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뎌졌던 내 감성을 깨운 건 뭘까? 산책? 계절? 감정?
아마 이 모든 게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테지만, 가장 큰 작용을 한 건 ‘감정’ 일 것이다. 나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인해 마음이 힘들 때, 이성보다는 감성에 기대는 편이다. (T형으로 살아가려 한다면서도, 결국 나는 F형 인간인가 보다.)
감성 충만할 때면 무심코 지나치던 것들에 시선이 간다. 며칠 전 시선이 갔던 건 산에서 본 들꽃이었다. 솔솔 부는 가을바람에 여리게 흔들리는 보라색 꽃잎이 마치 나비의 날갯짓처럼 보였다. 무성한 풀 속에 덩그러니 피어 날갯짓하는 보라색 꽃잎을 보다가 문득 저 들꽃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울컥하더니 눈물이 나기 시작했고,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발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왜 눈물은 매번 이렇게 감추고만 싶은 걸까? 웃음은 굳이 숨기고 싶지 않은데 말이다.
촉촉하게 흐려진 시야 속에서 묵묵히 걷다 보니 흐느낌도 눈물도 잦아들었다. 손등으로 두 눈을 번갈아 쓱 문지르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연보라색 꽃으로 시선이 갔다. 들국화였다. 공기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이 자유로워 보였고, 들꽃의 삶은 평화롭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부는 방향대로, 기꺼이 흔들리는 모습이 참 예뻤다. 바람을 막아 보겠다고, 막지 못한 바람에 흔들리지 않겠다고, 흔들려도 넘어지지 않겠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사는 내 삶보다는 들꽃의 삶이 좋아 보였다. 들꽃이 되고 싶은 날이었다.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은 요즘이었다. 사소한 것 하나 쉽게 되지 않았다. 마음처럼 안 되는 게 더 많다는 걸 안다면서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침울해졌다. 우울감에 젖어 종일 자버린 날도 있었고, 아무도 모르게 눈물 흘린 날도 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철저히 혼자가 된 채 아파하다가 생각하기 시작했다. 상심하지 않기 위해, 우울하지 않기 위해, 아프지 않기 위해 고민했다. 그런다고 나를 힘들게 했던 일에 대한 해결책이 떠오르는 건 아니었다. 결론은 매번 생각과 마음가짐을 바꾸자는 것이었다. 이건 언제나 내가 내린 최선의 결론이었고, 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여러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줬다. 도돌이표처럼 아파하고, 고민하고 결국 이 결론에 도달하는 걸 무수히 반복하는 것이 인생인가 보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열심히 ‘긍정 회로’를 돌렸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나 상실로 인한 슬픔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서였다. 부정적인 감정이 들면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뭐라도 했고, 그런 감정들을 내 밖으로 흘려보내며, 적극적으로 소소한 행복을 찾았다.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은 내 안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는 사람처럼 말이다.
4년 차 과부가 된 요즘은 좀 다르다. 상심하는 일이 생기면 그로 인해 아픈 감정을 외면하거나 황급히 흘려보내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사별로 인한 아픔도 제대로 마주하고 나서부터 회복되기 시작했다.) 한동안 아파하고 괴로워하다가 결론 내린다. 마음을, 생각을 바꾸자고. 그런다고 나를 괴롭혔던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마음은 한결 평온해진다.
몸은 성장기를 거쳐 노화되지만, 마음은 죽는 날까지 성장기에 놓인 듯하다. 다 자란 줄 알았던 마음은 언제나 미숙하고, 아파한 만큼 성장하는 걸 보니 말이다.
어느덧 중년, 몸은 노화되기 시작했지만, 슬프지만은 않다. 내 마음이 얼마나 더 힙하게 성장할지 기대되기 때문이다.
들꽃처럼 살고 싶다.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자연스러운 그런 삶을 살고 싶다. 끊임없는 마음 성장기를 거치다 보면, 언젠가는 들꽃처럼 살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