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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묭롶 Mar 24. 2024

99번의 환생.

3화. 연쇄적 죽음.

병조판서인 배재학 대감은 사는 동안 갖고 싶은 것을 손에 넣지 못한 적이 없었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명왕이 즉위한 뒤 평안도 무신이었던 배재학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감행할 때 행동을 함께 함으로써 조선 건국 이후 개국공신의 지위를 획득했다.  그는 사는 동안 항상 자신의 이익을 위한 쪽을 택했고 그런 그의

선택은 그에게 부와 권력을 가져다주었다.  그런 배대감의 눈에 꽃님이가 들어왔을 때 그는 단번에 그녀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안채에 돌아오자마자 장집사를 불러들인 그는 행랑채의 꽃님이를 자신의

소실로 들이겠다고 말했다.  그의 저택에서 그의 말은 곧 법이었다.  


장집사로부터 주인의 명을 전해 들은 행랑아범은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항명은 곧 죽음인 상황에서 그는 곧바로 장집사와 함께 꽃님이가 있는 행랑채로 향했다.   행랑채 울타리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들을 본 개똥 엄마는 꽃님이와 함께 빨래를 널다가 꽃님이의 손목을 붙들고 데려가는 그들을 보고는 장집사의 바짓가랑이를 다급하게 부여잡았다.  말 못 하는 개똥 어멈의 소리 없는 비명이 그녀의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그녀는 어떻게든 꽃님이를 그들로부터 떼어놓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장집사가 허리에 차고 있던 곤봉으로 개똥어멈의 머리를 내쳐친 뒤에야 어멈은 피를 흘리며 쓰러지며 잡고 있던 손을 놓쳤다.  


꽃님이는 그들의 손아귀를 벗어나 쓰러진 개똥어멈에게 다가가려고 했지만 장집사의 한마디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


-"여기서 더 하면 행랑채 식구는 다 죽는다."


순간 그녀의 눈앞에 큰돌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무하러 가느라 자리에 없는 그가 다행라고 생각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그들과 함께 중문을 거쳐 생전 처음 가보는 가장 안쪽에 위치한 안채에 도착했다.  

개똥어멈 걱정에 눈물이 앞을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꽃님이가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안채를 담당하는  장씨 어멈이 준비해 온 옷보따리를 그녀 앞에 풀어놓았다.  


-"곱지.  넌 이제부터 팔자 핀거야.

  우리 같은 놈의 팔자, 배 부르고 등 뜨시면 그게 최고지.

  딴맘 먹지 말고 대감마님 잘 모셔."




-"누이... 누이.. 나와봐... 글쎄 오늘 꿩이 걸렸어."


나무를 하러 갔다가 누이가 준 덫에 걸린 꿩을 들고 신이 나서 무거운 줄도 모르고 지게 한가득 나무를 해온

큰돌이 행랑채에 뛰어들어왔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누이의 부재였다.  다급히 지게받침으로 지게를

받쳐두고 방문을 연 그의 눈에 머리를 천으로 싸맨 개똥어멈이 보였다.  그 곁에 앉아 말이 없는 행랑아범을 본 큰돌의 눈에 불꽃이 일었다.  


-"아범.  누이 어딨어?  누이 어디 갔냐고?"


아범은 어떻게든 큰돌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우리 같은 목숨, 어디 우리 것이 있긴 했더냐.  

  네가 이러면 우린 다 죽는다.  큰돌아.."


아범으로부터 누이가 배대감의 소실로 들어간다는 소식을 들은 큰돌은 창고에서 꽃님이가 만든 연장 중 손장갑으로 연결된 낫을 양손에 끼우고는 중문을 향해 달려갔다.  그의 서슬 퍼런 기세에 질린 행랑아범은 그를

말릴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체격이 건장하고 양손에 낫으로 무장한 큰돌이었지만 그는 안채 대문에 다다르기도 전에 긴 장대를 든 스무 명 가까운 장정들에게 제압당했다.  무기를 빼앗긴 큰돌은 포박당한 채 안채 안마당으로 끌려갔다.  

높은 대청마루에 앉아 꿇어앉혀진 큰돌을 보는 배대감의 흰 수염이 노기로 바르르 떨렸다.


-"감히 내게 낫을 들이밀다니... 두말할 필요 없다.  저놈을 때려죽여라."


모두가 큰돌을 제압하고 대감 앞에 대령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 방 안에서 망연자실하던 꽃님은 바깥에서 들려오는 매타작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 방문을 열고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그녀의 눈에 말린 멍석 아래로

그녀가 직접 만들어준 짚신을 신은 큰돌의 두 발이 보였다.  순간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꽃님이 그대로 큰돌을 말은 멍석 위로 몸을 던졌다.   매타작을 하는 마름들이 뒤쪽에서 뛰어든 그녀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채 내리친 매질이 꽃님의 머리를 강타했다.  몽둥이가 그녀의 머리를 타격하는 순간 사방으로 피가 튀면서

꽃님이는 이미 정신을 잃은 큰돌의 몸 위로 쓰러졌다.  




잠이 깨지 않은 상태로 부유하는 몽유의 상태처럼 자신의 몸과 멀어져 가는 의식을 꽃님이가 느꼈을 때는

이미 사위가 어둠에 잠겨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한밤중이었다.  간간히 멀리서 들짐승들이 짖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올 뿐이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정신을 붙들어보려 했지만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간신히 자신의 몸이 큰돌과 함께 멍석에 말려 있다는 사실과 함께 큰돌의 몸이 식어가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 그녀는 어떻게든 큰돌을 살리고 싶었다.  그의 너른 등을 안고 두들기고 덫에 걸린 동물들로 그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먹일 수만 있다면....

꿩고기를 넣은 떡국을 한 솥 가득 끓여서 행랑채 식구들과 나눠먹는 상상을 하며 희미하게 미소 지은 꽃님의 몸도 빠르게 식어갔다.  




-"대감마님.... 대감마님...."


아직 기침하지 않은 대감마님을 감히 불러 깨워야 하는 장집사의 마지못한 목소리가 갈수록 작아져갔다.

오히려 작은 소리에 잠이 깬 배대감이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안방 문을 거칠게 발로 차고는 속옷차림으로 마루로 나왔다.


"대체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일이란 말이냐."


-"그게......."


배대감이 옷을 차려입고 집의 출입문까지 가마를 타고 나갔을 때 출입문 밖에는 마을 사람들 수십 명이 모여있었다.  문 앞에 있는 사람들은 겁에 질려 있었고 문 앞에는 며칠 전 그들이 매타작을 해서 내다 버린 멍석 말이가 놓여있었다.  배대감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기겁했지만 그런 모습을 아랫것들에게 보일 수가 없었기에 애써 의연한 척했다.  


"저게 왜 여기 있느냐?"


대감의 말에 마을 사람들은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중 누군가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이건 재앙이여... 변괴라고..."


한 사람의 입이 열리기 시작하자 주변 사람들이 같이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으며 장내는 혼란스러워졌다.

사태를 수습해야 했던 배대감이 장집사를 불렀다.


"멍석을 걷어라."


내키지 않았지만 주인의 명이라 눈을 질끈 감은 장집사가 멍석을 걷었을 때 그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은 걸음아 나살려라 도망가기 바빴고 배대감은 그 자리에서 혼절했다.  

멍석을 걷어내자 큰돌의 몸을 수의처럼 감싼 꽃님이의 긴 머리카락이 햇볕아래 드러났다.  



그날밤부터였다.  까무룩 겨우 잠이 든 배대감은 자신의 손에 놓인 무언가가 느껴져서 눈을 떴다.

눈을 뜬 그가 자신의 손을 쳐다봤을 때 그 손에는 긴 머리카락 한 줌이 쥐어져 있었다.  순간 기겁을 해서 비명을 지르고 발버둥을 치며 배대감은 꿈에서 깨었다.  하지만 깨어난 뒤에도 자신의 손에 놓여 있던 선뜩하고 매끄러운 머리칼이 그대로 느껴져서 배대감은 소름이 돋았다.  

날이 지날수록 배대감의 상태는 더 나빠졌고 그는 공포에 빠져 잠들지 않으려 했다.  잠이 들기만 하면 어디선가 긴 머리카락이 그의 몸을 그의 목을 옭아맬 것만 같아서 그는 너무도 무서웠다.  

그렇게 배대감은 보름을 버티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죽었다.  




큰돌과 꽃님이가 멍석말이가 돼서 산 아래 버려진 뒤 장집사의 곤봉에 머리를 다친 채 누워있던 개똥어멈도 함께 사라졌다.  개똥 어멈이 정신을 차렸을 때 행랑아범이 그들의 죽음을 알려주었고 그녀는 자신이 붙들었을 때 자신의 손에 뽑힌 꽃님이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행랑아범이 나간 틈을 타 부엌 한 구석에 놓아둔 보퉁이를 손에 쥐어든 그녀는 수선을 위해 맡아뒀던 배대감의 속옷을 보통이 속에 갈무리한 뒤 대감댁을 몰래 빠져나왔다.  


고려시대 국교가 불교였던 탓에 신을 모시는 큰 무당들은 존재를 드러낼 수 없었다.  큰 무당이었던 개똥어멈도 어쩔 수 없이 겉으로 불교를 믿지만 정적을 해치워야 했던 무신 정권 안주인의 강압에 못 이겨 멀쩡한 수명이 남은 사람에게 급살을 날렸고 그 때문에 그녀는 목소리를 잃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 딸처럼 키웠던

꽃님이를 잃은 그녀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산 중턱에 있는 동굴을 발견한 그녀는 자신의 피를 뽑아

꽃님이의 머리칼이 담긴 사발에 담고 배대감의 속곳에 그 피로 부적을 그렸다.  그리고 급살을 날린 대가를

스스로 받아들인 채 앉은자리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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