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할 거야, 힘내, 잘할 수 있어.
무언가로 힘들어할 때 상대가 진심을 담아 건넨 응원의 말이었다. 진심은 전해졌지만 그뿐이었다. 정말로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고, 힘을 낼 수도 없었다.
남편이 가끔 꿈에 나오는데, 별다른 말은 없다. 이왕 나올 거면, 한 마디를 해줬으면 좋겠다. 남편에게 듣고 싶은 말은
“잘 살고 있어.”
라는 말이다. 이 한마디면 충분할 것 같다. 나는 왜 이렇게 이 한마디를 듣고 싶은 걸까? 잘살고 있다는 건 어떤 걸까? 잘 사는 법이라는 게 있을까?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자꾸 이런 고민을 하는 건 내 삶을 사랑하기에, 더 아껴주고 소중하게 살고 싶어서다. 나의 고민은 늘 욕심과 안주 사이에서 줄다리기한다.
살면서 욕심을 좀 가져보라는 말을 듣기도 했고, 욕심 좀 버리라는 말을 들기도 했다. 부지런하지 못할 때는 욕심을 내보라는 말을 들었을 테고, 지나치게 부지런해서 조바심을 내게 되었을 때는 욕심을 버리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요즘 나는 욕심내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집 근처 산에 갈 때만 해도 그렇다. 우리 동네 있는 산은 높은 편이 아니다. 높이가 293m라서 쉬지 않고 오르면 40분 만에 정상까지 갈 수 있지만 나는 중턱까지만 간다. 조금 욕심을 내면 정상에 오를 수 있지만, 중턱까지가 나에게 적당하다. 어느 정도 운동이 되면서도,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건 딱 그 정도다. 중턱까지만 가도 만족스럽다. 하늘에 닿은 뾰족한 정상에서부터 평평한 바닥까지 다 보인다. 산 초입부터 중턱까지 오르는 동안 수십 그루의 나무가 내뿜는 초록빛, 피톤치드 향이 닿으면 스트레스, 부정적인 감정, 욕심으로 경직됐던 마음이 스르르 힘을 푼다. 중턱에 있는 꽃동산은 어찌나 관리가 잘 되는지, 계절에 따른 철꽃을 볼 수 있다. 그 속에서 날갯짓하는 나비를 보고 있자면, 동화 속에 들어온 듯한 착각마저 든다. 말 그대로 ‘힐링’이 되는 순간이다.
힘들어서 더는 못 걷겠다는 여덟 살 첫째 아이를 달래 가며, 여섯 살 둘째 아이를 업고서라도 정상에 올라야만 직성이 풀리던 때가 있었다. 비단 산에 오르는 일뿐 아니라 매사에 그런 식이었다. 몸과 마음이 다치는 줄도 모르고, 나의 적당한 한계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오르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던 지난 시절.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애썼던 걸까? 눈에 보이는 정상을 오르면 그때는 만족스러웠을까? 지나고 보면 그 순간뿐이었다.
이제는 안다. 정상에 오르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중턱에만 가도 만족스럽다는 걸 마흔이 넘은 이제야 알았다. 만족감은 내 분신과도 같았던 불안을 덜어줬고, 그만큼 안정감을 더해줬다. 정상만 바라보며 살던 과거보다 중턱에서도 만족감을 느끼는 현재가 더 행복한 걸 보면, 나에게 성취감보다는 안정감이 더 큰 행복의 요소인 듯하다.
오늘도 나는 잘 사는 법에 대한 고민을 하며 욕심과 만족 사이에서 줄다리기하다가 “지금 그대로에 만족”으로 몸을 기울였다.
엄청난 일을 해내지 않아도, 대단한 성취를 이뤄내지 않아도, 그냥 나에게 주어진 지금을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잘 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