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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나 Aug 27. 2024

착한 어린이를 생각할 때


지금보다는 나이가 적지만 결코 어린이는 아니었던 시절에 나는 이렇게 썼다. 나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고 가끔은 그것이 의무감이 되어왔다고. 착한 역할은 다 맡아서 하다보니 나를 돌아 볼 시간이 많지 않았음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음을, 그것이 중요한 것임을 나중에서야 알았다고. 매 순간을 노심초사하면서도 초조해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누군가를 기다린다고. 한동안은 그에게 의지해 모든 마음을 쏟을 것이고 그는 평생 함께 할 또 한사람이 되는 거라고. 조금 더 먼 미래의 나는 생각한다. 내가 살아온 방식에 대해서. 


그래, 나는 전부터 약간 좀 자학적인 구석이 있었다. 그걸 누군가는 질긴 생명력이라고 누구는 지구력이라고 누구는 의지라고 누구들은 끈기라고 불렀다. 아무도 내게 그것이 낮은 자존감이라고, 두려움이라고, 겁먹은 열정이라고 하지 않았다. 사실 전에는 그게 좀 서운했는데 이제는 나도 누구들과 같이 생각한다. 잘 버티고 잘 참는 나는 뭐든 엄청나게 원하는게 잘 없고 죽어도 해야하는 것이 잘 없다. 사실은 아닐텐데, 나는 어릴 때 크게 울었던 기억이 많다. 


다 해결될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주 어릴때부터 선과 악의 경계가 꽤나 이분법적이었고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정답이 있는데 나쁜 사람들이 정답을 선택하지 않는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모든 일은 단순한데 어른들은 결코 선택하지 않으므로, 나는 가능한 착한 쪽으로 나를 확실하게 명명해왔다. 그런 점에서, 어질고 충성스러운 이미지를 깨고 나온 것은 내 존재에 큰 도전이었다. 내가 도달해야 할 어떤 기준치가 사라지는 건 내 자아의 도식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이었으니까.  


한편으로는 기회이기도 했다. 착하게 열심으로 산다고 칭찬받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고 타인의 구미를 맞추는 것이 곧 내 실력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됐다. 하지만 무섭고 불안했다. 몇년뒤에는 어떻게 살고 있을지에 대한 모든 그림, 안정적인 결론을 포기해야 했으니까. 그래도 고마웠다. 삶의 불확실성에 대해 이렇게 지독하게 부딪히지 않았더라면 나는 언젠가 고집쟁이 기성세대가 되어 누군가를 괴롭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도 많은 날에 무너져야 하는 것도. 단순하게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이렇게 귀하고 소중한 일인줄도 몰랐을테다. 그런 것을 깨닫는 나는 자주 우울해졌지만 그만큼 구체적이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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