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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영 Dec 30. 2023

질투에서 시작하기

나는 세상에 말을 걸어야 하는 사람

내 '연구'의 시작점은, 다름아닌 질투였다.


뮤지컬 얘기를 하다가 뜬금없이 웬 질투 얘기인가 싶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 나에게 뮤지컬과 질투는 깊이 맞닿아 있는 주제였다. '욕망'이라는 키워드로.


드러난 욕망을 따라 뮤지컬을 하러 온 것처럼, 숨겨진 욕망에 의해 질투를 느꼈다. 나의 질투가 향하는 곳이 바로 내 욕망이 자리잡은 곳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걸 정직하게 꺼내어 살펴보고 따라갈 때 내가 원하는 삶에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난 질투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경험상 질투라는 감정은 여러 다른 것(미움, 열등감, 자괴감 등)으로 잘 위장할뿐더러, 느낀다는 사실 자체가 자존심에 상처를 주기도 하는 탓에, 알아차리기도, 인정하기도 쉽지 않다.


나로 말하면 오랫동안 내 마음을 괴롭게 했던 사람이 있었다. 가수로도, 배우로도 기록적인 커리어를 쌓아 가고 있는 여성이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연예인으로 몇 년째 부동의 최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 편의상 그를 I씨라고 하겠다.


사실 난 I씨를 상당히 좋아한다. 내 주요 플레이리스트는 전부 그의 노래고, 내 유튜브 알고리즘 추천영상도 그로 가득하다. 아침이든 저녁이든 러닝을 나갈 땐 거의 항상 귀에 그의 노래를 꽂고 있다. 무대 영상 몇 편은 표정이 다 외워질 때까지 봤다. 그러니 이 괴로움은 개인적인 불만이나 미움과는 종류가 다른 것이다.


내 괴로움의 정체를 (나름) 냉정하게 들여다보니, 바로 질투였다. 뼈마디가 욱신거릴 정도의 부러움. 이 사실부터가 좀 아팠다. "나 이 사람을 질투하는구나"를 알아보는 건 그냥 아픈 일이다.


게다가 어디서 익히 듣던 바와 달리, ‘아 질투난다’를 인정하는 것만으로 그 괴로움이 드라마틱하게 해소되지도 않는다. 여전히 난 I씨 영상을 보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혹자는 그 질투를 동력 삼아 자가발전하는 걸 권하기도 하던데, 모르는 소리다. 뭐 내가 전교 2등 하는 고등학생이고 질투 상대가 전교 1등 친구라면 열심히 공부를 하겠지만, 질투의 대상이 국힙원탑 우주대스타일 경우 그런 접근으로는 뭘 시작해보기도 전에 이미 전의를 상실하는 게 더 자연스럽지 않나?


그러나 마법으로 뭘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고, I씨가 지금 내 나이였던 그 한 해에만 대박 드라마, 대박 앨범, 전국투어, 아시아투어 등의 역사를 쓴 게 팩트이긴 하지만, 그게 나의 스물일곱 살이 아니라고 해서 이십 대 후반에 대천재 싱어송라이터 스타아이돌 탑배우 여왕이 되지 못한 내 인생을 저주하며 남은 평생을 패배자라는 자기인식 속에 살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나는 매체에 비추인 그를 알 뿐, 진짜 I씨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고 감히 생각하진 않는다.)


나의 유일한 선택지는 그럼에도 나를 사랑할 방법을 찾아 나의 현재를 살아가는 것뿐이므로, 이 질투의 늪에서 나를 구하기 위한 내 대처는 그 질투의 감정을 분해해보는 것이었다. 나의 현재에 취할 수 있는 게 뭐라도 있는가를 찾아보려고.




중간 과정은 지루하므로 생략하고, 결국 발견한 내 욕망의 핵심은 의외로 단순한 몇 가지로 정리되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이루기 위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의외로 적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쉬운 일이라고는 하지 않겠다. 적어도 '인생을 20년쯤 되돌리는 것' 수준으로 불가능하지는 않은 일들이라 안도할 뿐.)


나에게는 '사랑받고 싶어 해서는 안 된다'라는 생각이 언제부턴가 있었다.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은 뒤틀린 욕망이고, 뒤틀린 욕망 끝에는 충족이 없으며, 그러므로 어떤 행동이나 노력으로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그래서 난 가수/배우/아나운서/방송인들이 '사랑받는 게 좋아서, 사랑받고 싶어서 이 직업을 꿈꿨고 선택했다'고 말하는 걸 들을 때면, ‘엥, 저게 성립할 수 있는 의사결정인가, 그게 특정한 직업을 가짐으로써 충족될 수 있는 욕망인 건가?’라는 의문에 빠져들곤 했다.


그래서 앞에 썼듯이 (사실 그의 노래와 무대를 아주 좋아함에도) I씨를 향해 느끼는 질투의 정체도, 처음엔 인기나 유명세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예술적인 경지나 실력, 경력 등등에 대한 것일 줄 알았다.


하지만 질투의 감정을 들여다보며 발견한 내 욕망의 첫 번째 핵심은 다소 당황스럽게도,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애착유형검사를 하면 난 ‘회피형 불안정애착’이 나온다. (내가 검사에 썼던 링크를 여기 공유한다.) 결과를 보면, 그 유형의 특징에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기도 누군가의 의지를 받기도 어려워한다는 점이 포함된다.


사회생활에 필요한 언어와 행동을 학습해 사회화된 결과, 스물일곱 살의 나는 오래 연락하는 친구들도, 깊은 마음을 나누는 친구들도 있고, 큰 문제 없이 사회생활도 한다. 친한 사람들이 바로 옆에 붙어있지 않은 시기에도 문제없이 일상생활을 잘 영위할 수 있다. 말하자면 꽤나 '친사회적', '독립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독립적이라기보단, 관계 맺기를 두려워한 나머지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어지기를 시도했던 측면도 있었다.


진정한 인격적 관계맺기는 일정 수준 이상의 자기노출과 정서적 빚지기, 상처 주고받기를 포함하는데, 나는 가까운 친구에게도 빚지거나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편이었다. 이런 특성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맏이인 것, 어릴 때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셨던 것, 유년기의 친구관계, 그 외에 스스로를 탓하기에는 너무 가혹한 몇몇 요인들이 함께 작용했을 거라 생각한다.


책임감 강하고 씩씩한 게 나쁘냐, 할지도 모르겠지만, 아주 어린 아이가 너무 어른스럽게 구는 것을 보면 좀 안쓰럽지 않나? 이때의 나는 내가 좀 그렇게 느껴졌다.


외로운 게 나만이 아닐 거라는 것도 안다. 문제라는 인식조차 어려웠던 건 이런 경향이 사회 전체의 이행 방향과 크게 다르지 않은 탓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다들 그렇게 살지 뭐'라는 말을 유효한 위로로 받아들이는 순간, 인생은 살기에 너무 퍽퍽한 것이 된다. 성취도, 돈도, 여행도, 맛있는 음식도 딱히 새로운 행복을 주는 게 아님을 경험으로 아는데, 어느 순간 이런 닭가슴살 같은 삶이 무슨 의미인가 싶어 훌쩍 떠나고 싶어지면 어떡하는가?


인간이 원래 외로운 것이라느니 외로움을 받아들여야 어른이 되는 것이라느니 하는 말에는, 어딘가 절망적이고 현실과 부합하지도 않는 면이 있다. 내 경우만 해도 나를 지구상에 붙들어놓는 중력은 다른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날 묶는 관계들임을 깨닫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노래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러나 내 욕망이 단순히 '노래하는 삶'이라고 하기에는 I씨 외에도 다른 성공한 가수들도 많고, 반대로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고 자기만족으로 노래하는 사람도 많지 않은가.


유독 I씨에게서 내가 자꾸 보는 것은 좀 다른 것이었다. 정확하게 찾아 드러낸 자기만의 색깔, 그 고유한 색깔에 대한 세상의 환대와 찬사, 그 반응을 통해 확인되는 그 사람의 대체불가능성, 그런 특별함을 스스로가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모습,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얻는 행복이었다. (내가 본 게 그렇단 소리다. 다시 말하지만, I씨가 실제로 어떤 삶을 사는지야 내가 알 길이 없다. 감히 그의 삶을 안다고 자신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저 각각은 매일의 일상을 구성하는 실체들, 즉 하나의 인생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과 맺고 있는 진실하고 견고한 관계들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들 아닌가?


연습실을 잡아 놓고 혼자 노래를 부를 때도 나는 행복했다. 그러나 솔직히 더 자극적으로 행복한 건, 그 노래를 사람들 앞에서 부르고 노래에 대한 반응을 얻을 때였다. 노래만이 아니었다. 혼자 글을 쓰는 것도 난 좋아했다. 그러나 정말 글쓰기에 동력이 붙는 건, 내 글을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다는 걸 알고 있을 때였다.


무대에서 노래를 하고 싶다는 소망은 내가 가진 감성과 물리적 조건이 세상에서 어떤 공명을 불러오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었고, 읽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소망도, 세상에 말을 걸어서 돌아오는 반응을 보며 또 거기에 반응해 관계들을 맺고 싶은 마음이었다.


내가 먼저 건넨 나의 존재의 일부에 살아있는 상대방의 반응을 보고 싶고, 그렇게 어슷하게라도 내 존재의 의미를 보고 싶은, 대체불가능한 관계(들) 속에서 나의 고유한 가치를 확인하고 싶은, 내가 나인 채로 빚진 것 없이 받아들여졌음을 확인하고 싶은, 다소 금쪽이 같지만 유아적이라며 스스로 비웃고 등한시하기엔 너무도 내 실제 깜냥인, '관계'를 향한 갈망.


여기까지 생각하고 보니 내가 I씨에게 질투를 느끼는 주된 이유는 내가 학창시절 열심히 공부했던 이유나, 졸업 후 짧게나마 아나운서 준비를 했던 이유, 뮤지컬을 하러 뉴욕까지 갔던 이유에 별개가 아닌 듯했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진 모습을 엉뚱하게 ‘내가 보는 I씨’에게서 발견했을 뿐이다.


이쯤 하고 나서야 난 상대적으로 편안한 마음으로 I씨의 무대영상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원래 차마 맘편히 보질 못했었다. 어느 정도였는지 알겠는가? 이 좋은 걸 그동안 질투심 때문에 실눈 뜨고 봤다니 말이다.)




다시 질투로 돌아와서. 인생이라는 게 각자 다 다르고 타인과의 비교는 의미가 없다지만, K-경쟁사회 27년차에게는 우주대스타를 질투하며 동시에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게 솔직히 정말 쉽지 않다.


그러나 엄연히 드는 감정을 없앨 수도 없고 아닌 척해봐야 소용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비교의식에 지지 말고 계속해서 나를 사랑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세상이 정한 기준으로 타인과 나를 비교하고 재단하며 사는 삶은 고단하고 불행할 가능성이 크다. 수입이니 몸값이니 브랜드파워니 하는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지 않는 '존재의 가치'에 대한 믿음을 계속 일으켜야만 나를 잃지 않고 생존할 수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걸 스스로 도울 방법으로 내가 어렴풋하게나마 찾은 건, 노래나 글쓰기처럼 내가 좋아하는 행위들을 통해 가까운 사람들과 더 많이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나는 세상에 말을 걸어야 하는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풀어서 말했지만 관심종자란 뜻이다.)


이렇게, 나의 질투를 묵상한 끝에 나의 연구는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세상에 말 걸기'와 ‘진실한 관계맺음’이라는 주제로.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나는 어떤 언어와 속도로 이웃과 세상에 말을 걸고 싶은지에 대해서였다.


탑오브더락에서 내려다본 뉴욕 전경. 여기 올라가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볼 수 있다. 사람의 세상이 참 크다. 초저녁부터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이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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