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어이! 하 윤조, 최 성숙. 종 쳤는데 자리에 똑바로 좀 앉지?”
싫은 소리 안 하면서도 적당히 혼 안나는 법을 잘 아는 베테랑 반장이 주의를 주자 성숙이 뭔가 더 지껄이려다가 입을 닫고 하는 수 없이 자리로 가서 앉았다.
1교시는 국어였고, 다음 시간은 수학이었다. 주요 과목 선생들은 들어서자 마자 뻔하게 비어 있는 두 자리를 확인한다. 2학기가 시작한지도 두 달이 넘었으니 선생들이 대부분 아이들의 자리를 알게 마련이다. 두 자리나 뻐끔하니까 인상을 쓰던 선생들이 이내 자리 주인이 누군지를 기억하자 무슨 일인지 한 번 묻지도 않고 의무적으로 출석부에 누락 표시만 기입한 후 곧장 평소처럼 그날의 진도를 나가기 시작했다.
하나는 2등이긴 하지만 반 10등이랑 같은 대학을 갈 수 밖에 없는 가난아고, 또 하나는 얼른 졸업해 주는 것이 감사할 양아치니 수업에 보이지 않는다 해서 하나 신경이 쓰이거나 안타깝거나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2등은 단 한 번도 결석을 했던 적이 없는 아이고(심지어 애비에게 두드려 맞아 입술이 터져서도 꿋꿋하게 출석했던 의지의 우등생이었다.) 양아치는 양아치대로 지각이며 무단 조퇴는 할 지언정 갈데가 없는 모양 학교는 꼬박꼬박 나왔던 치였는데도 말이다.
“차라리 학원 선생이 인간적이지? 그래도 학원 선생들은 수강생 안 보이면 궁금해 하기라도 하잖아. 안 그래?”
정수가 무언가를 정성스레 눌러 써 가는 와중에 속닥거린다.
“… 비싼 꽃등심 먹고 정성이 뻗치셨네. 네가 주는 초콜렛만 쏙 빼먹고 편지는 제대로 읽지도 않을텐데 뭐하러 그렇게 한 석봉 빙의해서 정성을 다 하고 있냐?”
아니나다를까 오늘도 변함 없이 정수는 대호를 위해 정성스레 포장한 초콜렛에 동봉할 진심의 팬레터를 작성중이다.
“너… 진짜 악담을 해도 정말… “
“박 정수! 수업 시간에 누가 딴 짓하래? 교실 밖에서 묵상 실시.”
분명히 같이 떠들었는데 늘 이런 식이다. 익숙하던 어떤 것들이 갑자기 부당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윤조는 조용히 정수를 따라 나섰다.
“하 윤조. 넌 어디 가? 자리에 얼른 앉아.”
“같이 떠들었어요.”
“앉으라니까!”
자수를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 학교다.
“그런 적 없어? 그 뭐라더라… 맞다. 데자뷰. 분명히 어떤 곳이라던지 상황이 처음인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낯설지 않은 느낌, 꼭 언젠가 똑같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 그런 적 없어? 내가 오늘 그걸 느끼잖아. 으악. 소름 끼쳐. 오전 내내 너무 피곤한 것도 그렇고, 이거 봐. 도시락 메뉴도 어제랑 똑같애. 소름끼치지 않냐?”
“너의 그 호들갑이 더 소름끼친다.”
정수가 승진을 상대로 이상한 소리들을 늘어놓기 시작할때 쯤 윤조는 슬그머니 화장실을 가는 척 일어섰다.
“우리 먼저 먹는다? 너 금방 올거지?”
“응. 먼저 많이 먹어. 모자라면 내 것도 열어 먹고…”
맨날 귀찮을 정도로 붙어 다니던 놈이 이렇게나 오래 잠적한 것은 처음이다. 대체 미나인지 수연인지 애매한 그 누군가가 아직 살아 있는지도 궁금해 죽을 지경이다. 빠른 걸음으로 일층 뒷편에 있는 소각장 쪽으로 나오자 스산한 가랑비에 안경이 잔뜩 젖어 온통 뿌연 성숙이 비 맞은 제비새끼처럼 어깨를 떨면서 미리 나와 서 있었다.
“너 어디에 있는지 알아?”
“응. 대충…”
“… 넌 어떻게 아는거야?”
“나 요즘 걔 엄마 령이 들락거리거든. 그 엄마 령은 출산도 채 끝나기전에 살해 당해서 아직도 몸에 탯줄을 감고 있거든. 아들이 어딨는지는 저절로 알지.”
“그렇군… 그런데 어떻게 나갈거야? 정문에 선도들 쫙 깔렸던데…”
“그게 문제야 지금… 후문 쪽에 개구멍이랑 죄다 막아놨더라고. 어느 놈들이 자주 들락거렸는지… 휴… 어쩌지? 빨리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그 자식이 무슨 짓 하기 전에… 거의 지금 생선을 앞에 둔 고양이 심정일거라고. 뭘 잘 모른다 해도 저절로 알게 되어 있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 네가 자꾸 걔를 너무 나쁘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 싸가지가 없긴 해도 영 잔인한 놈은 못 되…”
“모르는 소리 마!
자살령은 대부분 악귀가 될 수 밖에 없다고!”
소리를 지르며 나타난 것은 주정뱅이 영이었다.
“아우 깜짝아… 왜 또 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