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별하지않는다 #책 #소설 #문학동네
올림픽 경기에서 세계 신기록을 수립한 선수가 자신이 세운 기록을 넘어서는 경우는 정말 드문 일이다.
문학사에서도 자신이 발표한 작품의 성취를 뛰어넘는 작품을 쓰는 작가는 드물다. 더 나아간 성취는 고사하고 다작을 하는 경우도 드문데 마르지 않는 샘처럼 작품을 길어 올리던 작가들이 어느 순간 단 한 문장도
쓸 수 없는 순간을 맞이하는 경우는 그 알려진 사례가 상당하다.
나의 빈약한 독서의 경험으로 거칠게 유추해보건대 아마도 그건 대부분의 작가들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주된 동력으로 이야기의 서사(흐름)를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본다. 기껏 몇 개 되지 않는 음계와 음표로 그 오랜 시간 새로움을 추구해 온 음악과 마찬가지로 인류의 역사를 비춰볼 때 이제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가 과연 존재할까 싶은 상황에서 매번 전작과는 다른 소재의 이야기(글감)를 찾아내는 것은
천만 관객의 영화를 만든 감독이 두 번째, 세 번째 만든 작품도 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경우의 확률과 동일하지 않을까?
내가 작가 한강을 처음 접한 건 2005년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수록된 그의 단편소설 [몽고반점]을 읽었을 때였다. 군더더기 없는 담백한 문장에 깃든 내용의 무게가 상당해서 읽는 내내 기묘한 거부감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이후 그의 작품 [검은 사슴]과 [희랍어 시간], [바람이 분다, 가라]를 읽으며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하나의 방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미개척 항로를 항해하는 배처럼 위협적인 폭풍과 암초가 난무하는 바다를 향해 항해를 포기하지 않는 흡사 허먼 멜빌의 작품 [모비딕]에서 목숨을 걸고 고래를 찾아 나선 에이헤브 선장의 맹목적 신앙과도 같은 의지가 그의 작품 속 문장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문장의 항해를 통해 한강은
어디로 나아가고자 했던 것일까?
화선지에 떨어진 먹물 한 점이 화선지의 결 사이로 파고들어 먹물이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건 단지 잘못 떨어진 먹물 한 방울에 머물 것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나아가 어떤 무늬를 만들어낸다면 그건 우연의 산물일이지라도 그 나아감의 행위를 통해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읽은 한강의 문장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암반층에 뿌리를 내린 나무가 뿌리 끝이 암반에 맞닿았을 때 더 이상 뿌리 뻗기를 포기한다면 그 나무는 그대로 고사목이 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어딘가 존재할 물길을 찾아 뿌리가 암반에 긁혀 생채기가 나고 부러질지언정 계속 나아간다면 그 나무는 언젠가 꽃과 열매를 맺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을 꿨어. 꿈에 보니 난 이미 죽어 있더구나.
얼마나 홀가분했는지 몰라.
햇볕을 받으면서 겅중겅중 개울가를 뛰어갔지.
시냇물을 들여다봤더니 바닥이 투명하게 보일 만큼 맑은데,
돌들이 보였어. 눈동자처럼 말갛게 씻긴.....
동그란 조약돌들이었어.
그중에서 파란 빛이 도는 돌을 주우려고
손을 뻗었지. 그때 갑자기 안 거야. 그걸 주우려면 살아야 한다는 걸.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걸.」 p342-344 『바람이 분다, 가라』
「 수유리의 우리 집 기억하니.
~새벽에 깨어서 거실로 나오면 모든 가구들이
푸른 헝겊에 싸여 있는 것 같았지.
파르스름한 실들이 쉴 새 없이 뽑아져 나와
싸늘한 공기를 그득 채우는 것 같은 광경을,
내복 바람으로 넋 없이 바라보고 서 있곤 했어.
마치 황홀한 환각 같던 그 광경이 약한 시력 때문이었다는 걸
그땐 알지 못했지. 」73 『희랍어시간』
[ 거기 담긴 나의 사 년은 껍데기에서 몸을 꺼내
칼날 위를 전진하는 달팽이 같은 무엇이었을 것이다.
살고 싶어 하는 몸. 움푹 찔리고 베이는 몸. 뿌리치고 껴안고 매달리는 몸.
무릎 꿇는 몸. 애원하는 몸.
피인지 진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끝없이 새어 나오는 몸. ] p12~13
한강의 문장은 언제나 현실이라는 암반 속에서도 근원적인 ‘우리’(人間愛)를 향해 나아간다. 그의 전작 [검은 사슴]에서 ‘검은 사슴’은 살아생전 동굴을 빠져나가 햇빛 한 번을 보겠다는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인간에게 속아 모든 것을 빼앗긴 채 어두운 동굴 속을 울며 헤매다 쪼그라들어 죽고 말았지만 현실이라는 참혹한 동굴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이리 찧고 저리 찧으면서도 끝내 나아감을 포기하지 않는 그의 작중 인물들을 지켜보는 것은 읽는 입장에서도 피가 마르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나는 한강의 문장을 읽는 것에 매번 고통을 느낀다. 마라톤의 과정에서 부상까지 입은 선수의 고군분투를 보는 듯해서 매번 그의 작품 앞에서 머뭇거리게 되지만 그래도 그의 문장 속 인물들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에 나는 또 그의 작품에 다시 다가가게 된다.
흔히들 소설문학의 특징을 추체험에서 찾는다. 문학에서 추체험은 있을 법한 이야기에 대한 간접체험을 의미하는데 작품 속 인물들이 겪는 사건들을 통해 나는 그런 일을 겪지 않았지만 독서를 통해 어떠한 감수성을 느끼게 되는 과정을 말한다. 한때 유명했던 드라마 <다모>에서 이서진이 하지원에게 했던 대사 “아프냐, 나도 아프다.”와 같은 공감이 바로 추체험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겠다.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흰 것들을 건넬게.
더 이상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게.
이 삶을 당신에게 건네어도 괜찮을지. 」[흰] p39
[ 물은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고 순환하지 않나.
그렇다면 인선이 맞으며 자란 눈송이가
지금 내 얼굴에 떨어지는 눈송이가 아니란 법이 없다.
인선의 어머니가 보았다던 학교 운동장의 사람들이 이어 떠올라
나는 무릎을 안고 있던 팔을 푼다.
무딘 콧날과 눈꺼풀에 쌓인 눈을 닦아낸다.
그들의 얼굴에 쌓였던 눈과 지금 내 손에 묻은 눈이 같은 것이 아니란 법이 없다. ] p133
한강의 전작 [흰]에서 ‘흰’으로 상징되는 문장으로 표현해내기 어려운 인간의 감정을 문장에 실어 그것이 눈처럼 읽는 이의 가슴에 녹아들기를 바랬던 그의 바람은 그의 최신작 [작별하지 않는다]를 통해 이루어졌다. [흰]을 통해 시도되었던 타인(인간들)과의 연결 가능성에 대한 문학적 방법론이 바로 [작별하지 않는다]이기 때문이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목공 작업 도중 손가락이 잘린 인선은 자신의 친구 경하에게 자신의 제주도 집에 있는 앵무새 아미를 돌봐 줄 것을 부탁한다. 친구의 부탁으로 갑작스럽게 제주도에 가게 된 경하는 비행기가 폭설을 뚫고 공항에는 도착했지만 산간오지에 있는 인선의 집으로 가는 길에 그녀는 핸드폰도 길도 잃어버린 채 눈 속에 고립되었다가 겨우 인선의 집을 찾아갔지만 이미 앵무새 아미는 죽은 후였다. 인선의 집에 도착한 경하는 통나무를 검게 물들여 세운 뒤 그 나무들 위로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찍는 건 어떻겠냐는 자신의 말을 구체적으로 혼자서 실행해갔던 인선의 작업물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녀는 이제 구분되지 않는 어둠과 눈 속에서 실제인지 혼백인지 알 수 없는 인선과 얘기를 나누고 죽음의 극한에 맞닿은 그 순간에 들려오는 제주 4.3 때 죽은 수십만 명의 겹쳐진 목소리와 4.3 때 끌려가 억울하게 고문당하고 감옥살이를 하다 몸과 정신을 잃어버린 인선의 아버지의 삶과 4.3 당시 학살당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오빠를 한 평생 찾아다닌 인선의 어머니의 삶이 서로 경계를 허물고 자신과 그 모든 우리가 하나임을 확인하게 된다. 바로 그 순간 나 또한 독자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가 꿈에서 보았던 나무와 바다를 실제로 만들어내려던 인선의 작업이 제주 4.3의 억울한 영혼들을 달래기 위한 독일의 홀로코스트와 같은 메모리얼 센터에서의 진혼 제과 같은 것이었음을 경하가 깨닫는 순간 그녀가 그 깨달음을 위해 겪여야 했던 그 모든 고통스러웠던 과정이 [작별하지 않는다]라는 책 한 권을 낳게 되었으니 말로 건져 올려지지 않는 고통을 문장으로 길어 올린 한강이 결국 작중 인물 경하와 인선이고 또 그 모든 돌아가신 4.3의 희생자임을 다시 확인하는 순간 작가 한강이 이 작품이 극진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기를 바란다는 말을 왜 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부처가 싯다르타가 되기 위해 겪었던 고행과 작중 인물 경하와 인선이 겪는 고통은 결국 궁극의 신성(부처에게는 해탈이고 작가 한강에게는 ‘우리’)을 향한다는 점에서 닮은꼴이다. 문학적 고행을 통한 신성의 발현(스티그마타)이 바로 [작별하지 않는다]이다.
[작별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처럼 이 작품은 문학적 추체험을 넘어선 ‘우리’라는 직접 체험의 영역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내가 직접 겪지 않았던 역사지만 4.3은 인선의 잘려서 접합된 손가락처럼 인선이 삼분에 한 번씩 상처부위를 바늘로 찔러 신경이 죽는 것을 막으려 했던 것처럼 이미 잘렸으니 포기해버린 손가락이 아니라 잊지 않고 더 많은 사람(우리)이 작별하지 않고 함께 해야 할 사실인 것이다. 붙여 놓은 손가락을 삼분에 한 번씩 찔러야 하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손가락(4.3)을 포기해버리는 것은 당장의 고통은 피할 수 있겠지만 결국 평생을 환지통에 시달려야 한다는 인선의 목소리가 이 책을 읽고 난 후 일주일 내내 귓가에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