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러시아-우크라이나 세계문화유산

by 윤희철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시도에 따른 러시아의 위기의식으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지 3년 8개월이 다 되어 간다. 3일만에 탈환되리라 믿었던 우크라이나가 오랜 시간의 소모전을 견뎌내는 저력이 놀랍다.

그러나 긴 전쟁에 양국가간의 인적, 물적 피해는 자국은 물론 세계인들의 안타까움을 더해만 간다. 아울러 길어지는 전쟁속에 아름다운 세계문화유산이 하나 둘 소실되어가는 모습에 더욱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양국을 대표할 수 있는 건축물 한 둘을 상기해보면서 하루속히 전쟁이 종식되기를 소망해 본다.


키이우 페체르스크 수도원

우크라이나 키이우 성 미하일 황금돔 수도원(줄인것).png

우연히 검색을 하다가 멋진 풍경에 시선이 멈췄다. 그런데 그곳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 있는 페체르스크 수도원이었다. 이 아름다운 곳이 전쟁중이라니. 우크라이나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안고 그 아름다운 모습을 묘사해 보았다.

이 수도원은 키예프 동굴 수도원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수도자들이 기거하는 수많은 동굴 혹은 단독방들이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어 그렇게 불리워진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곳에는 동굴에서 수행을 하던 많은 수도사들의 미이라가 안치되어 있다. 정교회 교회당은 11세기에 콘스탄티노플(터어키 이스탄불)에 소재한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를 모방한 것으로 키예프(키이우)를 새로운 콘스탄티노플로 만들어보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한다.

왼쪽의 높은 건물이 종탑이고 가운데 양파모양의 크고 작은 돔들이 있는 곳이 교회이다.


안드레예프스키 언덕


안드레예프스키 언덕은 키이우 역사 지구에 있는 구 키예프(상부 도시)를 지칭한다. 언덕의 이름은 18세기 중반에 안드레예프스키(성 안드레) 교회가 건설되면서 유래되었다. 이 상부도시와 하부도시(포딜)을 연결하는 약 720m의 거리를 안드레예프스키 거리로 부르는데 이 도로 좌우에는 독특한 주택과 박물관 등 유명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이곳에 유명한 작곡가, 화가, 작가, 조각가, 과학자들이 많이 생활하고 있어서 ‘키이우의 몽마르뜨 언덕’으로 불리웠다. 1985년부터 이 언덕에서 다양한 예술 축제와 축하 행사가 열리면서 거리는 미술 스튜디오, 상점, 갤러리 등이 넘쳐나는 키이우의 대표적인 문화의 거리로 자리잡게 되었다.

20241018_134020.png


20251009_105457.png



모스크바 붉은 광장

붉은 광장.PNG

러시아 하면 가장 먼저 떠 오르는 곳이 수도인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일 것이다. 모스크바 중심부에 위치한 붉은 광장은 15세기말경 크렘린 궁의 성벽이 완공되면서 조성되어 오랫동안 러시아와 소련의 정치사·사회사의 구심점이 되어왔다. 붉은 광장의 명칭은 소비에트정권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크라스나야(krasnij)’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이 단어의 원 뜻은 ‘아름답다’였는데 근래에 들어 ‘붉은’으로 뜻이 바뀐 것이다.

왼쪽의 크렘린(Kremlin)은 러시아어로 ‘성채’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모스크바 강가에 있는 옛 러시아 시절에 건립된 궁전으로 현재는 대통령 관저와 정부기관, 성당 등이 둘레 2.4km 성벽 안에 자리잡고 있다.

광장의 동서 남북의 끝자락에는 랜드마크적인 건축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동쪽에는 국영백화점인 GUM이 있으며, 서쪽에는 1930년 완공된 레닌 영묘, 남쪽에는 성 바질리 성당, 그리고 북쪽에는 국립역사박물관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 이 가운데 광장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축물이 성 바질리 성당이다. 이 성당은 200여년 간 러시아를 점령했던 몽골의 카잔 칸을 몰아내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반 대제의 명령으로 지어졌다. 성당의 명칭은 이반 대제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수도사 바질리의 이름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1555년에 착공하여 1561년에 완공되었는데 9개의 양파형 돔 지붕이 다양한 색채로 묘사되어 있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그리이스 정교회 성당이다.



모스크바 강

모스크바 시내를 가로지르는 모스크바 강은 볼가강 유역에 있는 오카강의 왼쪽 지류이다. 모스크바 중앙을 가로지르며 구불구불한 곡선으로 형성되어 있다. 한강보다는 강폭이 대체로 좁으며 강남보다는 강북이 더 발달하고 번화하다. 따라서 주요 문화 유산이나 관광지는 강북쪽에 많이 모여있다. 모스크바를 관통하고 있는 강의 길이는 약 80km에 달한다. 강변에 자리하고 있는 유명지로는 크렘린 궁, 붉은 광장, 자라지예 공원, 구세주 그리스도 성당, 참새 언덕, 고리키 공원, 우크라이나 호텔, 모스크바 시티 등이 있어 약 2시간 반 가량 걸리는 모스크바 강 유람선 투어는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이다.

캡처1.PNG
캡처.PNG



상트페테르부르크 성 아이삭 성당


상트 페테르부르크.PNG

러시아 북서쪽에 위치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네바강 하구 델타지대에 형성된 자연섬과 운하로 인해 생긴 수많은 섬 위에 세워진 도시이다. 그래서 이 도시를 ‘북유럽의 베네치아’로 불린다. 이 도시는 페트로그라드, 레닌그라드로 불리우기도 하였지만 1991년에 다시 옛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 표트르 대제가 1703년 만든 이 도시는 1713년 모스크바에서 천도하여 1918년까지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다.

흑백.PNG

이 도시의 중심부에 위치한 성 아이삭 성당은 5세기에 순교한 성 아이삭(st.lsaac)을 기념하여1818년부터 58년까지 40년간에 걸쳐 지어진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다. 높이 102m, 황금색 돔의 폭이 22m나 되는 이 성당은 1만 4천명을 수용할 수 있다 한다. 성경책 한 권의 내용이 벽화와 천정화에 모두 표현되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인 레닌그라드 포위전에서 이 성당의 황금 돔이 지나치게 눈에 띄어서 독일군의 표적이 될까봐 돔을 회색으로 덧칠하였다고 한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후에는 소련 정권 아래에서 박물관으로 이용되다가 소련 정권이 붕괴된 후에는 다시 본래의 기능인 러시아 정교회로 사용되고 있다.

이 성당의 돔 전망대에 오르면 제정시대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시의 아름다운 도시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성당앞 광장 남쪽에는 니콜라스 1세(재위 1825년 ~ 1855년)의 승마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기마상과 아이삭 성당의 황금돔이 멋진 도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피의 사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피의 사원은 피흘리신 구세주 교회(Church of Our Savior on Spilled Blood)는 그리스도의 부활, 구세주의 부활을 의미하는 피가 있는 교회를 뜻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하는 동방정교회 기념관이다. 피의 사원에서 '피'는 이곳에서 암살당한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피를 가리키는 것으로 1881년 3월 황제인 알렉산드르 2세가 이곳의 창고에서 폭탄 테러에 의해 팔 하나와 두 다리가 잘려나가는 중상을 입게 된다. 궁전에서 죽고 싶다는 그의 말을 따라 신하들은 그를 궁전으로 데려갔고 결국 그는 궁전에서 사망하게 된다. 그후 알렉산드르 3세는 테러를 범한 정치범들을 혹독하게 복수를 감행하는 한편 이 성당의 건립을 명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 성당은 테러사건 2년 뒤인 1883년에 건립하기 시작하여 24년간의 공사 끝에 1907년에 완공하게 된다. “러시아 스타일”을 초안으로 만든 이 사원은 모스크바의 성 바실리 대성당과 다소 비슷하게 구현되었다. 길이 81m, 최대 수용인원은 1600명으로 러시아 건축의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다. 그러나 1907년에 완공되어 대대적인 봉헌식을 가졌지만 러시아 혁명 이후 대대적으로 약탈당해 많은 손상을 입게되었고, 그 뒤로는 창고로 사용되어왔다. 그러다 1970년 내부수리를 시작하여 27년간의 공사를 마치고 1997년에 박물관으로 재개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캡처1.PNG
캡처.PNG


전쟁의 장기화로 양국간의 피해가 형언하기 어려울 것이다. 더불어 양국간에 오랜 역사를 통해 보존해 내려오던 세계유산의 피해도 불가피해 보인다. 하루 속히 전쟁이 종식되어 우크라이나, 러사아 양국간 더 이상의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지혜가 절실하다. 아름답고 유서깊은 양국간의 세계문화유산이 이 위기를 극복하고 후대에 잘 전달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keyword
월, 일 연재
이전 11화옥스퍼드 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