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는 입을 열려고 하자 목구멍 안쪽이 찢어질 것처럼 바싹 마른 탓에 침을 삼켜보려 했지만 침도 나오지 않아 마른 입술만 달싹였다. 그녀는 염치 불구하고 남자가 건네는 스트로가 꽂힌 생수병을 받아 들고 급히 스트로를 빨아들이다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는 다급히 그녀의 등을 손바닥으로 가만히 쓸어내렸다. 그렇게 서너 번가량 등을 쓸어내리자 기침이 멈췄고 남자는 다시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생수병을 손짓하며 물을 마시기를 권했다.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여러 번에 걸쳐 물을 마신 민주는 그제야 보호자 석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로 시선이 향했다. 그녀의 시선이 자신이 입고 있는 흰 티에 꽂히자 남자는 괜찮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아... 이거요. 어제 갑자기 쓰러지셔서 제가 옷을 갈아입을 새가 없었어요. 괜찮아요."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이 부여잡고 토를 했을 때도 괜찮다고 말했던 남자의 얼굴이 지금 자신의 앞에서 다시 괜찮다고 말하는 남자의 얼굴에 겹쳐 보였다.
'사무엘을 처음 만난 날 그가 내게 했던 첫 번째 말도 괜찮냐는 말이었어.'
하버드 법대 4학년 일 학기 중간고사 기간인 4월 20일 저녁 미친 듯이 지하철로 도망쳐 나와 Boston(보스턴)에서 기차로 New York Penn Station(뉴욕 Penn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 열한 시가 넘었었지.
사무엘이 있는 곳까지 어떻게 갔었는지는 지금도 기억이 나지 않아.
불 꺼진 가게 입구에서 내가 문을 두드렸을 때,
갑자기 실내에 불이 환하게 켜지면서 잠옷을 입고 나온 사무엘은 나를 가만히 쳐다봤어.
그의 눈동자에 담긴 나를 내가 멍하니 마주 보고 있을 때
그가 내게 말했지. "괜찮아요?"
대답 없는 나를 그는 말없이 문 안쪽으로 이끌었어.
그때도 난 하루반을 잠들었다 그가 끓이는 수프 냄새를 맡고 깨어났었지.'
갑자기 맹렬하게 느껴진 허기와 함께 떠오른 사무엘 생각에 민주는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 모습을 본 남자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다가 티슈를 두어 장 뽑아서 건넸다. 그러자 그녀는 봇물 터지듯이 울기 시작했고 다인실에 있던 다른 환자와 보호자들의 시선이 병상으로 집중되었다. 무슨 사연인지 모르겠지만 남자가 여자를 울린 것이 아니겠냐는 힐난 섞인 시선에 난감해진 남자가 다급히 민주를 달래려 했지만 그녀는 쉽게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엄마, 오늘은 뭐 좀 드셨어?"
선우가 병실이 들여다 보이는 출입문 창으로 들여다봤을 때 침상 위에 누운 엄마는 움직임이 없었지만 그는 출입문을 열면서 일부러 큰 소리를 냈다. 엄마의 병실에 들어설 때면 그는 매번 '어서 들어가서 엄마를 돌봐야지'라는 맘 절반 '그냥 이대로 돌아가버리고 싶다'라는 맘 절반 사이에서 망설였다. 잠깐의 갈등 끝에 매번
출입문을 열 때마다 그는 돌아서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꾸짖기라도 하듯 일부러 큰소리를 냈다.
병실에 오기 전 들른 간호사실에서 엄마의 현 상태라면 다음 주부터라도 인공급여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뒤라 그는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무거웠다.
인공급여로 인한 고통을 호스피스 병동에 있는 동안 너무 많이 봐야 했기에 그는 엄마의 남은 시간에 더 이상의 고통이 없기만을 기도해 왔었다. 그런 그의 기도에 대못처럼 내리 꽂히는 수간호사의 말에 그는 당장이라도 병동 바닥에 드러누워 발광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래봤자 엄마의 고통을 덜어줄 수도 없었기에 그는 손에 든 보온통 손잡이만 으스러지게 움켜쥐었다.
그가 병실로 들어서면서 일부러 인기척을 내고 큰 목소리를 냈건만 엄마는 여전히 미동이 없었다. 그는 습관처럼 잠든 엄마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보았다. 학교 앞에서 산 병아리가 죽기 전 내쉬던 한숨만큼이나 미약한 숨이 그의 손가락에 닿았을 때 그는 엄마가 당장이라도 그 가냘픈 숨을 놓고 떠나버릴 까 두려워 잠든 엄마의 깡마른 손을 움켜쥐었다. 한참을 그렇게 엄마의 손과 발을 주무르고 있었을 때 엄마가 힘겹게 눈을 움찔거리다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려 병상 옆에 앉은 선우를 바라봤다. 자신을 보는 엄마를 마주 본 선우는 병상 옆에 놓아둔 보온병에 담긴 물을 컵에 따른 뒤 엄마를 부축해서 안고는 물을 먹였다.
물을 한 모금 입에 머금고 있다가 겨우 넘긴 엄마가 그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한참을 그를 바라보던 엄마의 시선이 그의 흰 티에 잠시 머물다 다시 선우의 얼굴에 닿자 당황한 그가 손사래를 쳤다.
"어.. 엄마. 그런 거 아냐."
'(병원 화장실에서 대충 지웠는데, 하.. 이거 아직도 티 나나. 진짜 그런 거 아닌데.)'
당황한 선우를 바라보는 엄마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네가 말한 사람하고 잘 지내나 보구나. 다행이다."
다시 아니라고 말하려던 선우는 다행이라고 말하며 오랜만에 밝아진 엄마의 얼굴에 다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엄마는 말없이 고개 숙인 선우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아들의 손을 꾹 하고 힘주어 잡지 못하는 엄마는 그저 아들의 손 위에 얹어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다 아들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선우야.... "
"응... 엄마."
-"엄마는 우리 선우만 잘 살면 소원이 없어. 엄마가 참 미안해."
"그게 무슨 소리야. 엄마. 내 걱정하지 마. 나 엄마 말처럼 진짜 열심히 잘 사니까.
아참. 엄마.. 내가 오늘 죽을 쒔는데 기가 막혀. 이거 먹자. 응?"
그는 서둘러 죽이 담긴 보온통의 뚜껑을 열었다. 병실에 있는 수저로 죽을 통 뚜껑에 덜어 담기 시작하자 병실에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다. 적당히 식혀서 담아 온 죽이지만 수저로 휘저어 조금 더 식힌 뒤 선우는 다른 수저로 죽을 찍어 먹어서 온도를 확인한 뒤 다시 다른 수저로 죽을 떠서 엄마의 입가로 가져갔다.
입가에 놓인 수저에 담긴 죽을 보는 엄마는 욕지기가 치미는 듯 헛구역질을 했다.
항암마저 포기하고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긴 뒤에도 먹어야 하는 약과 주사제 때문에 엄마는 음식을 거의 먹을 수 없었다. 선우는 익숙하게 엄마의 등을 손바닥으로 내리 쓸었다. 헛구역질이 가라앉을 때까지 계속 내리쓰는 그의 손바닥에 도드라진 엄마의 등뼈가 쓸렸다. 절로 한숨이 나왔지만 그는 애써 웃으며 다시 수저에
죽을 떠서 엄마의 입가로 가져갔다.
'제발 한 숟갈이라도.. 엄마... 제발...'
그의 간절한 마음이 더해질수록 수저를 쥔 그의 손가락이 핏기를 잃고 하얗게 변해갔다. 그런 그의 핏기 잃은 손가락을 내려다보던 엄마의 입에서 마개라 덜 닫힌 병에서 흘러내린 음료처럼 말이 흘러나왔다.
-"한 번이라도 보고 싶구나. 네가 말한 사람. 욕심이겠지."
그 순간 선우의 눈에서 빛이 났다. 그는 엄마를 보고 밝게 웃으며 그녀에게 다시 죽을 건넸다.
"엄마. 그니까 우리 죽 먹자. 응? 오래 살아야 나 장가가는 것도 보지."
선우는 엄마를 달래서 겨우 죽 세 숟가락을 먹인 뒤 삶은 가재수건에 소금을 묻혀 엄마의 입안을 문질러 닦은 뒤 입을 헹구고 삶아서 빨은 수건으로 입가와 손을 닦은 뒤 병동 세탁실과 탕비실에서 수건과 수저 등을 정리했다. 탕비실에서 엄마가 몇 숟가락 먹지도 못한 죽을 비워서 버릴 때마다 그는 토할 때까지 울 때도 많았다.
오늘은 눈물 대신 한숨이 나왔다.
'애초에 엄마한테 거짓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
아냐.. 그 덕에 엄마가 조금은 더 버티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아니야. 아.. 말도 꺼내보기 전에 쓰러져버렸으니....
어떡하지... 엄마한테 어떻게 말하지.
아냐. 다시 어떻게든 잘 말해보자.
그런데 일단 그 사람이 깨어나야 말을 하든지 부탁을 하든지 하지... 하..
일단 그 사람 병실로 가보자.'
그는 다시 까무룩 잠이 든 엄마의 이부자리 매무새를 살핀 뒤 간호사실에 자신의 부재를 알린 후 민주가 입원해 있는 병실로 향했다.
한참을 울고 난 민주의 얼굴은 왜인지 더 밝아 보였다. 그가 내민 티슈로 눈물을 닦아 낸 그녀의 얼굴은 고인 물이 씻겨 내려간 호수처럼 맑았다. 눈만 빨갛게 토끼눈이 된 그녀가 민망한 얼굴로 그에게 사과를 건넸다.
"계속 면목이 없네요. 약속까지 해 놓고 또 이런 폐를 끼치다니요."
이번에도 다시 그녀에게 생수병을 건넨 선우가 또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에요. 그나저나 배고프시죠."
그는 서둘러 죽이 담긴 보온통의 뚜껑을 돌려 열고선 쇼핑백에 담아 온 일회용 수저로 죽을 뚜껑에 퍼 담았다.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어요."
침상에 달린 식판대 위에 흰 죽 한 그룻이 놓이자 민주는 절로 입에 침이 고였다. 입을 다물지 못하면
그대로 흘러내릴 것 같은 허기에 그녀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천천히 드세......... 요."
선우가 이 말을 채 다 끝내기도 전에 일회용 수저가 죽이 담긴 보온병의 밑바닥을 긁고 있었다.
그는 다급히 쇼핑백에서 다른 일회용 수저를 꺼내서 죽을 다시 뚜껑에 덜어 담았고 민주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죽에 꽂혀 있었다. 민주는 끝내 보온통에 담긴 죽을 다 먹고서도 입맛을 다셨다.
매번 애써 끓인 죽을 몇 숟가락 먹이지도 못하고 버리기 일쑤였던 선우는 그 모습에 눈이휘둥그레졌지만 왠지 마음이 뿌듯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