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족들의 표정과 말투에 예민했다. 그래서 아직 엄마아빠가 퇴근하지 않은 초저녁쯤이면, 부엌에 놓인 20kg 쌀포대의 뜯어진 부분을 잘 여몄다. 그리고 그 위에 앉아 할머니의 요리를 지켜보았다. 아무래도 혼자 있는 것보다는 말동무할 사람이 있는 쪽이 좋을 듯했다. 할머니는 방에 가서 TV를 보라고 했지만 나는 할머니한테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했다. 할머니는 호랑이 이야기를 해줬고 나는 놀랍게도 그 이야기들을 곧잘 믿었다.
가끔 할머니가 해준 밥이 아닌 다른 것을 먹을 때도 있었다. 그런 경우에는 메뉴가 정확하게 정해져 있었다. 가장 자주 먹은 것은 아파트 단지 후문 쪽에 있는 작은 마트 앞의 포장마차 순대였다. 엄마가 퇴근길에 버스에서 내리면 항상 그 마트를 지나왔는데, 장을 보는 날에는 꼭 떡볶이와 순대를 샀다. 재미있게도 아빠는 어묵국물만 먹었고 동생은 떡볶이만 먹었고 나는 순대를 쌈장에다가 푹푹 찍어서 먹었다.
순대 안에 쏙쏙 들어간 당면이 쫀득하게 씹히는 게 즐거웠는데, 어느 날부터는 순대보다 순대 옆에 따라오는 몰캉한 것이 더 맛있었다. 알고 보니 그것은 허파였다. 밥을 조금 일찍 먹었거나 간식을 먹고 싶은 휴일에는 다 같이 라면을 끓여 먹었다. 우리 집에서 취급하는 라면은 안성탕면 하나뿐이었는데, 물을 많이 넣고 면을 푹 익힌 다음에 스프를 절반 정도만 넣어 순하게 먹는 것이었다. 그리고 계란을 넣고 휘휘 저어 국물에 다 퍼지게 했다. 엄마가 끓여주는 안성탕면이 제일 맛있었는데, 할아버지는 짜게 먹으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 엄마가 해주는 것보다 스프를 더 적게 넣었다.
배달 음식도 딱 한 가지였다. 한 달이나 두 달에 한번 먹을까 말까 했지만 그 메뉴는 치킨이었다. 치킨을 시키는 곳의 선택지는 두 군데였다. 하나는 처갓집, 하나는 지코바. 처갓집은 기본적인 후라이드와 양념이 딱 알맞게 조리된 전형적인 메뉴를 주문했다. 사실 나는 다른 메뉴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어린이였지만 뜸하게 찾아오는 치킨은 정말 맛이 좋았다. 꽤 오랫동안 반반치킨만 고집하던 엄마아빠가 어느 날 지코바의 숯불양념과 소금구이를 주문해 주었을 때는 새로운 세상에 눈이 뜨이는 것 같았다. 나는 양념에 밥을 비벼 먹어도 맛있다는 사실까지 발견해 냈다.
가족외식은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했다. 그것도 아파트 단지 아래쪽 큰 대로변에 있는 감자탕 집에서만 이루어졌다. 그때가 부산에 감자탕 집이 얼마 없던 시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내가 성인이 되고 서울로 상경한 이후였다. 원래 남부지방에서는 감자탕이라는 음식을 잘 먹지 않았었는데, 그렇다면 당시 감자탕이라는 메뉴를 정한 것은 수원에 고향을 둔 엄마를 배려한 것이었다.
온 가족이 좋아하는 식당을 찾은 것도 처음이었고, 그 동네로 이사오기 전부터 찾아오던 맛집이라 그곳에 대한 우리 가족의 애정은 매우 깊었다. 자주는 아니어도 정기적으로 방문했기 때문에 엄마아빠는 그 식당의 사장과도 꽤 친한 사이가 되었다. 나는 따뜻한 국물이 질퍽해질 때까지 천천히 배를 채우다가, 마지막에 눌어붙은 감자와 우거지를 밥과 함께 볶아먹는 것을 좋아했다. 가족들이 미처 숟가락을 더 들지 못할 때에도, 나는 남은 잔반을 해치우기 위해 열심히 밥을 먹었다.
그리고 나에겐 '그' 순간이 있다. 배가 고프고 집에 아무도 없는 순간. 또는 배고픈 동생과 둘이 있는 순간. 엄마는 우리를 위해 각종 라면과 3분 카레와 미트볼을 구비해 놨다. 나는 아홉 살부터 라면을 끓였다. 라면의 종류에 따라 어떻게 끓여야 하는지도 터득했다. 카레는 약간 매운맛이 제일 좋았다. 나중에는 직접 야채를 덖어 카레를 만들었다. 혼자서 만든 최초의 요리였다. 같은 방식으로 볶음밥도 만들었다. 나는 라면이나 볶음밥보다 카레가 더 좋았다. 하지만 엄마는 한결같이 카레를 싫어했다. 나중에 들은 말이지만 나를 임신했을 때 카레 입덧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전에는 카레를 되게 좋아했단다. 나는 지금도 카레를 아주 좋아한다.
가족들과 밥을 먹을 때, 가족들을 기다리며 밥을 먹을 때, 혼자 먹을 때, 동생의 밥을 차릴 때, 내가 다른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요즘은 가끔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