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는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의 얼굴을 말없이 한참 동안 뜯어보았다. 자신을 응시하는 그녀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탓인지 남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고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물컵이 얼굴을 가릴 방패라도 되는 양 컵 안에 담긴 물을 들이켰다.
'김선우.'
나이 37세, 분양이 망한 주상복합 1층에 부동산 사무실을 임대한 공인중개사, 틈틈이 상황이 될 때 개인 PT(퍼스널 트레이닝)를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쪽이든 저쪽이든 안정적인 수입은 기대하기 힘든 상태,
어머니가 현재 서일병원에 입원 중.
현재 민주가 남자에 대해 파악한 정보가 남자의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갔다. 자신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는 남자의 말을 들었을 때 민주의 머릿속에서는 금전에 대한 부탁이 일 번으로 짐작되었다. 물론 타인에게 금전을 부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이 남자는 그녀가 먼저 내보인 선의에 비해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원래 대인관계가 좀 힘든 편인가?
생긴 비주얼은 괜찮은데 의외로 사회성이 부족한가?'
자신보다 언뜻 보아도 이십오 센티는 커 보이는 키에 개인 PT도 믿고 맡기기에 훌륭해 보이는 체격과 선한 얼굴까지 사람에 대한 믿음이 없는 민주가 보기에도 한마디로 말해 순하고 착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가 마음을 굳혔는지 고개를 들어 민주의 눈에 자신의 진심이 들여다보이기를 바라기라도 하듯 눈에 힘을 주고 그녀를 마주 보았다.
이제야 그가 자신에게 부탁할 말을 하려나싶은 생각에 민주는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표정으로 그의 말에 집중했다. 하지만 정작 그가 한 부탁은 그녀의 짐작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저희 어머니가 많이 아프세요."
"아.. 네. 그때 제가 병원에 있을 때 말씀하셨었죠."
-"제가 어머니께 거짓말을 했어요."
'곧바로 돈 문제부터 꺼낼 줄 알았는데. 이건 무슨 얘길 하려는 거지?'
본인의 짐작과는 달리 흘러가는 이야기에 당황한 민주는 이제 남자가 무슨 부탁을 하려고 이런 말까지 하는지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제가 성공한 전문직 여성분과 교제하는 줄 알고 계세요.
어머니 마음 편하시라고 의도치 않게 꺼낸 말이었는데 일이 커져버렸어요.
그분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고 하셔서요."
말을 하던 남자는 감정이 울컥한 탓인지 말 끝에 목이 메어있었고 눈시울도 벌게졌다.
남자의 말을 듣던 민주는 남자의 부탁을 한 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제가 바로 그 성공한 전문직 여성이라는 건가요?"
민주의 말에 남자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앞에 놓인 티슈를 집어 들어 눈가를 훔친 남자가 티슈를 든 자신의 손을 맞잡고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어머니가 췌장암 말기신대 상태가 안 좋으세요.
제가 부족해서 제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마지막까지 걱정시켜 드릴 수가 없어서.. 죄송합니다."
남자의 말에 민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머. 지점장님 어제 하루 쉬시면서 무슨 일 있으셨어요?
어머. 어머.. 피부에서 광이 나네요."
일요일 저녁 늦게 정신을 차렸지만 원무과가 출근을 하는 월요일에야 퇴원수속이 가능하다는 통에 은행에 하루 휴무를 냈던 민주가 화요일에 출근했을 때 지점장실로 커피를 가져온 창구 직원인 한미소는 그녀를 보고 깜짝 놀라 호들갑을 떨었다.
아닌 게 아니라 민주 스스로 느끼기에도 오랜만에 취한 숙면과 잘 먹어서 소화도 잘된 죽 덕분인지 몸상태가 너무 좋았다. 몸 컨디션이 좋아서인지 은행 일을 하면서도 즐겁다는 생각까지 들자 민주는 이런 상태가 매일 계속된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주말에 자신을 돌봐줬던 그 남자가 떠올랐다.
자신의 얼굴이 그대로 부딪혀 가슴 부분에 자신의 립스틱 자욱이 그대로 박힌 흰 티를 입고선 자신의 등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리던 남자의 넓은 손바닥과 물을 마시는 자신을 조심스레 살피는 남자의 선한 눈동자와
죽을 앞에 놓아주고 죽통이 빌 때까지 연신 죽을 덜어주며 염려 섞인 목소리를 내던 남자의 음성이 떠오르자
그녀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벌써 두 번이나 실수했는데 부탁이 뭐든 들어줘야겠어.'
그와 다시 만날 약속을 잡기 전부터 그녀는 이미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마음을 굳혔다.
돈 얘기를 하면 얼마까지 얘길 할까 액수를 짐작하고 있던 그녀에게 남자의 부탁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차라리 돈이었다면 쉬웠을 텐데 여자친구 대행이라니.. 그것도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분에게 보여주기 위한 거짓말이라니..... 평소의 그녀라면 일도 허용치 않을 있을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이미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하루의 꿀맛 나는 가능성을 맛봐버린 그녀로서는 그의 부탁을 곧바로 거절할 수 없었다.
불과 얼마 전 아니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상태로 곧바로 죽는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태였기에 그녀는
자신에게도 그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상황이었다.
'어차피 그렇게 죽는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나였어. '
결심을 굳힌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앞에 고개 숙인 남자의 팔목을 잡자 남자가 고개를 들어 올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할게요. 그런데 저도 요구사항이 있어요."
'요구사항'이라는 말에 남자가 눈에 의문을 띈 채로 그녀를 응시했다.
"어차피 지금 하시는 일이 수입에 큰 도움이 안 되실 거예요.
차라리 저의 집 도우미를 해주시면 어떨까요.
저 아침과 저녁도 좀 해주시고요."
무리한 요구사항을 들이밀면 어떻게 하나 싶어 겁먹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집중하던 남자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정말요? 저 요리도 살림도 엄청 잘해요.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너무 감사하죠."
당장이라도 자신의 손을 덥석 잡고 감사를 전할 것 같은 남자의 반응을 지켜보던 민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도우미 비용은 매달 지급해 드릴게요. 여기 카드로는 식재료 구입하거나 필요한 물품 구매하세요."
그녀가 건넨 카드를 소중히 갈무리하며 받아 드는 남자의 얼굴을 보는 민주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