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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묭롶 Mar 24. 2024

99번의 환생.

2화. 환하고 밝아서 야속한 달빛.

-"누이... 이제 바위 치운다."


"그래.  큰돌아."


꽃님의 목소리를 들은 큰돌이 상류 개울로 이어진 수로를 막아놓은 바윗돌을 긴 나무 지렛대 삼고 밀어서 옆으로 옮긴 순간 개울에서 행랑채로 연결해 놓은 수로에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널찍하고 판판한 돌로 바닥을 깔고 옆을 큰 대나무로 막아 연결한 수로는 행랑채를 지나 아래개울까지 연결되어 있어서 우물까지 물을 길으러 갈 수고를 덜게 된 행랑채 식구들의 기쁨이 컸다.  


꽃님이가 수로를 만든다고 했을 때 행랑아범은 시간낭비라며 그 힘든 일을 뭐 하려 하냐며 핀잔을 줬지만

막상 수로가 생긴 뒤로 뒷간을 다녀오자마자 옆에 수로에서 물을 떠 손을 씻을 수 있게 된 뒤로는 마냥 흡족한 눈치였다.  꽃님이는 덫을 만드는데도 재주가 있어서 큰돌이 나무를 해올 때마다 놓은 덫으로 작은 동물들을 잡을 수 있었고 행랑채 식구들은 그녀 덕분에 인색한 주인을 뒀지만 배를 곯지는 않을 수 있었다.  


마을 대장간 주인 최 씨도 손재주가 있는 꽃님이를 탐냈지만 대감댁 노비인 그녀를 데려올 수는 없었고 그저 만들려는 연장이 생길 때면 쌀말을 챙겨 들고 그녀를 찾았다.  그렇게 꽃님이가 이곳저곳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하자 배대감댁의 노비들은 그녀를 탐했지만 그녀 앞엔 다부지게 어깨가 떡 벌어진 동생 큰돌이 있었다.  

그녀 곁에 어렵사리 다가서려고만 하면 어딘가에서 나타난 큰돌이 떡허니 그녀 앞을 막아 세우고는 눈을 부라리니 그들은 우회로로 개똥 어멈을 선택했지만 개똥이네는 언제나 들리지 않는 척 딴청을 피우곤 했다.  


방 안에서 잠을 자려다 창호지 바깥으로 환하게 비추는 달빛을 본 꽃님이는 잠이 든 개똥 어멈을 잠시 살피고는 가만히 방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그런데 마당 평상에 큰돌이 먼저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살며시 다가가 큰돌의 곁에 앉은 꽃님의 기척을 느낀 큰돌이 하늘에서 시선을 거두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안자고 나왔어?"


-"그러는 누이는?"


"그러게 달이 참 밝다."


-"누이 난 저 달이 야속혀.  밑에 있는 생명들이 죽든 말든 저리 시치미 뚝 떼고 밝디 밝은 게 서운혀.

  당장 내일 어찌 될지 모르는 버러지 보다 못한 이 목숨이 한심해서 답답해."


나이를 먹어갈수록 켜켜이 쌓인 그 많은 억울함이 당장이라도 그 건장한 몸에서 폭발하듯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꽃님은 위태로워 보이는 큰돌을 부둥켜안았다.  


"큰돌아.. 내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누이가 널 지킬게."


-"안채가 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우리가 당장 화를 피하고 있지만 오늘만 해도 안채 마름 김 씨가

  큰 도련님한테 맞아 죽었데.

  누이.. 난 너무 무서워."


처음 만날 날 엉망으로 다친 몸으로 열에 들떠 덜덜 떨던 큰돌을 밤새 보살폈던 그날처럼 꽃님이는 큰돌의

너른 등을 문지르고 또 문지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병조판서 배재학 대감의 기와집은 가장 바깥에 있는 대문 안쪽의 행랑채와 그 안쪽 중문에 기거하는 하인과 마름들의 거처 그리고 가장 안쪽 대문을 건너서야 안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안채와 가장 멀리 떨어진 행랑채는 자신들의 주인들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일은 힘들지만 상대적으로 안전했다.  어쩌면 그렇게 윗전을 못 본 체로 평생을 살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늦은 밤 기방에서 술을 거하게 마신 배대감은 기방을 나선 그때부터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가마가 바깥 대문을 통과한 순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그는 가마에서 내려 행랑채에 있는 뒷간을 찾게 되었다.  급한 볼일을 해결한 그가 뒷간 옆에 있는 수로가 신기해서

수로를 따라 꽃님이가 사는 행랑채 앞마당까지 걸어갔을 때 그는 달빛 아래 서 있는 배꽃보다 환한 꽃님이를 보고야 말았다.  배대감은 그 길로 가마를 타고 안채로 돌아가 집안일을 담당하는 장집사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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