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하나 이루어 봤고 그건 시작일 뿐
뮤지컬을 하겠다고 지구 반대편까지 다녀왔으면서, 그걸로 장장 9편의 글을 연재했으면서, 이게 무슨 김 빠지는 소리냐고?
하지만 사실이다. 뉴욕까지 다녀와서 내가 얻은 결론은, 난 더 이상 뮤지컬 배우의 꿈을 꾸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더 정확히는,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뮤지컬 배우가 될 필요는 없겠다는 것, 어쩌면 그러지 않는 것이 나에겐 더 행복한 삶일 수 있겠다는 것.
어떤 면에서 나는 뮤지컬 배우라는 어린 날의 꿈을 이미 이뤘다. 4주 과정 학기말 쇼케이스가 뮤지컬 공연이었다는 주장은 다소 궁색해 보일지 몰라도 어쨌는 나는 나에게 필요한 뮤지컬의 분량을 채웠다고 느낀다.
조명 아래서 홀로 노래하며 연기하고 관중의 박수를 받았다. 게다가 친구들과 얘기를 나눴듯, 작으나마 뉴욕 한복판에 있는 무대에서였다.
대신 이제 난 그 다음에 만난 꿈을 꾼다. 하나의 꿈을 이루어 봤고, 그건 시작일 뿐인 것이다.
어떤 프로그램에서 정신과 전문의의 조언을 본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가 아니라,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를 생각해보라'고.
나는 분명 예술을, 특히 음악적인 창작과 표현을 하는 사람의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앞의 글에 썼듯 그건 세상에 말을 걸고 싶다는 욕망의 일부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욕망은 뮤지컬 배우라는 직업인이 되는 데에 나의 삶을 던지는 것 외에도 너무나 다양한 방식으로 실현될 수 있었다.
그리고 예술의 도시라는 곳의 중심부에서 예술가들의 삶을 들여다보니, 예술가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예술 자체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기본적인 생활력, 끊임없는 배움과 창작활동을 뒷받침할 추가적인 경제력, 꿋꿋하게 계속 나아갈 힘의 원천인 자존감, 자기노출에 대한 두려움의 극복, 그런 것들이었다.
게다가, 글에서 보였겠지만, 나의 주요 관심사는 뮤지컬보다는 노래였다.
뉴욕으로 향할 때 내 머릿속에서 뮤지컬의 개념은 '노래와 연기를' 하는 예술이었다. 그러나 막상 뮤지컬 수업을 들어 보니, 뮤지컬은 '노래로 연기를' 하는 일 같았다. 뮤지컬 '배우'라는 직업명에서도 알 수 있듯, 뮤지컬에서 노래는 연기의 수단이지 그 자체로 최종적인 목적은 아니었다. (내가 느낀 바로는 그렇다.)
이런 차이를 즉시 알아차린 것은 아니다. 뉴욕에서의 시간이 너무 꿈 같았던 나머지 난 내가 뮤지컬과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울에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아마추어 뮤지컬 극단을 찾아 들어가는 일이었다.
그런데 꿈 속이 아닌 현실에서, 노래가 아닌 '뮤지컬'을 본격적으로 잘해야 하는 순간이 오자 이상하게도 그리 즐겁지가 않았다. 내가 느끼기엔 난 노래만 해도 갈 길이 먼데, "노래를 아무리 잘해도 연기가 전달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라는 말을 계속 들으니 신이 나지 않는 듯했다.
내가 하고 싶은 노래와 뮤지컬식 노래가 별개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보니, 뉴욕에서 행복하게 수업을 들으면서조차 마음 한편으로 어렴풋이 느꼈던, 잘 설명되지 않던 불편함이 이거였구나 싶었다. 나는 뮤지컬이 아니라 노래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아직 그렇게까지 실력이 뛰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뮤지컬이라는 예술활동을 통해 나는 즐거움과는 별개로 효능감은 거의 느끼지 못했다. 대상을 뮤지컬에서 노래로 바꿔 생각해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이미 노래를 작살나게 잘해서 나의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새로운 영감을 얻게 할 수 있었다면 또 얘기가 달랐겠지만) 세상에 쓸모 있는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다는 감각의 부재는 일상의 전반적인 행복도를 낮추고 날 예민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에게 '효능감'이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쓸모 있다는 느낌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내가 살고자 하는 것이 노래로 세상에 말을 거는 삶이라면, 꼭 여럿이 함께 만드는 무대를 찾아갈 필요는 없었다. 그 안에서 배역을 따내기 위해 경쟁하거나 내가 편안하게 느끼지 않는 표현 방식을 억지로 연습할 필요도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지속성 있게 하기 위해 나에게 더 필요한 건 어쩌면, 노래 실력이나 새로운 인맥이나 기가 막힌 선생님처럼 뾰족한 수가 아니라, 꾸준한 경제력과 효능감이었다. 그러자 둘을 모두 얻을 있는 선택은 내가 잘할 수 있는 일로 직업활동을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게 생각하자면 내가 이 사회에서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없지는 않아 보였다. 적어도 당장 뮤지컬 배우의 길에 뛰어드는 것보다는 좀 더 손에 잡히는 길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뉴욕에 다녀온 뒤, 뮤지컬 배우라는 꿈을 꿀 필요도, 동력도 사라졌다.
나의 이런 결론을 말하면 꼭 누군가는 '그럼 노래는 취미로 하기로 했구나?'라고 말해서 나를 열받게 하곤 했다. (내가 특이한 거지 말한 사람의 잘못은 아니란 걸 안다.) 어쨌거나 나는 노래를 '취미로 하기로' 한 게 아니었다.
지금 당장 경쟁력이 부족한 나의 음악적 역량과 신용관리 등 현실적인 조건들을 고려했을 때 지금 당장 음악을 제1본업으로 삼지 않겠다는 결론일 뿐이었다. 음악이 제1본업이 될 수 있는 상태에 이르기까지는 너무 많은 자원이 투입되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변수가 너무 없다는 생각에서.
그럼 그게 취미와 어떻게 다르냐고 묻는다면, 나는 여전히 언젠가 나의 노래를 시장에서 팔 수 있는 날을 꿈꾸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겠다.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언젠가는 사람들이 내 노래를 들으러 의도적으로 나를 찾아와 주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돈이든 시간이든 지불할 가치가 있는 노래를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 날이 오도록, 조금이라도 빨리 올 수 있도록,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노래를 취미로 남겨 두기로 하지 않았다.
그렇다 한들 어쨌든 이런 결론을 얻었으니 나의 뉴욕행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그렇게 질문한다면 나는 역시, 결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몸으로 겪어 보는 것이 같을 수 없고, 욕망은 생각보다는 몸으로 느끼는 것에 가깝다. 추구되어 보지 못한 욕망은 한 인간을 아주 오래, 아주 깊이 괴롭히며 무기력하게 만들 수 있다.
전력을 다해 그 욕망을 따라가 봤을 때, 그 끝에 있는 것이 생각보다 나에게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그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도 있는 것이다.
뉴욕에 왔었지만 마돈나가 되지 못한 그 러시아인은 성공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내 욕망을 따라 움직여 그쪽 끝으로 가 보았기에 나를 위한 최적의 삶에 한 걸음 가까워졌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성공은 어떤 모양일지를 조금 더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고 말이다.
그래서 뉴욕으로의 여정을 마무리한 뒤인 지금, 나는 이제 새로운 꿈을 꾼다. 나의 삶을 사랑하는 데에 한 발짝 더 가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