가 부탁했다는 거야. 아이고. 저놈 잡아라. 저 놈.......
자루를 짊어진 사내는 이미 오른쪽 선로를 몇 개나 넘어 철조망 사이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그때 형이 돌아와 상황을 보더니 사내 뒤를 좇는다.
어머니: 아이고. 저놈 잡아라.
형이 냅다 좇아가 보았으나 사내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한참 있다 돌아온 형, 내 뺨을 한 대 후려갈기는 시늉을 한다.
형: 야. 너 뭐 하고 있었냐. 눈은 왜 달고 다녀.
나:....?!(아무 말 못 하고 고개를 떨구고 있다. 맞기 직전의 뺨이 이렇게도 아릴 수 있을까. 차라리 크게 한방 때려 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어머니: 왜 애는 잡고 그래. 걔가 무슨 죄가 있다고. 걔를 믿고 맡긴 우리가 잘못이지. 아이고. 저놈.... 저놈 잡아라. 그게 어떤 보린데. 한 겨울 엄동설한 지내 밟아주고 뽑아주고 털어주고 고르고 골라서 채운 잘맹인데... 아이구 저놈 잡아라. 저 옘병을 할 놈.......
어느덧 성인이 된 나.
밝은 조명. 길을 걷고 있다. 어느 가게서인지 진성의 보릿고개 노래가 흘러나온다.
노래: 아야. 배 꺼질라. 뛰지 말아라.....
나, 객석 쪽으로 걸어 나오며 독백을 한다.
그래. 그랬지. 그 사건 이후 집안 내에서 내 별명은 보릿자루가 되었지.
보릿자루 잃어버린 바보 같은 놈. 멍청한 놈. 나를 놀릴 땐 으레 그 이야기가 나왔지.
커가면서 내가 그 말에 민감하다는 것을 알고 집안사람들의 대화에서는 보리라는 말이 나오지 않게 조심들 하였지. 난 서울이라는 곳을 그렇게 시작했지. 나중에 내가 당한 사건이 ‘네다바이’라는 용어로 쓰인다는 것을 알았지.
보리가 원래 그렇지. 차가운 눈 속에서도 푸른 보리가 자라듯이 추운 겨울을 거뜬히 이겨내야 결실을 맺는 곡식. 난 일찌감치 그런 훈련을 했던 거야. 그 뒤에 서울살이가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많은 시간을 넘기게 해 준 것은 바로 그 사건이자 경험이었지. 그 형님의 쌉싸름한 눈 맛이, 뺨맛이 바로 도시의 맛 아니겠어? 그래서 내가 맥주를 좋아하나 봐. 쌉싸름한 맛의 보리 내음. 캬 좋다.
그렇지만 난 보리굴비나 보리차, 보리새우 등 보리 자가 들어가는 것은 별로 반기지 않아. 보리암도 안 가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