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살아있는 생명만이 줄 수 있는 온기
인공지능이 모든 것을 바꿔놓고 있는 이 시대에, 동물이 주는 치유가 인간에게 남겨진 마지막 기회이자 최후의 온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나는 심리상담, 라이프코칭, 멘탈케어, 명상 치유 분야에서 11년 넘게 활동해오고 있지만, 요즘 현장에서 느끼는 위기감은 예전과는 결이 다르다.
냉정하게 말해 '기능적인 측면'에서 상담은 이제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잘하는 시대가 되었다.
AI는 상담가처럼 기복이 있지도 않고, 내담자를 향한 불필요한 전이 감정도 없으며, 훨씬 더 인내심 있게 방대한 데이터를 뒤져 가장 적절하고 멋진 위로의 멘트를 찾아낸다.
기존의 권위와 지식에 의존하던 전문가들은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이 테라피 영역에서도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 완벽한 기술의 시대에 인간이, 혹은 살아있는 생명만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결국 '체온'이라고 본다.
물론 기술이 더 발전하면 실리콘 피부와 정교한 발열 장치로 로봇도 사람과 비슷한 체온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체온은 물리적 온도를 넘어선 에너지를 말한다.
살아있는 몸체, 생명을 가진 존재만이 뿜어낼 수 있는 고유의 진동과 파장 말이다.
사람 자체가 맑고 투명하면 그에게서는 흔히 아우라라고 부르는 맑은 에너지 장이 형성되고, 아이들이나 동물 같은 순수한 존재들은 본능적으로 그 기운을 알아보고 다가온다.
하지만 세상이 점점 더 경쟁과 욕망으로 혼탁해지면서, 그런 맑은 에너지를 지키며 사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사람에게서 더 이상 순수한 위로와 에너지를 기대하기 어려워진 현대인들은, 그래서 본능적으로 동물을 찾는다.
오염되지 않은 눈빛과 계산 없는 체온을 가진 반려동물에게 기대는 것은 어찌 보면 필연적인 생존 본능일 것이다.
반려동물을 한 번이라도 진심으로 키워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 작은 생명체가 주는 치유의 힘이 얼마나 거대한지를..
감히 인간끼리는 주고받기 힘든 무조건적인 신뢰, 나를 바라보는 그 절대적인 눈빛, 그리고 살을 맞대고 있을 때 전해지는 그 따뜻한 연결감은 인간의 무의식 가장 깊은 곳을 어루만진다.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사람이 더 오래 산다는 연구 결과는 단순히 산책을 더 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나를 절대적으로 주목해주는 존재와의 연결감 속에서 외로움이라는 질병을 이겨내기 때문일 것이다.
이 관계성 속에서 동물은 인간의 가장 투명한 거울이 된다. '개는 주인을 닮는다'라는 말은 단순히 외모나 성격을 말하는 게 아니다.
반려동물에게 보호자는 생존과 정서의 모든 것을 의존해야 하는 우주 그 자체다. 그렇기 때문에 동물은 보호자의 에너지 진동을 저항 없이 그대로 흡수한다.
내가 불안하면 개도 불안하고, 내가 화가 나 있으면 고양이도 긴장한다. 동물의 상태는 곧 보호자 내면의 현주소다. 그렇기에 동물과 함께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고 체크해야 하는 수행의 과정과도 같다.
문제는 인간이 동물을 대하는 방식이다.
이미 우리는 공장식 축산, 무분별한 포획, 잦은 유기, 잔인한 불법 도축, 그리고 품종 개량이라는 명목하에 가해지는 반복된 교배 등 동물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혀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물들은 인간에게 기꺼이 곁을 내어준다.
하지만 나는 이 지점에서 동물매개치유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조금 더 냉철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동물에게서 치유를 받는다고 말할 때, 그것이 정말 순수한 교감인지 아니면 권력의 확인인지 구분해야 한다.
동물은 나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한다.
나의 말 한마디에 꼬리를 흔들고 배를 뒤집는 존재를 보며, 인간은 무의식적인 우월감과 통제감을 느낀다.
사회에서 치이고 무시당하던 사람이 맹견이나 대형견을 키우며 그 힘을 자신의 힘인 양 과시하고, 그들의 충성심에서 묘한 쾌감을 느끼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이것은 치유가 아니라 뒤틀린 욕망의 해소다.
내면이 건강하지 않은 사람이 동물을 키울 때, 그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 학대나 방치, 혹은 도구화로 변질되기 쉽다.
결국 동물을 대하는 태도는 그 사람 인격의 가장 적나라한 민낯이다.
또한 동물은 말을 하지 않는다.
개가 꼬리를 치고, 말이 숨을 내뿜고, 고양이가 앞발을 들 때, 우리는 얘가 지금 기분이 좋구나 혹은 나를 위로하는구나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그 해석의 주체는 결국 인간이다.
그 해석에는 인간의 바람과 오해, 그리고 지식의 한계가 뒤섞여 있다.
동물의 행동을 내 식대로 해석하고 그것을 교감이라 믿는 것은 위험하다.
따라서 동물을 매개로 누군가를 치유하겠다고 나서는 전문가는 고도로 깨어 있어야 한다.
내가 지금 동물의 언어를 읽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나의 투사를 덮어씌우고 있는 것인지를 끊임없이 성찰할 수 있는 성숙한 의식이 없다면, 동물매개치유는 또 다른 폭력이 될 수도 있다.
동물매개치유가 산업적으로 주목받으면서 우려되는 점도 바로 이것이다.
홀스 테라피, 독 테라피라는 이름으로 또다시 동물을 수단화하고 상품화하려는 시도들이 보인다.
치유를 하겠답시고 동물을 어디선가 사 오고, 훈련시키고, 프로그램에 투입하는 방식은 우리가 지향하는 치유가 아니다.
진정한 치유는 동물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 문화 속에 사람이 초대될 때 일어난다.
우리가 제주도 바닷가 앞 명상 공간을 운영할 때, 그곳에는 우리와 오랜 시간 함께 명상하고 뒹굴며 자란 반려견들이 상주했다.
치유를 위해 온 사람들이 경직된 마음을 풀지 못할 때, 꼬리를 흔들며 다가가는 이 아이들의 존재는 그 어떤 아이스브레이킹보다 강력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무장해제시킨다.
억지로 훈련된 테라피견이 아니라, 그저 사랑받고 자라 편안한 에너지를 가진 생명체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치유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말 산업도 마찬가지다.
현재 한국의 말 산업은 경마 위주로 돌아간다. 베팅과 수익을 위해 말이 도구로 쓰이고 소모되는 구조는 동물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가슴 아픈 현실이다.
하지만 그 수익금이 다시 농촌 기금과 세금으로 쓰이고 우리 사회를 돌리는 일부가 된다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우리가 그 구조 속에서 풍요를 누렸다면, 이제는 그들의 희생을 외면하지 말고 다시 그들을 보호하고 살리는 방향으로 시스템을 개선해 나가야 한다.
거창한 구호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일상에서 만나는 작은 생명 하나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결국 동물매개치유 사업을 하려는 사람은, 돈이 될 것 같아서 혹은 동물이 귀여워서 뛰어들어서는 안 된다.
동물은 인형이 아니다.
먹이고, 똥을 치우고, 아프면 돌봐야 하는 고단한 현실의 존재다.
동물을 통한 자신의 감정적 만족감이 사랑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절대 이 업을 해서는 안 된다.
이 영역에 필요한 사람은 '생명 감수성'이 있는 사람이다.
말하지 못하는 존재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고, 그들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언어로 다 할 수 없는 에너지적 교감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또한 자신의 건강한 라이프스타일 속에 동물을 동반자로 받아들이고, 그 삶의 방식으로 타인을 초대해 그들도 살아있는 존재와 연결될 때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만이 이 치유의 장을 열 자격이 있다.
지자체나 정부도 동물매개치유를 단순히 관광 상품이나 보여주기식 전시 행정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동물을 전시하고 도구화하는 시대착오적인 발상 대신, 유기된 동물들을 구조하고 그들의 상처를 먼저 치유하는 시스템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상처 입은 동물이 회복되어 사람을 치유하고, 치유받은 사람이 다시 동물을 보호하는 선순환 구조. 그것이 우리가 가야 할 동물매개치유의 미래다.
인공지능은 흉내 낼 수 없는 그 따뜻한 체온, 살아있는 것만이 줄 수 있는 그 묵직한 위로. 어쩌면 동물들은 우리가 잃어버린 인간성을 되찾아주기 위해 우리 곁에 머물고 있는지도 모른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결국 나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이어지는 것, 그것이 동물매개치유의 본질이자 우리가 지향해야 할 마지막 치유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