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회

Sydney__시드니

by 해이문

"여기 602호인데요. 너무 추워서요. 히터를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머리 위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털양말 신은 발가락을 서로 비벼가며 잠을 청했지만, 한기는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눈이 빠질 것 같은 두통에 미간이 찌푸려졌고, 추위로 움츠린 몸은 뻣뻣했다. 먼지가 잔뜩 낀 것처럼 목이 아파오니 으슬으슬 몸살기운도 올라오고 있었다.


기온이 40도가 넘는 중동 나라에서 14시간을 날아 13도인 도시에 도착했다. 갑작스러운 큰 일교차도 장거리 비행의 고단함도 감당해 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호텔직원이 가져다준 이동식 히터를 침대 가까이 놓고, 다시 눈을 감았다. 여전히 숨을 쉴 때마다 차가운 공기가 콧속을 파고들었지만, 히터의 따뜻함이 조금씩 몸을 녹여 주었다.


나의 8월 로스터에서 SYD, 시드니를 확인한 건 비행한 지 1년반쯤 지났을 때다. 어엿한 성인이 되어 초등학교 때 좋아하던 첫사랑 남자아이를 만나는 것처럼 기분이 묘했다.


너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어떻게 변했을까. 주말마다 다니던 본다이비치 요가학원은 아직 있을까. 아비는 그 어학원에서 아직 영어를 가르치고 있을까. 내가 살던 작고 조용한 동네와 항상 내가입은 옷이 예쁘다고 인사해 주던 바바라 아줌마가 운영하던 커피숍도 아직 그곳에 있을까.


갑자기 12년 전의 기억들이 온몸을 감싼다.


시드니는 내 생에 첫 외국이었다. 23살이었고, 아마 비행기도 그때 처음 타본 것 같다. 신호등을 건널 때 뚜뚜뚜뚜 하고 들리는 소리, 언제라도 비치로 달려가 온몸에 태닝오일을 잔뜩 바르고 누워 만끽하던 햇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친구들, Chalmers st. 76처럼 스트릿 이름과 번지수만 알면 어디든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주소, 더 이상 부모님께 용돈을 타쓰지 않고 옷가게와 커피숍 파트타이머로 일하며 내가 번 돈을 쓸 수 있는 금전적 자유로움... 모든 것이 새롭고 이국적이며, 신기하고 즐거웠다.


히터의 온기에도 푹 잠들지 못했다. 몸이 부서질 듯 피곤하지만 쉽사리 숙면을 취하긴 어려운 상태다. 일어나 창문 커튼을 젖혔다. 도시는 아직 어둑어둑했고 고층 건물들 사이로 저 멀리 하버 브릿지가 보였다. 순간 하루 중 언제인지 가늠되지 않는다.


저녁인가?

이른 새벽인가?

흐린 날 낮인가?


06:10 am

핸드폰을 보니 꽤 이른 아침이다.

5시간 정도 잤구나...


밤에 비가 내렸는지 땅이 축축했다. 30분 정도 뒤척이다 목도리를 두르고 나왔다. 버스를 타고 전에 살던 동네 랜드윅(Randwick)에 가볼까. 시티에서 30분은 걸릴 텐데... 왔다 갔다, 몇 번 버스를 타야 하고 어디서 내려야 하는지, 오래되어 기억나지 않는 정보들을 검색하고, 살피며 다녀올 여정이, 아쉽지만 지금 컨디션으로는 자신이 없다.


전에 다니던 랭귀지스쿨에 가볼까? 아비는 더 이상 없겠지만 또 누가 알까 있을지. 만약 그녀를 다시 만난다면 너무 반가워 소리를 지를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슴이 조여올만큼 진한 포옹을 나눌 테다. 그런데 이 이른 아침에 어학원이 열려있을 리 없잖아. 아... 그리고 오늘은 일요일이구나. 이것도 안 되겠네.


어머 여기 옥스퍼드 스트릿이잖아. 발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익숙한 거리다. 아비와 일주일에 한 번 만나 영어과외를 받던 곳. 그녀를 생각하고 있으니 우주가 이 방향으로 나를 이끌었나 보다. 글로리아 진스(Gloria Jean's), 우리가 공부하던 커피숍이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따뜻한 마차라테를 주문해 앉았다. 머그잔을 두 손에 쥐고 한 모금, 한 모금 마실 때마다 따뜻한 액체가 목을 지나 몸안 여기저기로 잔잔히 퍼진다. 코에 닿는 파우더리 한 녹차향과 함께 몸에 조금씩 온기가 돌아 목도리를 풀었다.


"나는 지금 스케줄이 여의치 않아서. 괜찮다면 내 동료를 소개해줄게."


평일오전 매일 3시간씩 영어를 배우던 랭귀지 스쿨은, 한 클래스에 나를 포함해 5~6명 정도의 학생이 있었다. 분명 즐겁고 도움이 되는 시간이었지만, 뭔가 부족했다. 당시 우리 클래스를 가르치고 있던 안젤라에게 개인 영어과외가 가능한지 물었고, 스케줄이 가능하지 않았던 그녀가 소개해준 동료가 아비였다.


영국에서 온 아비(Abby)는, 나보다 대여섯 살 정도 많았다. 핸드폰도 없고 이메일 주소도 사용하지 않는, 신기술을 거부하고 철저히 아날로그로 사는 보기 드문 아가씨였다.


지금 나의 생활영어는 당시 그녀와 함께한 10개월의 시간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커리큘럼도 교재도 없었다. 그날그날 자연스레 오가는 수많은 주제들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녀는 미안하리만큼 모든 표현들을 노트에 적어주었다.


"지난주에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콘서트에 다녀왔어. 좌석이 맨뒤여서 친구가 크리스티나 아길레라가 잘 안 보인다고 콘서트 내내 죽상이었잖아" 하고 어찌어찌 서투른 영어로 말하면 그랬냐고 맞장구를 쳐주며, 불만 가득한 여자캐릭터 얼굴을 그리고 "She had a long face throughout the concert"라고 쓰는가 하면


내 가르마가 바뀐 날은, 평소 가운데 가르마를 탄 얼굴과 오늘 2:8 가르마를 탄 나의 두 모습을 그린 후 "I've changed my parting today"라고 적어주었다. 이렇게 그녀에게 배운 표현은 노트 3권 빼곡했다.


이것뿐일까. 어디에도 쉽게 물어볼 수 없는 야한 표현들이나 비속어, 파트타이머로 일하며 고객들 때문에 속상해하면 "이런 날은 단것이 필요해." 하며 항상 가방에 가지고 다니던 팀탐(TimTam, 초콜릿과 캐러멜이 가득한 호주 대표 비스킷) 하나를 건네주고, 그녀가 좋아하는 데이비드 베컴이 자서전을 냈다며 신나서 책을 보여주던 날, 영국지도를 그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이렇게 네 왕국을 통틀어 영국(United Kingdom)이라고 알려주던 날... 수많은 날들의 이야기 속에서 정말 재미있게 배웠다.


지금까지도 아비에게 배운 영어표현들은 그날그날의 에피소드와 함께 선명하게 떠오른다. 잊을 수가 없다.


웃고 떠들며 공부하는 시간이 계속되며 우리는 친해졌다. 서로의 연애관에 대해 대화하던 어느 날, 데이트를 안 한 지도 남자친구를 안 사귄 지도 오래되었다는 그녀에게 말했다.


"베컴 같은 남자는 일단 주변에는 없다고 봐야 해, 아비. 그리고 있어도 그런 남자는 모든 여자들이 좋아하잖아. 눈을 조금 낮춰야 남자친구가 생길 것 같아. 아! 그리고 핸드폰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래야 소통을 하지."


아비는 옅은 미소를 띠며 조금 긴 시간 동안 내 눈을 바라보았다. 나도 능글맞은듯한 미소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 그래?' 하는 표정으로 눈썹을 올렸다 내렸다.


"사실 난 시드니로 도망 왔어. 그는 매일 내 얼굴이며 몸 여기저기 닥치는 대로 때렸거든."


나는 순간 얼어버렸다. 아비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에 눈만 커진 상태로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케언즈에서 남자친구와 함께 살았어. 한 3년인가... 꽤 오래 함께했지. 모든 연애관계가 그렇듯 처음엔 너무 좋았어.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폭력이 시작된 거야. 술에 취했을 때나 그냥 기분이 좋지 않으면 소리 지르고 때리고, 다음날이면 미안하다며 무릎 꿇고 빌고..." 아비는 잠깐 멈추고,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너무 아픈 기억인 것 같아 힘들면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충격이 가시지 않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 날들이 반복되었어. 입술이 부르트고 몸에 멍이 가득한데도 내가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남자친구가 불쌍하다고 생각했어. 지금은 그가 힘든 시간을 겪고 있어서 그런 거다, 술도 끊고 상황이 나아지면 괜찮아질 거다, 다시 좋아질 수 있게 내가 그를 도와주어야 한다... 참 어리석었지. 어느 날 샤워하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는데 순간 당장 도망가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어. 안 그러면 죽을 것 같았거든. 그렇게 몰래 짐을 챙겨두고, 그가 집을 비운사이 도망쳤어. 나는 네가 생각하듯 아날로그를 추구하거나 보헤미안스러운 여유로움이 있어 핸드폰이 없는 게 아니야. 그가 어떻게든 나를 찾을까 봐 두려워서 그래."


방금들은 그녀의 모든 말들이 송곳이 되어 내 온몸을 찌르는 것 같았다. 케언즈를 떠난 지는 2년 정도 되었다고 했다. 2년이란 시간은 그녀에게, 그때 상처를 이토록 고스란히 느끼게 하는 2분이라는 시간에 불과한 것 같았다.


왜 시드니로 온 거야? 케언즈에서 더 먼 곳으로 갔어야하지 않아? 아니 그냥 영국으로 돌아가지 그랬어? 그게 안전하지 않을까? 경찰에 신고는 했어? 그 이후로는 아무 일 없었던 거지? 질문인지 뭔지 모를 퍼붓고 싶은 말들은 공기를 타지 못하고 잠자코 입안에서만 머물렀다.


"나에게.... 어려운 이야기를 해주어 정말 고마워, 아비.

그리고 내가 아는 한, 지금의 너는 안전한 것 같아 다행이고... 그리고 그래야 하고...

그리고... 또 너의 사정을 모르고 핸드폰이 있어야 할 것 같다고 말한 건 정말 미안해..."


아비는 당연히 괜찮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우린 말없이 조금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안아주었다. 안고 있는 동안 그녀의 등을 토닥토닥했다. 아비의 어깨 위로 블론드 머리카락이 내 얼굴에 닿았다. 제발, 제발, 제발 아비를 안전한 길로 인도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 아니... 빌고 또 빌었다.


바닥이 초록빛으로 말라있는 머그잔은 이미 차가워졌다. 진작 마차라테를 다 마셨다. 잠에서 깬 듯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많은 사람들과 더 진해진 커피 향이 일요일 아침을 꽉 채우고 있었다. 나는 조금 더 머물고 싶어 따뜻한 머슈룸파이와 플랫화이트를 주문해 아침을 해결했다.


계속 비가 올 것 같더니 따뜻한 햇빛이 비추었다. 비 온 후 신선한 풀냄새가 섞인 아침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며 거리를 조금 더 걷다가 호텔로 돌아왔다. 오전 11시 정도였고 무언가 긴장이 풀린 듯 나른해지며 졸음이 몰려왔다.


'해이야, 웰컴투 시드니! 좀 쉬긴 했어? 피곤하겠다. 이따가 6시 반에 QVB 앞에서 만나. 드디어 본다 우리!!‘


효영이에게 문자가 왔다. 효영이는 12년 전 시드니에서 많은 추억을 함께한 또 한 명의 친구다. 시드니를 떠난 후 우린 둘 다 미국으로 갔고, 다른 주(state)에 살았지만 그녀가 있던 플로리다에서 만나 또 다른 추억을 한 움큼 쌓았다. 함께 로렌힐 (Lauryn Hill) 콘서트에 갔더랬다. 스탠딩 콘서트였고 우린 바로 무대 앞에 자리 잡았다. "로렌!" 하고 부르면, 우리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주던 로렌을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콘서트 내내 효영이의 얼굴은 더 이상 죽상, long face가 아닌 황홀함이 가득했다. 지금 효영이는 시드니 대학에서 회계를 공부하고 있다.


저녁에 그녀를 만날 생각에 벌써부터 설레임이 가득 따라온다. 커튼을 치고 누웠다. '저녁에 만나 밀린 이야기를 나누려면 에너지가 필요해. 어서 자야지.'


아비와 재회하고 이제 효영이를 만난다.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암막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작은 햇살이 조금 넘실댈 뿐 호텔방은 컴컴했고,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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