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매 득도 에세이 #22
요즘 여기저기서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자주 보인다.
인터넷에서도, TV에서도, 서점에서도, 자존감이란 단어가 자꾸 눈에 띄는 걸 보니 아마도 자존감이 트렌드인 모양이다. 자존감이라... 단어는 많이 들어봤는데 정확한 뜻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아는 척이라도 할 요량으로 뜻을 찾아보았다. 자존감은 '자아존중감'의 줄임말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만족하고 있는지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란다. 자존감이 낮을수록 열등감을 쉽게 느끼며 자괴감에 빠지기 쉽다고 하니, 이래서 요즘 자존감이 인기구나 싶다. 무한경쟁사회. 취업난. 금수저. 외모지상주의. SNS. 타인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며 상처받기 쉬운 세상이다. 있던 자존감마저 깎이고 깎여, 그 어느 때보다 더 자존감 회복이 절실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그렇다면 나의 자존감은 괜찮은 걸까? 갑자기 궁금해진 관계로 쉽게 자신의 자존감 수준을 알 수 있다는 '마셜 로젠버그' 자존감 테스트를 해 보았다.
총 10가지 문항에 점수를 매기면 되는 테스트인데 내 자존감 수준은 '보통'이었다. 오오 그래도 보통은 되는구나 하는 안도감과 조금 더 높을 줄 알았는데 하는 아쉬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이게 뭐라고 높은 점수를 받길 원하다니 나도 참. 내심 내 자존감이 꽤 높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근데 어차피 자존감이라는 게 객관적 평가가 아니고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한 포인트이므로 로젠버그 씨가 나보고 보통입니다라고 얘기해도 난 '아닌데? 그거보단 높은데?'라고 생각해버리는 사람이라 테스트 결과에 별 감흥은 없다. 그 말은 내 자존감 수준을 '높음'까지 올리려고 노력할 생각이 없다는 얘기다. 휴, 하마터면 노력할 뻔했다.
유튜브에서 법륜스님의 강연 영상을 보다가 자존감에 대한 신선한 얘기를 들었다.
스님의 말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평가할 때 보통 좋게 평가한다고 한다. 그리고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좋게 평가하는 것을 넘어 자신을 과대평가한다고 한다. 응?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낮게 평가하는 거 아닌가? 정반대로 과대평가라니 이게 무슨 소리지? 일단 계속 들어보자.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자신을 과대평가하여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환상을 가지고 있는데, 이 환상의 모습과 현실의 모습 사이의 괴리감이 커질수록 괴로움이 커진다는 얘기다. 자신이 만든 환상 속의 나는 대단한 사람인데 현실의 나는 초라하고 별 볼 일 없고 인정도 못 받으니 현실의 내 모습을 점점 미워하게 되고 못마땅하여 보기 싫어진단다. 너무 보기 싫어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일어난다. 다람쥐는 자기가 못생겼다거나 혹은 다른 다람쥐보다 도토리를 못 모은다고 자살하진 않는다.(법륜스님은 다람쥐 비유를 엄청 좋아해서 자주 써먹는다) 동물들은 자신에 대한 환상이 없고 있는 그대로 살기 때문이다. 오직 인간만이 현재 자신의 모습을 비관하여 자살을 한다. 이럴 때, 환상의 모습에 현재의 모습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한다. 환상을 버리고 현재의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해야 한단다. 난 그냥 이 정도인 사람이구나. 그런데 이것도 나쁘지 않네, 하고 말이다.
사람에 따라선 공감하지 못할 얘기일 수도 있지만 나는 감탄을 하며 공감하고 공감했다. 음, 역시 진짜로 수행하는 사람은 다르구나. 나 같은 야매가 어찌해 볼 수 없는 경지인 것이다.
고백하자면 내가 바로 스스로를 과대평가한 대표적인 사람이다. 나는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앞으로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더 의미 있고 생산적인 일을 할 사람이며 남들과 똑같이 아등바등 살 사람이 아니라고. 심지어 나만은 왠지 늙지도 죽지도 않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도 했으니까. 그런데 현실은 그러지 못했다. 내가 하는 일들은 별 의미 없고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한 일이었다. 그마저 돈도 남들처럼 많이 못 버니 불만이 쌓였다. 나 이런 일 할 사람이 아닌데. 매일매일 힘들게 사는데도 환상 속 내 모습에 한걸음도 다가서지 못하는 기분이 들어 괴롭고 조급했으며 내 모습이 늘 못마땅했다. 급기야 뭔가 잘못됐다며 집 안에만 틀어박혀 3년 동안 도(?)를 닦았으니 나는 중증 과대평가 환자가 분명하다. 3년 간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은 뭘까'나 '내가 존재하는 이유', '인간은 왜 사는가'같은 공허한 질문을 수도 없이 반복한 끝에 나는 환상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내가 존재하는 건 그냥 태어났기 때문이며 나만의 특별한 이유는 없다는 것. 내가 그리 대단한 인간은 아니고 그냥 평범한 혹은 조금 못난 존재라는 것. 그동안 내가 가진 것에 비해 욕심을 부렸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나는 그때 내가 별 볼 일 없는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했기에 내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진 것으로 생각했는데 실은 반대로 그때부터 자존감이 높아진 것이었나 보다. 실제로 그 이후 나는 조금씩 긍정적인 사람이 되어갔다. 작은 일에도 감사할 줄 알고 일이나 삶에서 큰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살면서 처음으로 행복하다는 기분을 느꼈던 것도 그 무렵이지 싶다. 뭐지? 상황이 크게 나아진 것도 없는데 이렇게 행복해해도 되는 건가? 나는 처음 느껴보는 낯선 감정에 어쩔 줄 몰라했다.
나 자신을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때가 자존감이 가장 낮았고, 나 자신이 별거 아니라고 인정하고 나서 자존감이 지금의 '보통' 수준으로 올라온 것이니 인생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아까는 부인했지만 생각해보면 내 자존감은 딱 보통 수준이 맞는 것 같다. 나는 현재 내 모습에 대체적으로 만족하지만 완벽하게 만족하는 것은 아니니까. 내 마음속엔 내 현실이 좀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직도 있다. 내가 만든 환상의 모습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예전처럼 괴리감이 클 정도의 모습은 아니라 괜찮다. 대단한 모습의 나를 바라는 것도 아니라서 이 정도 욕심은 가지고 살고 싶다. 높은 자존감이면 좋겠지만 이처럼 보통 수준의 자존감만 되어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나는 내 보통의 자존감에 만족한다. 고로 여전히 자존감을 높이려 노력할 생각은 없다.
낮은 자존감이 문제가 된다면, 노력해서 높일 수 있는 것이라면 무조건 높여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노력이 또 다른 스트레스가 되지 않길 바란다. 그리고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이 성공한다고 하니 성공하고 싶어서 자존감을 높이는 노력이라면 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런 식으론 절대 높아지지 않을 것이다. 자존감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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