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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효진 Jul 31. 2024

삶의 정해진 모양이 있을까

우리가 찍은 점들이 이어져 인생을 만든다


여느 때처럼 커피 한 잔을 내려 식탁 앞에 앉았다.


남편과 아이가 각자의 일터와 학교로 떠나고 나 혼자 집에 남아 주방 가득 퍼지는 커피 향을 맡는 시간.


하루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때이다.




"엄마, 우리 또 밴쿠버에 갈 수 있어?"


지난겨울방학에 캐나다 밴쿠버에서 한 달간 학교 생활을 했던 아이는 잊을만하면 한 번씩 밴쿠버에 다시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때 사귄 같은 학급의 친구들과 밴쿠버에서 느꼈던 서정적인 분위기가 한 번씩 그리워지는 듯해 보였다.


나 또한 밴쿠버가 그리웠다. 밴쿠버는 스물셋의 내가 처음으로 하고 싶은 일, 즉 꿈을 갖게 된 장소였다. 그리고 나는, 20년 만에 다시 찾은 밴쿠버 다운타운의 거리 곳곳에서, 미래를 꿈꾸던 스물셋의 나를 만나고 왔다.


그런데 여름에 밴쿠버에 다시 가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스스로를 차단했다.


여름의 밴쿠버는 밴쿠버의 일 년 중 가장 아름다운 때이다. 모든 거리와 해변이 밝은 에너지로 가득 차고 밴쿠버의 한여름을 즐기고자 하는 정열이 주체할 수 없이 넘쳐흘러 밤 10시가 되도록 집에 들어가지 못하게 나의 팔을 끌어당긴다.


그런 밴쿠버의 여름을 아이에게 소개하고 싶지 않았다. 분명 집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할 것이 눈앞에 훤히 보였다. 나 또한 밴쿠버 여름의 맛을 다시 보게 된다면 아이가 밴쿠버에서 살고 싶다고 할 때 마음속에 동요가 일 것이 분명해 자신이 없었다.


"밴쿠버는 7월에 가면 친구들이 모두 방학이라서 만날 수가 없어. 다음에 갈 수 있을지 생각해 보자."




식탁 위에 커피잔을 내려 두었다.


'동물복지의 시대가 열렸다'


아이가 읽다가 식탁 위에 올려두고 간 책. 얼마 전까지 내가 읽었던 책이다.


어릴 적부터 농장과 농장에 사는 동물, 즉 소나 닭, 양과 같은 가축을 유난히 좋아하던 아이가 3학년이 되어 교육청에서 하는 영재원 수업을 들으며 동물복지에 관한 관심이 더욱 깊어지기 시작했다. 저녁에 나와 남편이 방으로 자러 들어간 뒤에도 동물권이나 동물복지에 관한 책을 늦게까지 읽고 자는 날이 늘어나고 있었다. 관련하여 자신의 생각을 얘기할 때는 눈빛이 빛났다. 아이는 점점 더 진지해졌다.


이틀 전, 영재원 수업이 끝날 때에 맞춰 아이를 데리러 갔다.


아이의 표정이 평소와 달리 어두웠다.


"무슨 일 있었어?"

"아니야, 그냥 가자."

"아닌데,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니야, 아니야.."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하는 아이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엄마가 안아줄까? 이리 와봐"


아이를 안아주자 갑자기 꺼이꺼이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수업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마구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계속 아이를 안아준 채로 울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누구랑 싸웠어?"

"아니... “


친구랑 싸운 것도 아닌데 이렇게 엉엉 울 정도로 속상한 일이 무엇일까.


"엄마, 병아리 공장이 있는 거 알아?"

"병아리 공장?"


아이가 공장식 축산에 대해 말하려는 것 같았다.


“나 이제 치킨 너겟은 안 먹을 거야. 병아리가 태어나면 공장에서 암컷 병이리는 알을 낳아야 하니까 살려주고 수컷 병아 리는 컨베이어에 올려두거든. 그런데 그 컨베이어 끝에 뭐가 있는 줄 알아?"

"뭐가 있지?"

"바로 블렌더야. 수컷 병아리들이 그 자리에서 바로 너겟이 된다고. 정말 너무 잔인해! 다시는 치킨 너겟 먹지 않을 거야!!!"


방금 전까지 엉엉 울던 아이는 몹시 분노에 찬 모습으로 화를 뿜어냈다. 진심이다. 아들은 진심으로 화가 나 있었다.




지난해 뉴질랜드에서 달걀 값이 폭등하는 사건이 있었다. 뉴 질랜드 정부에서 일명 암탉의 동물복지를 위한 법안으로 케이지 사육을 금지하는 '배터리 케이지 금지' 계획을 2012년에 발표했는데, 10년의 계도기간을 거쳐 2023년 1월 1일부 터 전면 시행하게 되면서 달걀 생산량과 마트의 달걀 공급량 이 현격히 떨어졌고 결국 달걀 값이 폭등하게 된 것이었다.


마트에서 달걀이 사라졌다는 헤드라인에 이끌려 읽게 되었 던 그 기사가 떠올랐다.


'뉴질랜드'


가축의 동물복지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나라.

그곳에 가면 아들이 보고 싶어 하는 세상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 뉴질랜드에 가서 살아볼까?"

"정말? 여름방학에?"

"응, 여름방학에!"


아이가 환하게 웃는다.


"혹시 학교에도 다닐 수 있어?"

"학교에 다니고 싶어?"

"응, 뉴질랜드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




방학에 실컷 논다는 말은 옛말이 된 지 오래다.

학원에서 여는 방학 특강을 듣고 선행학습에 바짝 매달리는 게 많은 아이들에게 자연스러워졌다. 일주일정도 가족과 여 름휴가를 다녀올 수 있으면 방학을 잘 보낸 셈이 된다.


그렇게 가야 할까. 고민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에 정해진 모양이 있을까.


우리는 두 번의 방학 동안 캐나다로 또 뉴질랜드로 티켓을 끊었지만, 알고 보면 티켓의 Destination은 모두 '꿈'이다.


각각의 Arrival 지역에서 찍고 오는 점들이 연결되어 우리의 인생이 된다.


인생에 정해진 길은 없다고.

좋아하는 것에 진지하게 임하고, 깊이 있게 따라가다 보면 그게 너의 인생이 되는 것이라고 아이에게 알려주고 싶다.


인생의 끝에 올라서서 우리가 찍어온 점들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어떤 이야기들을 하게 될까. 아니 그보다 먼저 이 글은 어떻게 끝맺게 될까.


2024년 여름,

우리는 뉴질랜드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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