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과학적 업적 중 식물의 구조가 가지는 의미를 밝히는 것만큼 큰 즐거움을 준 것은 없다네
-찰스 다윈
매서운 칼바람의 겨울이 지나고 해가 길어지며 따뜻해지면 이윽고 찾아오는 일 년의 순환이 있다.
언뜻 보면 겨울의 나무들은 잎도, 꽃도 없이 헐벗고 마치 동면하는 듯 보이지만, 동면하는 동물들이 멈춘 것이 아니듯 겨울의 나무들도 멈춘 것이 아니다. 비록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바쁜 인간의 시선에는 멈춘 것처럼 보일지라도. 겨울이 찾아오면 나무는 수분 손실을 줄이고, 필요 없는 에너지 손실을 막기 위하여 잎을 떨어트린다(낙엽¹).
그림 1. (좌) 목련의 겨울눈, (우) 겨울눈의 단면. 그림은 블로그에서(최하단 링크) 차용하였는데, 12월달에 찍은 것인데도 이미 완성된 꽃 형태를 지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뿐 아니다. 우리가 봄에 바라보는 싱싱한 작은 잎들은, 사실 겨울이 찾아오기도 전부터 만들어진다. 푸른 잎과 화려한 꽃에 가려져 있지만, 나무들은 여름이나 가을부터 내년을 위한 미니어처 잎과 꽃을 만들어 보관해 둔다. 마치 인간이 어려울 때를 대비해 목돈을 모아 두듯, 식물들도 비교적 에너지에 여유가 있는 여름-가을에 미리 내년을 위한 잎을 만들어 두는 것이다. 이것은 꽃눈과 잎눈으로 나뉘는 겨울눈(Hibernaculum, 혹은 winter bud) 이라고 불리는 구조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², 줄기에 자그맣게 달린 겨울눈을 갈라 보면 꼭꼭 싸매어져 튼튼한 표피층과 따뜻한 보온층으로 덮여 있는 작은 이파리와 꽃잎들을 찾아 볼 수 있다(그림 1).
그림 2. 봄의 도래를 알리는 꽃 중 하나인 벚꽃.
추위를 겨울눈 속에서 이겨낸 작은 잎들은 날이 풀리면 돋아나기 시작하고, 이내 점차 시간이 흐르며 동백, 목련과 매화,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벛꽃과 유채 그리고 철쭉까지 화사한 꽃을 피워내고, 발 아래의 작은 풀꽃들인 냉이, 민들레, 꽃마리와 꽃다지, 개망초, 제비꽃, 봄맞이꽃들도 질세라 올망졸망 자세히 보아야 예쁜 꽃망울들을 터트리며, 달콤한 꿀 내음이 퍼지고, 푸릇푸릇한 새싹과 돋아난 이파리들은 따뜻한 햇살을 가리우고 선선한 그림자를 드리운다(그림 2).
그때, 우리는 봄이 왔구나, 하고 말한다.
그림 3. 결혼식에서의 부케와, 장례식의 국화³. 인간의 만남의 시작부터 끝까지, 꽃은 그 곁을 지킨다.
이렇게 꽃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존재다. 인간은 서로에게 다양한 의미를 담은 꽃을 주고 받는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인류 문화에서 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예식들에는 꽃이 함께한다. 꽃이 없는 결혼식, 장례식, 추모식, 성례식을 생각해 보라(그림 3). 수많은 시인들은 꽃을 찬미하였고, 수없는 화가들은 꽃을 그렸다. 4천 5백 년 전의 이집트에서도 정갈히 자른 꽃을 모아 꽃꽃이를 하였으며, 로마 시대에도 그리하였고, 심지어 약 7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의 고대 무덤에도 꽃가루와 화석화된 식물들이 발견된다(E. Pomeroy et al., Antiquity, 2019, (그림 4)). 이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긴 하지만, 외부의 시선에서 아주 나이브하게 바라보자면 꽃을 일종의 부장품으로 생각하거나, 문화적 상징을 가지는 장식품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모르긴 몰라도, 이와 같은 수많은 발견들은 7만 년 이전에도 인간은 꽃에 의미를 담아생각했을 것이라고 시사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⁴.
그림 4. 이라크 북부 쿠르디스탄에서 발견된 흔적. 유골과 함께 고대의 꽃가루와 보존된 식물이 발견되었다.
이렇게 꽃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밀접한 존재이며, 너무나 많은 식물들에게서 꽃을 볼 수 있기에, 가끔 어떤 사람들은 모든 식물이 꽃을 가진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동물들이 모두 똑같은 생식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모든 식물이 꽃을 가진 것은 아니다.
양치식물, 선태식물, 겉씨식물과 같은 식물 분류군들은 꽃을 피우지 않으며 포자를 통해 번식한다(이 포자는 물이나 바람이 주로 운반한다. 그래서 소나무나 은행나무가 날리는 '꽃가루' 는 엄밀한 의미의 꽃가루가 아니며, 그들의 '꽃' 또한 진정한 의미의 꽃이 아니다. 심지어 명백히 열매처럼 보이는 은행나무나 측백나무의 '열매' 도 진정한 열매가 아니다(그림 5)). 오로지 속씨식물군만 꽃을 피운다⁵. 그러나 식물의 세계에서 속씨식물군은 너무나 성공한 존재라서, 지금까지 발견된 전체 식물 종의 90-95% 가 속씨식물에 속한다. 즉,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들은 모두 꽃을 피우기에, 모든 식물이 꽃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곤 하는 것이다.
그림 5. 은행나무의 '꽃'. 그러나 이들은 겉씨식물이어서, 진정한 의미의 꽃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까지 살펴보면 언뜻 생각하면 그저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법하지만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그것은 속씨식물, 즉 꽃의 기원이 약 1억 3천만 년 정도 이전, 백악기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전체 식물의 역사를 고려하면⁶꽃을 피우는 식물군은 꽤나 최근에 나타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나타나고 급격하게 불어나 전체의 90퍼센트에 달하는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림 6. 목련과 함께 모든 현화식물(속씨식물)의 자매군으로 여겨지는, 즉 가장 '기본적' 현화식물로 생각되는 암보렐라. 이러한 현화식물의 갑작스런 등장은 다윈을 당황케 했다.
게다가 점진적으로 변화해 온 다른 생물들과는 달리, 꽃은 1억 3천만 년 전까지는 별다른 낌새가 없다가 갑작스럽게 나타난다. 진화론을 제창한 찰스 다윈은 식물학자 돌턴 후커와의 서신에서 고작 천만 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급격하게 탄생하고 수십 만 종으로 분화한, 꽃이라는 '지독한 미스터리' 에 대해 언급하였다(그림 6). 분명 다른 생명들처럼, 조상이 되는 식물로부터 점진적으로 진화해 왔을 터인데 조상은 보이지 않고 갑작스럽게 꽃이 나타났기 때문인데, 이는 다윈이 주장한 점진적인 변화를 통한 진화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⁷.
(다음 글에서 계속)
미주 Endnote
1. 이러한 잎이 떨어지는 과정은 잎과 줄기 사이에 탈리층이 만들어지고, 세균이나 곰팡이의 감염을 막기 위하여 떨어지는 곳에 보호를 위한 큐티클층이 형성되는 복잡한 기전을 통한다(이는 식물 호르몬인 낙엽산과 에틸렌을 매개로 일어난다). 낙엽이 떨어진다는 것은 단순히 잎을 꺾듯이 일어나는 수동적 과정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은 동물의 세포 사멸 또한 마찬가지인데, 세포의 비의도적인 사멸(necrosis) 와 의도적인 자살(apoptosis)는 아주 다른 처리 기전을 가진다. 놀랍게도, 동물의 노화나 조직의 퇴행 또한 단순히 기계가 닳는 것과 같은 수동적 과정이 아닌,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능동적 반응이라는 것이 알려지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초파리의 므두셀라(기독교 경전에 나오는 사람 중 제일 장수한 사람의 이름을 땄다) 돌연변이가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알아보도록 하자.
2. 나무마다 특징적인 잎과 꽃이 무성하여 구분이 쉬운 봄여름과는 달리, 겨울에는 식물의 특징들이 대부분 사라지고 만다. 그렇다면 겨울에는 식물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겨울눈, 잎이 떨어지고 남은 물관과 체관의 흔적(잎자국 또는 엽흔), 나무 줄기의 단면, 나무의 수피와 수형과 같은 여러 특징들을 이용하여 구분할 수 있다. 흔히 ‘새 발자국 보고 새 맞추기’ 는 농담의 소재로 쓰이지만, 전문가들은 정말로 이러한 특징들을 이용해 구분할 수 있다! 분류학은 인류의 가장 유서 깊은 학문 중 하나이며, 인간은 이러한 패턴 인식의 귀재이다. 이에 대해서는 또 다른 글로 다루어 보자.
3. 부케는 본디 이집트에서 왕의 권력을 상징하는 곡식 다발이었는데, 이것이 꽃으로 변화하며 청혼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장례식에서 국화를 헌화하는 것은 본디 유럽 쪽의 전통인데, 우리 나라 또한 서구화되며 검은 상복과 흰 국화를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4. 물론, 대체 인간이 왜 꽃을 좋아하는가에 대한 답은 다른 층위에서 답해야 할 것이다. 이는 내가 관심을 가지는 주제 중 하나인 신경미학neuroaesthetics의 영역일 텐데, 일부 학자들은 꽃이 피는 곳은 차후 유용한 인간의 식량인 열매가 열리는 곳이므로, 꽃=음식이라는 관계가 이루어져 꽃에 대한 선호가 생겨났을 것이라는 가설을 지지하곤 한다. 그뿐 아니라, 꽃의 밝은 색과 대칭성의 구조도 사람들이 꽃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원인이 될 것이다.
5. 그래서, 속씨식물군을 두고 '꽃피우는 식물', 현화식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영어로는 flowering plants, 아니면 angiosperms 라고 한다. 그리스어로 씨앗을(sperm) 담고 있는 (angeion) 식물이라는 뜻이다. 참고로 혈관을 의미하는 angio- 라는 접두사가 여기서 왔다. 피를 '담고' 있으니까.
6. 선캄브리아기, 그러니까 8-9억 년 전부터 다세포 광합성 생물이 생겨났으며, 4.7 억 년에서 3억 년 사이에 이르는 오르도비스기와 데본기를 지나며 육지식물, 그리고 나무가 생겨났다. 이후 상기한 현화식물들이 생기며 광범위하게 퍼져나갔으며, 4천만 년 정도 전 풀glass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건조한 땅을 덮어나갔다. 풀은 언뜻 보면 간단해 보이는 구조에, 납작하고, 작고, 오래 살지도 못하는, 별볼일 없는 식물로 보이지만 아주 근대에 생겨난 식물군이다! 풀에 관한 이야기도 재미있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에 또 다루어보자.
7. 이것은 점진론적인 진화를 지지하는 것인데, 스티븐 제이 굴드와 같은 진화론자들은 단속적 진화의 지지자이다. 이는 마치 꽃과 같이, 생물들은 안정적인 상태에서 큰 변화 없이 존재하다가 환경 변화에 따라 급격하게, 마치 계단과 같이 단속적으로 진화한다는 뜻이다.
* 그림 1에 대한 사진 출처; (좌) https://m.blog.daum.net/kualum/14692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