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는 카페 통유리 창 너머로 보이는 길거리 풍경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 매일같이 은행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그녀가 퇴근 시간에 가방을 챙겨 들고 지점장실을 빠져나오자 그 모습을 본 직원들은 당황했다. 무슨 일로 이렇게 이른 시간에 퇴근을 하는 것인지 궁금증이 가득한 직원들의 얼굴을 뒤로한 채 민주는 은행 건너편에 위치한 카페를 향해 걸어갔다.
민선은 오후 여섯 시에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어디에서 만나는 게 좋을지 고민을 잠깐 했지만 저녁식사를
하기에는 떨어져 있던 이십 년이라는 시간이 만만치 않았다. 차라리 타인이라면 업무적인 성격으로라도 감내가 가능했겠지만 어찌 됐든 멀어진 혈연관계는 타인만도 못한 존재였다.
그녀는 이 모든 상황이 피로했다. 숙면을 취해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녀는 빡빡한 눈에
인공눈물을 한 방울씩 떨어뜨린 뒤 눈을 깜빡였다.
시야가 잠시동안 인공눈물로 어룽대던 그때 출입문에 달린 종이 딸랑하고 울렸다. 자연스럽게 출입문을 향한
그녀의 눈에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걸어 들어오는 민선의 모습이 보였다.
저도 모르게 한숨을 길게 내쉰 그녀의 앞에 다가온 민선이 의자를 빼내어 아이를 앉히고는 옆 자리에 자신도
앉았다.
민선에게 향했던 민주의 시선이 앉아 있는 남자아이에게 머물자 남자아이는 민선에게 묻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승호야. 여기는 엄마의 언니야. 늬 이모지."
그녀의 말에 승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민주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고는 자리에 앉았다. 난생처음 보는 이모가 신기했던지 한참을 눈을 빛내며 민주를 살피던 승호가 '아'하는 소리를 냈다.
-"엄마, 엄마. 맞다. 할무니가 명절 때마다 밥이랑 국이랑 한 그릇씩 더 떠놓았는데 그게 이모 거였어?"
-"엄마, 엄마. 근데 왜 이모는 어디 있다 이제 온 거야?"
자신의 물음에 대답이 없는 엄마가 답답했는지 아이는 엄마의 손을 잡아다가 흔들며 답을 재촉해 댔다.
난감해진 민선은 아들 손에 제 스마트폰을 쥐어주고는 아이의 어깨를 다독였다.
-"승호야. 우리 아기, 잠깐만 요 옆에 편의점에서 게임하고 있을래? 엄마가 이모랑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잠시 엄마와 민주를 돌아보며 눈치를 살핀 승호는 선선히 스마트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을 빠져나갔다. 그제야 손바닥으로 얼굴을 부벼 식은땀을 닦아낸 민선이 자신의 앞에 놓인 물컵을 들어 단숨에 물을 들이켜고는민주를 마주 보았다.
-"원래는 혼자 오려고 했는데 애가 단축수업이라 회사로 찾아왔더라고...."
"그래."
민주는 민선의 말에 남의 얘기를 듣는 듯이 무심하게 답했다.
"애도 있는데 빨리 끝내자."
'빨리 끝내자'는 말이 민주의 입에서 떨어지기 무섭게 민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꾹 참고 가져온 서류봉투에서 서류를 꺼내려던 민선이 끝내 주먹을 꽉 쥐었다. 서류봉투를 다시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민선이 민주를
노려봤다.
-"그래. 지금 우리가 더 급해서 너 찾은 건 맞는데 넌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냐?
엄마랑 나 버리고 도망간 게 넌데?"
'엄마가 그렇게 쉽게 허락할 줄은 몰랐어.'
유리창으로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방안 침대에 앉은 민주는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침대 위에 놓인 잠옷을 손에 든 민주는 잠옷을 들어 올려 코로 냄새를 맡아보았다. 그냥 놓여있을 때도 향긋한 섬유유연제의 향기를 풍기던 잠옷에서는 따스한 햇볕의 냄새도 담겨 있었다. 햇빛이라고는 들지 않던 움집 같던 독산동 집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뽀송함이 가득한 잠옷을 안아 든 민주는 왠지 마음이 뿌듯한 것도 같았다. 언제나 마르지 않는 습기로 꿉꿉한 냄새를 풍기던 옷을 입은 그녀와 짝꿍이 되기를 꺼렸던 학교 아이들의 모습이 떠오른 순간 그녀는 덜 마른빨래처럼 마음의 습기로 남은 엄마에 대한 미안함을 떨쳐낼 수 있었다.
'그래, 어차피 그곳에서 나에게 미래는 없어.'
김원장이 그녀에게 내민 미래를 선택하며 그녀의 과거와 현재로부터 도망을 친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과거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과거는 현재와 맞물려 있었다.
'엄마와 동생으로부터 도망친 뒤 미국에서 사무엘을 잃고 다시 또 도망친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민선을 앞에 두고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던 민주가 끈적하게 달라붙는 상념을 떨치듯이 눈꺼풀을 힘겹게 밀어 올려 자신 앞에 앉은 민선을 바라봤다.
'아이가 있어서니? 넌 여전히 빛나는구나. 난 이렇게 산 채로 죽어가고 있는데........'
그녀가 독산동을 탈출하기 전 이십 년 전 딱 지금의 승호만 한 나이 때의 민선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집 근처 무에타이 학원에서 거의 살곤 했던 무도복을 입은 밝게 빛나는 민선의 모습을 떠올린 그녀가
무심결에 입을 열었다.
"몇 살이니?"
빨리 끝내자더니 갑자기 아이의 나이를 묻는 민주의 모습이 어이가 없었던 민선이 피식하고 웃었다.
-"너라는 애는 그런 게 궁금할 사람이 아니잖아.
지금이라도 사람 구실이 하고 싶은 거라면 엄마나 한 번 찾아와."
민선의 말에 그녀는 눈앞이 온통 불이 꺼진 암흑처럼 막막하게 느껴졌다. 아무렇지도 않게 끝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착각이 튀어나온 돌부리처럼 그녀를 바닥에 자빠뜨린 것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떻게 민선이 내민 서류에 도장을 찍고 또 자신이 준비해 온 서류를 건네줬는지 경황이 없는 가운데 사위가 적막해져서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바깥은 어둠이 내린 뒤였다.
'그래, 이제. 된 건가.'
나를 붙들고 있는 과거의 끈을 잘라냈으니 난 이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그런데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그녀는 현기증을 느끼며 비틀거리다 다시 카페 의자에 주저앉았다.
다시 힘주어 일어서려는 그녀의 팔을 붙잡아 올리는 손길에 고개를 든 민주의 눈에 자신을 붙든 민선의 모습이 보였다.
-"나쁜 년. 버리고 갔으면 잘이나 살지."
한 손은 승호를 또 한 손은 자신을 붙든 민선을 보는 그녀의 귀에 어린 시절 민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