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필요해.

15화. 그녀의 향기.

by 묭롶

잠자리에 들기 전 샤워를 한 민정이 딸아이 별아의 베이비로션을 펌핑해서 몸에 바르기 시작했다.

안방 침대에 누워 하루동안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쉴 새 없이 그녀에게 들려주던 별아는 안방 문을 열고 서준이 들어오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아빠. 근데 엄마는 왜 베이비로션 써?"


딸아이의 말에 서준이 웃으며 아이의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내리 쓰다듬었다.


"엄마, 피부가 약해서 어른 거는 못써."


'하긴 그땐 향수를 특이한 걸 쓰는 줄로만 알았지. 설마 베이비로션 향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




민정의 송별회 자리에서 필름이 끊겨 다음날 아침 낯선 모텔에서 눈을 뜬 서준은 한참 동안 비몽사몽이었다.

어쨌든 출근은 해야 했던 그는 정신도 차릴 겸 오랜 시간 아침샤워를 했고 옷을 입고 모텔방을 나서려던 그의

눈에 침대 옆에 떨어져 있는 스카프가 보였다. 출근 시간이 촉박했던 그는 우선 스카프를 주워 들고 회사로 향했다. 정신없이 회사에서 하루를 보내고 퇴근해서 집에 도착한 뒤에야 가방에 넣어둔 스카프가 떠오른 그가 자신의 방 침대에 걸터앉아 스카프를 천천히 살펴보다 코에 가져다 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스카프에서는 강하지 않지만 아련하게 친숙한 향기가 풍겨 나왔다. 그 스카프를 어디선가 본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자신의 손으로 그 것을 풀었을 때 코끝으로 밀려들던 향기와 그의 눈에 들어온 하얀 목덜미가 떠올랐다. 그 순간 깜짝 놀라 스카프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벌떡 일어선 서준의 머릿속에 팀장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한팀장 스카프잖아. 그런데 그게 왜?'


서준은 너무 혼란스럽고 당혹스러웠으며 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당장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그는 우선 시간을 갖고 사태를 어찌할지 기회를 살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그다음 날부터 회사에 출근한 서준은 어딘가에서 그 향이 맡아질 것만 같아서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는 일이 잦아졌다. 더 신기했던 것은 그렇게 둘러볼 때마다 그 향기의 주인의 부재를 새삼

인식하게 될 때면 그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는 점이다. 서준은 그런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책상에서 과거 여자친구와 찍은 사진액자가 사라진 뒤 아이피생명에서 그래도 내노라하는 인기녀들이 그에게 여러 번 대시를 해왔지만 그는 그중 누구도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마음이 허할 때면

습관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또 이내 한숨을 내쉬고는 업무를 하고는 했다.

그러다 송별회로부터 두 달쯤이 지난 뒤 그런 감정의 정체를 알고 싶었던 서준은 드라이 세탁해 놓은 스카프를 포장한 쇼핑백을 들고 퇴근 후 한팀장이 근무하는 특별팀 사무실로 찾아갔다.

하지만 특별팀 전원은 이미 그날 아침 싱가포르로 출국한 뒤여서 그는 그녀를 만나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 했다.




싱가포르 경찰청으로부터 미셀의 체포와 송환에 대한 허가 공문이 도착함과 동시에 민정을 주축으로 한 특별팀 전원은 싱가포르로 급파되었다. 민정은 출국 하루 전 회수해 올 다이아몬드의 입국 관련 준비서류를 미리 체크했다. 특별팀이 싱가포르 경찰과 함께 미셀의 은신처에 들이닥쳤을 때 미셀은 거실에서 와인을 마시던 중이었다. 경찰이 지렛대로 현관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소리에 놀란 미셀은 겁에 질린 채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경찰이 미셀의 신원을 확보하는 동안 특별팀 팀원들은 다이아몬드의 행방을 찾아 집안 곳곳을 살폈다.


'도망자 신세니 분명 대여금고를 이용하진 못했을 테고 자신에게서 가장 가까운 곳에 숨겼을 거야.'


민정은 미셀이 사용하는 안방으로 들어가 침대 매트리스의 커버를 벗기고 매트리스를 뒤집었다. 주방에 들어가 칼과 가위를 가져온 그녀는 매트리스 모서리에 칼을 박아서 틈을 내고는 가위로 잘라내기 시작했다.

매트리스에 사람이 누우면 머리 쪽에 해당되는 부분에 자물쇠로 잠긴 네모난 공간이 발견되었다. 거실로 걸어 나와 미셀에게 다가간 그녀가 미셀을 위아래로 살피다가 그녀가 걸고 있는 목걸이를 잡아채어 손에 쥐었다. 긴 목걸이 줄에 걸려 미셀의 배꼽 부근에 감춰져 있던 열쇠가 민정의 손에 들어갔고 안방으로 뛰어들어가 열쇠로 자물쇠를 열자 그 안에 있던 007 가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민정이 007 가방을 들고 안방에서 거실로 걸어 나오자 싱가포르 경찰에게 제압되어 있던 미셀이 울부짖으며 와인 안주로 놓여있던 치즈 쟁반에 올려진 나이프를 들고 민정을 향해 휘둘렸다. 미셀이 달려드는 순간 무심결에 뒤로 물러서 넘어진 민정은 미셀이 휘두른 칼에 어깨를 스치고 말았다.


놀란 싱가포르 경찰이 다급히 미셀을 제압하는 동안 민정은 한쪽 손은 가방을 든 채로 피가 흐르는 어깨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팀장님.. 구급차 부를까요."


"아니에요. 급한 일부터 처리하죠."


급한 대로 스카프로 팀원에게 어깨를 묶어달라고 부탁한 민정이 제압당해 의자에 앉아 있는 미셀에게 다가갔다.


"죄가 부족해서 살인미수 하나 더 보태려고요?

클라라는 어쩌려고 그래요?"


민정의 입에서 '클라라'라는 말이 나옴과 동시에 미셀은 덜덜 떨기 시작했다.


"첨에 저는 조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딸이더군요.

당신에겐 선택지가 두 개 있어요.

첫 번째, 미국법으로 처벌받아서 살아생전에 클라라를 보지 못한다.

두 번째, 한국법으로 처벌받아서 형을 살고 나오면 클라라를 볼 수 있다."


-"클라라는 알면 안 돼.. 악... 클라라는 안돼."


"당신이 여기 확인서에 서명을 하고 가방의 비밀번호를 알려 준다면 아이피생명은 기꺼이

당신을 한국으로 데려가겠어요. 거절한다면 당신은 미국행 비행기를 타야겠죠.

그럼 다음은 당신이 아는 그대로예요.

또 한 가지 벌써 UWC에 클라라 학비를 선금으로 6억을 고등학교 분까지 입금했던데

그건 손대지 않기로 약속하죠."


클라라 라는 가장 큰 약점이 노출된 미셀은 자신이 서명하지 않으면 절대 아이피생명의 소유가 될 수 없는

다이아몬드의 장물 확인서에 떨리는 손으로 직접 서명을 했다. 서명지와 다이아몬드를 확보한 민정은 한시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부사장에게 직접 보고를 한 민정은 그 즉시 귀국 비행 편과 다이아몬드 세관 신고를 위한 법적 서류등을 의논했고 미셀과 특별팀은 바로 다음날 귀국길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