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이 금요일부터 시작이었다.
그리고 나는 명절 일주일 전
금요일에 출발하는 일정이었다.
제일 먼저 챙겼던 건
내 스케줄이 아니라
우리 아이의 스케줄이었다.
사실 이 여행의 발단은
우리 아이가 다니는
사교육 기관들의 방학 때문이었으니까.
7일의 휴가 일정 중에
일주일에 한번 가는 수학학원도
방학이었다.
사실, 수영특강이 사라지는 것도
이 여행의 큰 계기가 되었는데
수학학원의 방학도 지분이 있었다.
일주일에 한번 가는 수학학원을
빠지기가 싫었는데 마침 방학이라니.
깔끔해.
이 휴가를 위해서 영어학원은
총 3번을 빠져야 하는데
10번의 수업 중에
3번을 빠지고
그다음 주에 일본 여행이
계획되어 있으니까
한 번을 더 빠져서
2월에는 총 4번을 빠져야 했다.
78만 원쯤을 내고 6번만 가는 건
어쩐지 조금 아까워서
학원에 여쭤봤더니
50%만 출석을 하면
50%의 학원비를 내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40%만 출석을 하든
60%만 출석을 하든
50%의 학원비를 내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한 번 더 학원을 빠지고,
그러니까 10번 중에 5번만 출석을 하고,
50%의 학원비를 내면
영어 학원비도 아낄 수 있었다.
2월 영어 학원비는 78만 원 대신
39만 원을 결제하고 나오는 날
'이거야말로 화요잔잔바리에
써야 하는 건데
이걸 글로 과연 내가
설명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걸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남편?
그럴 리가.
바로 같이 영어학원을 보냈던
써니맘.
[Ahn Zi] [오후 5:42] 그 와중에 2월에 그래서 해외 가면
[Ahn Zi] [오후 5:43] 영어학원비 반만 내도 되는지 물어볼까 고민하는 내가 우습다..
[Ahn Zi] [오후 5:43]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써니맘] [오후 5:49] 아니 당연한 거 아냐????
[써니맘] [오후 5:49] 저번에 여름에도 우리 반만 등록했잖아
[Ahn Zi] [오후 5:49] 응 그니까
써니맘,
얘가 아니었다면
나의 2022년은
너무나 외로웠겠지.
그리고 우리의 2023년은
너무나 괴로웠겠지.
여하튼 영어학원비
반만 내도 되는지 물어보는 걸
써니맘한테 이야기하고
학원에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8잔 나오는 스타벅스 투고백을
사가지고 가서
2월에 6번을 나올 수 있을 것 같은데
한 번을 더 빠지고
5번을 나오고
학원비를
반만 내도 되겠냐고
여쭤봤더니 돌아오는 말.
"어머님,
이런 거 안 사가지고
오셔도 되는데...
그렇게 해드려야죠"
안 사가지고 가도 되지만
사 가는 마음이 얼마나 기뻤는지
선생님은 모르시죠?
이 또한 학원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 물어볼 수 있었다.
신뢰가 없었다면
(초반에는 조금 없었다)
실례일 수도 있는 일이니까.
이렇게 영어학원 스케줄을 조정하고
논술학원 일정을 봤다.
금요일 저녁 수업이라서
결석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더니
그럼 보강을 잡아주시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 주 화요일에,
유연근무로 일찍 퇴근하는 날에,
논술 보강을 다녀왔다.
신기할 만큼 수월했던 건
일주일 동안 숙제를 하고
수업을 하는데
보강수업이 3일 뒤에 잡혀서
숙제를 할 시간이 있을까 싶었는데
딱 그 주는 숙제가 없는 주간이었다.
이것 또한 논술학원의 시스템을
모르는 사람에게
글로 설명해서 이해시키기는 어렵지만
여하튼 수월한 보강이었다.
내가 영어학원비를 반만 결제하고
논술 보강을 미리 해서
속 시원하다고 이야기했을 때
남편은 과연 이해했을까?
못했을 것 같다.
야구 학원은 일주일에
두 번을 가는데
거의 6번을 빠지게 되어서
야구 감독님께
2월은 쉬겠다고
말씀드리러 갔다.
"아, 쉬면 안 되는데..."
"네, 감독님. 잘 아는데
2월 첫째 주에 방콕을 쭉 가고
명절 끝나면 또 짧게
일본을 다녀오게 되어서
너무 많이 빠지게 될 것 같아서
그냥 2월은 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사실 야구도 꾸역꾸역
일정을 짜내면 3번은 갈 수 있지만
"3번만 결제할게요"라는 말을
내가 먼저 할 수가 없었다.
야구 학원 시스템은 그런 식이 아니다.
그런데 감독님이
3월 초에 리그가 있을 예정이라서
아예 쉬는 건 안된다고 하셔서
갈 수 있는
3개의 날짜를 말씀드렸더니
그럼 3회분만 결제하시고
그 날짜에 꼭 오라고
말씀을 해주셔서
3회분만 결제를 했다.
그리고 방학 특강 수영 수업 외에
정규 수업 일정을 조율해야 했다.
수영 학원에 가서
원래는 일주일에 2번씩 오려고 했고
그래서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갑자기 2월 초에 여행을 가게 되어서
그 주에 빠져야 할 것 같고
그다음 주에도 여행이 있어서
빠지게 되면
2월 정규 수업은 잠시 쉬어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더니
몇 번 나올 수 있냐고
날짜를 말해달라고 하셨다.
그렇게 수영 선생님이랑
같이 달력을 보면서
내 아이폰의 일정을 보면서
확인해 보니
3번은 참석할 수 있을 것 같아서
3번의 날짜를 말씀드렸고
그럼 3회분만 결제하시라고 해서
3회분을 결제했다.
여행비는 지출하지만
사교육비는 빠진 만큼
덜 낼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하지만 나의 기쁨을
100%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이 사교육의 주인공인 우리 애도 아니고
남편도 아니고
써니맘이라는 사실이
어쩐지 웃펐다.
정말 말 그대로 웃펐다.
PEET 기출문제도 아니고
회사의 전략을 논하는 것도 아닌데
이걸 이해해 줄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
이 모든 짓을 직접 해본 경험이 있는,
내 친구 써니맘 밖에 없다는 사실이
웃기면서도 슬펐다.
그렇지만 웃으면서
슬퍼하기만 할 순 없었다.
이제는 내 일정도 돌아봐야 했다.
2024년 목표를 세우면서 팀장님한테
"그럼 2월까지 팀별로,
그리고 담당자 별로,
jira를 생성하겠다"
라고 말씀드렸던 건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데
2월에 하겠다고 했는지
2월 구정전에 하겠다고 했는지
2월 말에 하겠다고 했는지
기억이 안 났다.
만약 내가 구정전에 하겠다고 말했다면
나에게 시간이 없었다.
내가 생성해야 하는 jira가
몇 개인지 어림잡을 수조차 없었다.
난 늘 이렇다.
무계획이다.
계획을 세웠어도 무계획이다.
"어? 좀 쎄한데?"
하고 뒤적거리면
"어머,
내일까지 해야 하는 거 맞네?"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쎄하다}는건
개인의 빅데이터이기 때문에
무턱대고 쎄한게 아니라
뭔가 어렴풋하게
나의 뇌 어딘가에
스쳐 지나가면서 남긴 흔적이
그때 즈음이 되면
자신의 존재를 알려주는 느낌이랄까.
하기로 한건 그래도 해야 하는데.
사실은 2022년도에
팀장님이랑 이야기해서
내가 하기로 한 게 있었다.
누군가와 협업해서
같이 하는 업무는 아니었고
굳이 말하자면
나 스스로를 위해서
새로운 기술을 연마하는 task였는데
진짜 하기 싫었고
솔직히 말하면 어려웠다.
꾸역꾸역 개발 반영까지는 했는데
운영서버 세팅하는 부분부터
정말 하기 싫어서 계속 안 했다.
오픈소스니까 찾아서
내가 우리 회사 환경에 맞게
커스터마이징하고
세팅해야 하는데
어려워서 못했다고 말하기에는
대소문자 구분해서 오류 나고
따옴표를 빠뜨려서 에러 나고
환경설정 이해 못 해서
삽질하는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시간이 부족해요?"
"네"
이런 대화를 몇 번 하다가
"그러면 시간을
얼마를 더 주면 할 수 있어요?
시간의 문제가 맞는지
스스로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라는 질문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시간의 문제가 아니네요.
이거 개발까지
한 것만으로도
저는 만족합니다.
운영까지는 포기할게요"
라고 이야기하는데
3달인지 5달이 걸렸다.
말하기까지 오래 걸린 게 아니라
내 상황을 이해하는 데 까지가
너무 오래 걸렸다.
"지금까지 한 게 있는데
포기하기 아깝지 않아요?"
"네, 아깝지 않아요"
아깝지 않았고 너무 속이 시원했다.
그런데 내가 속이 시원하면 뭐 하나.
팀장님은 곤란했겠지.
업무라면 나도 포기하지 않았을 텐데
나의 자기 계발이라고 생각하니까
쉽게 포기가 되었다.
남한테 민폐 끼친 것도 아닌데 뭐.
내가 이일을 완벽하게 했다고
승진 못할 걸 승진 할 일도 아니었고
평가 못받을 걸 잘 받을 일도 아니었다. 그
렇지만 나에게 기대를 한 팀장님은
곤란했으리라.
여하튼 팀장님을
또 곤란하게 만들면 안 되니까
그 뒤에는 100을 할 수 있으면
110 정도 하려고 했는데
2월 명절 전까지 하겠다고
보고해놓고
그 주에 휴가를 냈으니
일정이 일주일 더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퇴근하고도 일하고
쉬는 시간 없이 일했다.
그리고 어떤 날 jira 티켓을
50개를 생성했는데
내가 적은 메모를 발견했다.
{2월 말까지
jira 티켓을 생성해 둘 것}
2월 말까지 하기로 한 일을
2월 1일,
아니 2월 2일까지 했다.
정확하게 2월 2일 오후 12시까지
근무를 하고
오후 1시까지 teams와 slack으로 업무를 더 했다.
공항에 가야 하는
2월 2일 새벽에 일어나서
눈을 깜빡이는데
눈이 너무 아파서
놀라서 거울을 보니
눈에 다래끼가 났다.
그리고 그 전날
대자연의 주기도 돌아왔다.
솔직히 말하면 너무 피곤했다.
그래도 오후 12시까지는 근무이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일하고
중간에 쉬는 시간에 안과를 다녀왔다.
"다래끼 자주 나세요?"
"아니요, 전혀요"
"요즘 피곤하셨나 봐요"
명의였다.
나 피곤한 걸 어떻게 알았지.
그렇게 안과에서
항생제와 안약을 받고
부랴부랴 짐을 싸고
여행 가는 오전까지 수영특강과
줄넘기 특강을 다녀온 아이와
택시를 타고 공항에 갔다.
여름나라이니까 반팔을 입고
가디건을 입고
그 뒤에 자켓을 입고 가기로 했다.
나중에 한국 돌아올 때에는
남편한테 패딩을
가지고 오라고 하면 되니까.
그리고 데이터로밍은
esim으로 하기로 했고
결제하고 거의 바로
메일로 QR코드를 받아서
출발 전 세팅을 해두었다.
공항 가는 택시 안에서
두세 번 갑자기
미친 듯이 기침이 났지만
다행히 금방 괜찮아졌다.
"엄마,
우리가 공항에 도착을 하면
먼저 체크인을 해야 하지?"
"그런 것도 알아?"
"짐가방을 먼저 보낸 다음에
엄마는 태국 돈을 바꾸고 나서
여권을 들고 들어가는 거잖아?"
"어, 그렇지"
"그럼 들어가서 밥을 먹어?"
"어, 라운지에서 밥을 먹지"
"그럼 라운지에서 밥을 먹고
보딩 시간 맞춰서
기다렸다가
비행기를 타면 되겠네"
나 8살 때에는
저런 거 전혀 몰랐는데
우리애는 8살에
참 많은 것을 알고 있구나 싶었다.
체크인하는 것도 알고
라운지를 가서
한 끼를 해결하는 것도 알고
환전이라는 단어마저 알다니.
환전은
신한은행으로 하려고 했는데
우리은행으로 해야 한다고 해서
우리은행 계좌를
부랴부랴 비대면으로 개설을 하고
신한은행에서 우리은행으로
현금을 입금하고
공항에서 pick up 하기로 했다.
18,400바트를 환전했다.
70만 원쯤.
하루에 10만 원 정도 쓴다고 가정하고
만약에 더 많이 쓰는 날이 있다면
카드를 쓰기로 하고
70만 원쯤 환전했다.
미리 체크인을 해두었고
카운터에서
짐가방을 보내고
프레스티지석이라고
패스트트랙하라고 안내받고
라운지 위치를 안내받고 들어갔다.
프레스티지석 라운지가
얼마나 대단할지 너무 기대가 컸는데
내가 모르는
새로운 세계는 아니었다.
내 나이쯤 되면
처음 먹어보는 새로운 맛도 없고
새로 경험하는 새로운 것도
잘 없다는 걸 망각했던 것.
언젠가 와본 것도 같은 느낌의
KAL 라운지에는
먹을 것이 없는 것 같았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내가 제일 야무지게 먹고 있었다.
물론 우리애도.
눈에 다래끼는 붙어있었지만,
엉덩이는 쪼금 찝찝했지만,
너무 피곤했지만,
그래도 공항 가는 길은 역시나
설레였다.
예전에는 3박 4일도,
4박 5일도
짧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었는데
이제는 7박 8일도 너무나 짧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꼼꼼하게 계획해서
치열하게 여행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한 달을 그 도시에서 지내도
시간이 늘 아쉽다.
널브러져 있는 순간,
한국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시간,
처절할 정도로 외로운 찰나,
그 모든 것이 늘 존재했었고
존재해야 했다.
타지에서 철저하게
이방인인 기분,
그 기분이 너무 그립다.
하지만 아이와 갈 때에는
철저하게 이방인일지라도
그 도시에 몇 번은 와본
사람이어야겠지.
어떤 위기 상황이 닥치더라도
애랑 둘이 있으니까
정신 차리고 해결해야 하겠지.
꼭 그럴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발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계산해 보고 가야겠지.
그런데 뭐 또 부딪혀보는 거지,
길은 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