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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묭롶 Mar 24. 2024

99번의 환생.

18화. 출발.

장미가 사무실에서 가을에 전시 예정인 동물을 주제로 한 민속화의 도록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을 때 그녀의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다.    화면에 떠 있는 '혈육'이라는 글자를 확인한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언니, 너 오늘도 늦어?"


"응. 끝나고 하드락포차에 들려야 해.  왜?"


-"그럴 것 같아서 미리 얘기하려고, 나 내일 일찍 강원도로 자료 조사 가니까 나 찾지 말라고."


"차편은?"


-"동방삭씨랑 같이 가기로 했어."


"세상에 그 사람도 정말 지극이다.  한두 시간 걸리는 길도 아니고..."


-"그니까.... 그래도 내 코가 석자인데 어떡해.  언니 네가 가줄 것도 아니고."


"아휴. 그래 알았어. 조심히 다녀와. 나도 늦으니까 기다리지 말고. "


-"어. 끊어."


전화를 끊고 다시 모니터 화면을 보는 장미의 눈에 모니터 위로 수련을 바라보던 동방삭의 얼굴이 떠올랐다.

매번 상대방을 먼저 좋아해서 마음을 주다가 상처만 받아왔던 장미는 그의 표정이 자신과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남녀상열지사는 그 누구도 어떻게 해줄 수 없는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모니터에 떠 있는 도록 카탈로그에 집중했다.  




팀원들이 모두 퇴근한 이후에도 도록 작업을 하던 장미가 손에 쥔 마우스를 놓았을 때는 이미 저녁 여덟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하던 그녀는 서둘러 노트북 전원 종료버튼을 누른 뒤 가방을 챙겨 들고 사무실 보안키를 세팅한 뒤 하드락포차로 향했다.  

그녀가 하드락포차 앞에 도착했을 때 태석은 수조에서 우럭 한 마리를 뜰채로 건져 올리는 중이었다.  힘이 좋은 우럭은 뜰채 안에서도 연신 펄떡였고 양동이 안에 옮겨 담은 뒤에도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이곳저곳에 몸을 부딪혔다.  한 손에는 뜰채를 다른 손에는 양동이를 든 채 문을 열려던 태석의 앞으로 다가간 그녀가 그가 들어갈 수 있게 문을 열어주었다.  그런 그녀를 그제야 발견한 태석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를 포차 안으로 먼저 들여보낸 그녀는 문을 닫고 들어와 빈 테이블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주방으로 들어간 태석에게서 전해 들었는지 주방에 있던 민수가 홀 쪽으로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는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은 장미는 익숙하게 물컵과 물 그리고 물티슈를 챙겨서 자리에 놓은 뒤 냉장고에서 맥주를 한 병 꺼내서 유리컵과 함께 들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그녀가 맥주를 한 컵 가득 따라서 한 잔을 마셨을 때 태석이 비빔국수 한 그릇을 들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여기요. 오늘 할 얘기가 있다고 했죠?"


국수가 자리에 놓이기가 무섭게 젓가락으로 면을 몽땅 집어서 한입 가득 넣은 장미가 그의 말에 대답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태석은 오늘도 국수를 다 먹기 전에는 대화가 힘들 것 같은 그녀를 테이블에 남겨두고 손님이 주문한 우럭탕을 서빙하기 위해 주방으로 돌아갔다.  장미가 국수 두 그릇에 맥주 한 병을 다 마셨을 때 홀 손님의 주문을 모두 처리해서 여유가 생긴 태석이 다시 그녀의 자리로 다가와 앉았다.


"점심에 국수만 팔아도 대박 날 것 같은데요.  아참 오늘 하려던 얘기가 그건 아니고요.

 제가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해봤는데요.   

혹시 태석 씨 뮤지컬 배우는 어때요?"


그녀의 제안에 태석의 표정이 굳어졌다.


-"저 혼자 살자고 그런 짓은 못해요.  애들이 기다린 시간이 얼만데요."


"그럴 줄 알았어요.  태석 씨는 절대 그렇게 못하죠.

  친구가 국립극장 공연팀장인데 이번 가을에 올릴 작품에 신인 배우를 공모한다고 해서 기회가 아까워서

  안될 줄 알면서도 말을 꺼냈네요.  미안해요."


그녀의 사과에 태석은 당황해서 급히 손사래를 쳤다.


-"장미씨가 사과할 일이 아니죠.  저 생각해서 꺼낸 말인데요."


"그래서 제가 또 생각해 봤는데요.  일단 밴드 샤크에게 가장 시급한 건 제대로 된

 공연을 하는 게 먼저지 싶어요.  지금 하고 있는 버스킹으로는 홍보효과도 없고

공연만족도도 낮으니까요."


-"저희도 그런 고민을 안 한 건 아니지만 방법이 있었어야죠."


"제가 여기저기 좀 알아봤는데 이번에 창동에 개관한 문화발전소가 공연대관 신청을 받는다고 해서요.

 신청서를 가져왔는데요.  공연기획서는 제가 작성해 볼 테니 공연 프로그램을 짜주실래요.

물론 백 퍼센트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시도는 해봐야죠."


그녀가 건네준 신청서를 손에 든 태석이 감격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일도 바쁠 텐데 저희 때문에 이렇게까지...."


"인사는 잘 되고 나서 해도 되고요.  저도 먹은 국수값은 해야죠."




다음날, 동방삭은 아침 일곱 시 정각에 수련에게 전화를 걸었다.   타블릿 가방과 언니의 사진기를 챙기고 있던 그녀가 스마트폰을 들고 베란다로 달려가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 주차된 차량의 옆에 서서 스마트 폰을 귀에 대고 있던 동방삭이 위를 올려다보며 손을 흔들었다.  베란다에 있는 수련을 욕실에서 나오던 장미가 보고

한마디를 건넸다.


"정말 지극정성이다.  내가 너라면 난 저 남자 업고 다녔다.

 맞다.  너 내 사진기 진짜 조심해.  그거 얼만지 알지?

 잘못되면 너 팔아야 해."


-"진짜.. 알았다고.. 나 간다."


언니의 말에 혀를 날름 내민 수련은 물건이 담긴 가방을 어깨에 메고는 신발을 대충 발에 끼워신고는 쏜살같이 사라졌다.  


4륜구동 SUV 차량 옆에 서 있던 동방삭은 현관문 밖으로 나오는 수련을 보자마자 달려가서 그녀의 짐을

건네받고는 뒷좌석에 챙겨 넣었다.  수련이 그의 차에 탔을 때 차 안은 테이크아웃된 커피 향으로 가득했다.  

자리에 앉은 그녀가 안전벨트를 맨 것을 확인한 동방삭은 자신도 안전벨트를 매고 기어를 P에서 D로 바꿨다.

컵홀더에 놓인 커피의 상호를 읽은 수련이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어머.. 이거 커볶 아니에요?"


-"다행히 아침에 일찍 열었더라고요.  뒤에 샌드위치도 있으니 같이 드세요."


사실 수련이 좋아하는 커피숍 커볶은 평소 아침 일곱 시에 가게를 오픈하지만 전날 그녀에게 연락을 받은 동방삭은 미리 주인에게 부탁을 했고 한 시간 일찍 문을 연 가게에서 미리 주문한 커피와 샌드위치를 사 온

그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리가 없는 그녀였다.


"완전 감동인데요.  제가 부탁해서 가는 길에 이런 건 제가 챙겨야 했는데 부끄럽네요."


-"아니에요.  수련 씨 일이라면 전 언제든 좋아요.  그럼 출발해 볼까요?"


모든 걸 다 떠나서 온전히 하루를 수련과 단둘이 보낼 생각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동방삭은 행복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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