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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묭롶 Mar 24. 2024

99번의 약속.

17화. 염라와의 약속.

장미가 밴드 샤크의 연습실에 있을 때 수련은 짱툰 편집장과의 약속에 가기 위해 버스로 이동 중이었다.  평소 잘 입지 않던 원피스에 구두를 신은 통에 평소처럼 지하철을 타지 못하고 좀 덜 걷겠다며 버스를 탄 수련은 밀리는 버스 안에서 유리창에 머리를 박고 싶었다.  자신을 노려보는 편집장의 서늘한 눈빛이 떠오른 그녀는 버스 안에서 몸서리를 쳤다.  약속 시간보다 삼십 분 늦게 약속장소인 카페에 도착한 수련은 다급히 카페의 출입문을 열고 들어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편집장을 찾았다.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뭔가에 몰두해 있는 그를 발견한 수련은  부랴부랴 그의 앞에 다급히 다가갔다.  


"편집장님, 너무 죄송해요.  많이 기다리셨죠."


그녀의 다급한 사과에 편집장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늦게 온 자신에게 개의치 않는 편집장의 태도가 의아했던 수련은 그가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는지 자세히 살펴보다가 '아'하는 소리를 내고는 편집장 바로 곁에 의자를 당겨서 붙여 앉았다.


"어머,  편집장님도 스도쿠 좋아하세요?  저 이거 정말 좋아하는데요. "


그제야 그는 눈을 빛내며 스도쿠 책에 시선이 꽂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연필로 풀어놓은 익스트림 문제의 빈 공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머릿속으로 들어갈 숫자를 유추해 보는 그녀의 모습은 창가에 비추는 여름 햇살만큼이나 밝았다.  그에게서 아예 연필과 책자까지 뺏어 들고 한참을 책을 들여다보며 씨름을 하는 그녀의 모습을 한참을 바라보던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평소 그녀가 즐겨

마시는 자몽차를 주문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밖에서는 그런 그 둘의 모습을 몰래 숨어 숨죽여 지켜보는 동방삭이 있었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내가 뭘 어떻게 하든 결국 그녀는 저 남자와 다시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내가 뭘 더 이상 어떻게 해야 바꿀 수 있는 걸까?

어쩌면 난 처음부터 잘못된 선택을 했는지도 모른다.'




죽음을 볼 수 있어서 다가오는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동방삭의 존재를 처음으로 보고받았을 때 저승을 관장하는 염라는 직감했다.  '골치 아프겠구나.'  하지만 염라의 직감과 다르게 시간이 흘러갈수록 동방삭의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한 문제로 불거졌다.  그의 존재 자체가 지금까지의 저승을 다스려온 모든 질서를 부정하는 오류가 되는 상황이었고 그로 인해 불로불사를 꿈꾸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염라는 어떻게든 동방삭을

저승으로 불러들여 소멸을 시키든 환생을 시키든 했어야 했지만 죽음을 보내도 숨어서 하루를 버티는 통에 하루라는 시간 동안 망자를 저승으로 데려가야 하는 죽음은 동방삭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염라는 날마다

새로운 죽음을 그에게 보냈지만 그때마다 동방삭은 먼저 눈치를 채고 도망간 뒤였다.  


염라는 그래서 우회책을 쓰기로 했다.  바람이 세찬 바람으로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지 못했지만 해님이 따뜻한 열기를 내리쬐어 나그네의 외투를 벗겼던 것처럼 그는 동방삭만이 들을 수 있는 전언(傳言)을 보냈다.


-'환생하는 그녀를 네가 찾고 있는 걸 알고 있다.

내가 그녀가 환생할 때마다 네가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어떻겠나?'


환생하는 그녀를 찾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했던 동방삭은 염라의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그럼 그 대가는 무엇입니까?'


'역시 말이 잘 통하는구나.  네 놈이 그녀의 목에 걸어놓은 옥염주 구슬의 개수만큼 그녀의

 환생을 찾게 해 주마.  물론 그녀가 환생할 때까지 너는 환생사진관에서 다른 이의 환생을 도와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 구슬에 이를 때까지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너는 영원히 환생사진관에 머물러야 한다.'


염라의 제안을 받아들일 때 동방삭은 자신이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그런 착각을 한다.  

다시 한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실수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하지만 이미 열 번이 넘는 그녀의 환생을 쫓는 동안 그는 매번 실패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자 동방삭은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매번 다른 이를 사랑하는 그녀를 지켜봐야 하는 것도 그에게는 지옥이었지만 그녀를 다시 보지 못한 채 영원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것은 모든 지옥을 합쳐놓은 것보다  그에게 가혹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죽인 연개휼이 내게 내린 저주요.  염라가 나를 벌하는 지옥이로구나.'


그래도 동방삭은 포기할 수 없었다. 한낮의 태양이 온 세상을 밝게 비추고 있었지만 동방삭이 있는 그곳은

어둠이었다.  그는 그 어둠 속에서 숨소리도 내지 않은 채 카페 창 너머에 함께 있는 펀집장과 수련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편집장과 카페에서 계약 관련 논의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 수련이 씻고 거실로 나왔을 때 동방삭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어머.  지금은 몸 좀 나아진 거예요?"


-"네.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그렇잖아도 전화드리려던 참이었어요.   지난번에 말씀해 주신 배경이 강원도 동강인데 제가 원래

 안 보고는 잘 못 그려서요.  다른 건 괜찮은데 풍경은 자신이 없네요.  추가로 여쭤볼 것도

좀 있고요."


-"그럼 잘 됐네요.  마침 제가 시간이 괜찮으니 저랑 같이 다녀오시면 어때요?"


"정말요.  그럼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은데요.  혹시 사진이나 그런 거 있으시면

그걸로 주셔도 돼요."


-"아니에요.  작품에는 리얼리티가 생명이죠.  제가 내일 차량 가지고 집 앞으로 갈게요."


"이 신세를 어떻게 다 갚죠."


-"그럼 내일 뵈어요."


동방삭과의 통화를 끊은 뒤 수련은 언니의 말처럼 그가 자신을 좋아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이렇게 계속

신세를 지는 게 맞는지에 대해 한참을 고민했지만 당장 연재가 발등에 떨어진 불이고 보니 그녀는 고민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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