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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이랑 Aug 28. 2021

초록을 찾아서

아이들과 집 앞 도서관을 찾았다. 4층 어린이 자료실에서 책을 몇 권 빌리고는 자리 잡고 앉아 첫째는 그림일기를 쓰고 둘째는 블록을 쌓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보호자용으로 비치된 잡지를 집어 들었다. 주로 화장품 소개로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 잡지를 넘기며 별거 없네 하다가 뒷부분에서 '풀멍'이라는 단어가 나의 시선을 확 잡아당겼다. '불멍', '물멍'은 들어봤는데 '풀멍'이라니. 잡지는 경기도에 위치한 풀멍이 가능한 카페 몇 곳을 소개하고 있었고 그중 가보지는 않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곳도 두어 곳 있었다.

동네에도 여기저기 카페가 많지만 동네와 머어어어얼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카페를, 풀멍이 가능하다는 카페를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다 코로나 탓이다.


초록색을 좋아하지 않던 나였다. 좋아하는 색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초록'이라고 답한 경우는 없었고 초록색의 옷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뒤로는 초록색이 들어간 옷은 쳐다도 보지 않던 나였다. 그랬던 내가 삼십 대 언제 즈음부터는 봄의 연둣빛을 좋아하기 시작했고 여름의 짙은 녹음은 더욱 좋아하게 되었으며 초록색이 들어간 원피스를 구입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코로나 시국에 '풀멍'이라는 행위는 그 누구에게도 거부감이 없었기에 그 잡지 아이템 잘 잡았다 싶었다.

 

비자발적으로 집콕을 하는 날들이 길어지다 보니 테라스, 옥상, 마당 있는 집은 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테라스, 옥상, 마당 중 한 가지도 갖추지 못한 집에서 사는 우리는 돈을 내고 풀멍을 하는 시대에 몇 번 동참하게 되었다. 한 번 씩 숨통을 틔고 싶을 때면 우리 네 식구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곳을 찾는 일에 꽤나 공을 들였다. 포털사이트의 여행 섹션이나 SNS의 지역 소개 계정만 봐도 '풀멍'을 할 수 있는 곳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풀이 있고 나무가 있는 곳에 아이들 놀이터나 놀잇감이 있고, 커피까지 있다면 방문해 볼 의사가 충분했다. 그렇게 몇 군데를 찾아다녔지만 가장 좋았던 곳은 굳이 돈을 내지 않고도 풀멍이 가능한 곳이었다. 집에 있는 간식거리를 챙겨 입맛에 맞는 간식을 먹으며 시간제한 없이 마음껏 풀멍을 할 수 있는 곳 말이다. 마스크를 던져 놓을 수는 없지만 마스크를 쓰고서라도 자연을 벗하며 놀았으면 하는 엄마의 마음을 아이들은 알까.


첫째의 여름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고 올여름 수영복 한 번 입어보지 못한 아이들을 데리고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위치한 농장이었다. 2천 평 규모의 농장에서 모래놀이, 물놀이, 만들기 체험 등을 할 수 있고 정부 지침에 따른 입장 가능한 인원보다 훨씬 못 미치는 소수의 인원만 예약제로 운영하고 있어 충분한 거리두기가 가능하다고 소개하고 있었다. 쓰레기는 되가져가는 조건으로 음식물 반입도 가능하고 외할머니 집에 놀러 다녀온 것 같다는 리뷰까지 보고는 개학하기 전에 꼭 한 번 다녀와야겠다고 마음먹은 곳이었다.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예약한 뒤 물놀이, 물총놀이에 필요한 준비물과 보냉 가방에 넣어갈 과일과 음료를 챙겨 놓았다.


다음 날이 되자 일기예보와는 달리 비가 엄청 쏟아지고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먼저 연락을 준 농장주는 취소나 시간 연기를 권유했다. 아이들은 이미 우의를 입고서라도 놀겠다며 들떠있던 터라 취소는 못하고 오후 시간으로 예약을 미루었다. 출발할 시간이 되자 거짓말처럼 파란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들은 신나게 물놀이를 하고 나는 그 옆,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살랑거리는 바람을 느끼며 책을 읽는 상상을 했다. 카운터에서 예약금을 제외한 입장료를 결제하고 출출해하는 아이들을 위해 컵라면을 주문했다. 다 먹은 컵라면을 치우고 농장을 한 바퀴 둘러보는데 뭔가 이상했다. 여기가 이천 평이라고? 저기 들어가지 못하는 곳과 주차장까지 다 합한 면적 아니야? 어두컴컴한 철창 안에 동물들은 눈에 초점이 없네. 오늘은 평일이니 이 정도지 주말이면 거리두기 전혀 안 되겠는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아이들도 공용풀에서 조금 놀더니 춥다며, 재미없다며 자꾸 엄마를 찾는다. 약속한 두 시간이 금세 지나가고 농장주가 시간 연장 여부를 물었지만 거절의 의사를 밝히고는 아이들 옷을 갈아 입히고 나왔다.

거짓말처럼 맑게 갠 하늘과 나의 아이들

기대가 컸던 게 원인이었을까, 아니면 남편의 부재도 한몫했으려나. 입장료가 아까웠지만 맑게 개인 하늘 아래서,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서 잠시 숨통 트인 것으로 만족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둘째는 잠들고 첫째와 이야기를 해보니 다시 갈 일은 없겠구나 싶었다.


아침, 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걸 보니 짙은 녹음은 곧 빨강과 노랑을 곁들인 알록달록한 색으로 변할 모양이다. 다가오는 가을에는 풀멍과 함께 '단풍멍'이 가능한, 돈을 내지 않아 실망할 일도 없는 그런 곳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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