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일병원 호스피스 병동 간호사실에 앉아 환자 차트를 정리하던 수간호사는 평소처럼 병동복도를 걸어 들어오는 선우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눈인사를 하다가 그의 덩치에 가려 한걸음 뒤에서 따라 걸어오던 민주를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당황했다. 올해 초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한 후로 어머니를 곁에서 살뜰하게 챙기는 선우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수간호사가 알아본 정보로는 그에게는 교제하는 이성이 없었다.
나름 본인의 커리어에 맞는 남자를 찾느라 아직 미혼이던 수간호사는 인물과 성격은 좋지만 가정환경과 경제적 상황이 자신에 비해 너무 처지는 선우를 놓고 잠깐 고민을 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냥 보기에도 그와 사귄다는 건 지옥의 불구덩이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 될 것이 뻔하다는 생각에 그녀는 선우에게 향하는 호감을 접지도 못한 상태에서 관망 중이었는데 그의 뒤를 따라 걷는 여자를 보는 순간 못 먹는 감 찔러라도 봤어야 하나 싶은 생각에 입안에 쓴 침이 고였다.
자신을 향한 수간호사의 복잡한 시선에도 무감한 선우는 평소처럼 인사를 건넸지만 민주는 그를 향한 수간호사의 표정에서 많은 것을 읽고 있었다. 선우는 어머니가 입원해 있는 병실의 닫힌 문 앞에 다다르자 병실문에 나 있는 창문으로 병실 안을 꼼꼼히 살폈다. 그렇게 서서 한참이 지난 뒤에서야 그는 병실문을 열며 밝게 소리쳤다.
-"엄마, 엄마, 일어나 봐. 누가 왔나 봐야지."
병실 창문 너머로는 병원 입구에 조성된 작은 공원이 내려다보였다. 창을 통해 비춰 들어오는 늦여름의 열기가 병실 안을 채우고 있었고 그 햇살은 침대에 덮인 하얀 시트에 반사되었다. 햇살 탓에 유난히 희게 보이는 시트 위로 도드라진 몸피는 너무나 자그마했다. 엄마 배속에 있는 웅크리고 있는 태아처럼 연약하고 작은 존재가 병마(病魔)에 포위라도 당한 듯 움직임 없이 누워있었다.
병실에 들어선 선우는 우선 화장실에 들러서 소독제로 손을 깨끗이 씻었고 민주는 그런 그를 기다렸다가 자신도 손을 평소보다 더 꼼꼼하게 씻었다. 그는 익숙하게 침대에 누워있는 엄마의 이마에 손을 대어 온도를 확인하고는 이미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비품대 위에 가져온 보온통과 끓여서 식혀온 보온병을 올려놓았다.
민주는 모자를 쓰고 누워 있는 그의 어머니의 모습을 차마 마주 보지 못한 채 병실 창밖 풍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죄송해요. 엄마가 요즘은 깨어 있는 시간이 얼마 안 되세요."
습관처럼 엄마를 챙기느라 민주의 존재를 잊은 선우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민주의 옆모습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익숙하게 엄마의 손과 발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는 마치 엄마에게 자신의 체온을 옮겨주고 싶은 간절함이 배어 있었다. 그들이 병실에 들어온 지 이십여분 정도가 지났을 때 선우 엄마의 입에서 얕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육체에 가해지는 가혹한 고통에 비해서 너무나 약하게 흘러나오는 생존의 기척은 선우의 가슴을 매번 갈가리 찢어놓았다. 지금도 와락 구겨지는 얼굴을 안간힘을 써서 눌러 가라앉힌 선우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엄마의 귀에 말을 건넸다.
-"엄마, 계속 주무시면 보고 싶었던 사람을 못 봐."
그가 '보고 싶었던 사람'이라고 말을 했을 때 선우엄마의 미간이 펴지며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담겼다.
그가 말한 사람을 보기 위해서라도 눈을 떠야 한다는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그녀는 애써 감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엄마가 깨어나는 기색을 본 선우는 그녀의 얇은 몸피를 팔로 감싼 뒤 베개를 등 뒤에 여러 개 겹쳐서 엄마의 등을 받쳐 앉게 했다. 그런 뒤 보온병에서 물을 따라 컵에 담은 뒤 엄마의 입가에 물컵을 가져다 대었다.
그런 그를 지켜보던 민주는 자신을 지켜보던 엄마의 아무 희망도 믿음도 느껴지지 않던 막막한 검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땐 왠지 그 눈동자가 끝이 없는 무저갱만 같아서 그 시선을 아니 엄마로부터 탈출하고 싶었다. 아니 실제로 탈출했다.
'이 남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이 이 상황에서 탈출하고 싶었을까?'
민주는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과거의 그날처럼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엄마의 작은 기척에 무너지던 선우의 표정이 떠올라서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자신 앞에 중학교 일 학년 때 엄마를 버리던 그 시절 열네 살의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아 혼란스러운 그때 자신을 응시하는 시선을 느낀 민주는 그제야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인형 같아.'
덩치가 큰 편인 선우가 옆에 있어서인지 너무나 작아 보이는 선우엄마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민주는 그 눈동자 속에서 빛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엄마의 무저갱 같은 눈동자가 싫어서 엄마를 버렸는데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선우엄마의 눈동자엔 빛이 담겨있었다. 그 빛이 바로 자신으로 인해서라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은 민주는 여동생 민선의 눈동자에 담겨 빛나던 그 빛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선우엄마의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그 옆에 있는 선우라는 남자의 눈을 바라봤다. 그 남자의 간절한 눈빛을 본 민주는 어디선가 쿵하고 뭔가가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마음이 너무 복잡하고 머리가 혼란스러웠지만 그녀는 선우엄마의 눈동자에 담긴 빛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내 보호자용 의자에서 일어선 민주는 선우엄마를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건네며 그녀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한민주라고 합니다."
그런 그녀를 보는 선우엄마의 얼굴에 환한 빛이 번졌다. 그녀를 향해 손을 뻗고 싶지만 마음대로 들어 올려지지 않는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는 그녀에게 다가간 민주가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더 일찍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우리 선우,..... 잘 부탁해요."
호흡이 가쁜 숨 사이로 가느다랗게 겨우겨우 나오는 목소리는 아들에 대한 당부였다. 그 곁에 서 있는 아들은 뒤돌아서있었지만 감정을 수습하기가 힘들어 보였다. 애써 추스른 티가 나는데도 보온병을 열어 싸 온 흰 죽을 용기에 덜어 뜨기 시작한 선우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엄마, 그렇게 보고 싶었던 사람도 봤으니 오늘은 조금 더 드셔야지."
-"오늘 너무 감사해요. 그리고 죄송해요."
병원 현관 로비까지 배웅을 나온 선우가 민주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민주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이 앞에서 얘기 좀 하죠."
민주는 매일밤 엄마 곁을 지켜야 해서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야 하는 선우를 병원 앞에 위치한 편의점으로 데려갔다. 냉장고에서 캔맥주와 과일주스를 꺼내 든 그녀는 편의점 앞에 있는 간이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가 건네준 과일주스를 받아 든 선우는 말이 없었고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 그녀는 캔맥주의 따개를 땄다. 잠시동안 아무 말하지 않던 그녀는 캔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고는 한숨을 쉰 다음 맞은편에 앉은 선우를 한참을 바라봤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 한참을 그를 보던 민주가 캔맥주를 테이블 위에 탁 소리가 나게 올려놓은 뒤 입을 열었다.
"아너팰리스부터 얘기해 보죠."
-"네? 아. 제 사무실 말씀인가요?"
"네. 제가 보기엔 그게 제일 급해요. 어머니 상황으로 봐선 그쪽으론 전혀 신경 못 쓸 것 같아서요."
그때 은행 왔을 때 제가 '아너팰리스'만 보고도 걱정이 많았는데.....
그래서도 이 얘긴 다시 빨리 해야 했는데 오늘 어머님 뵙고 나니
당장 급한 것 같네요."
다급하고 단호하게 말을 꺼내는 그녀의 태도에 놀란 선우는 가슴이 벌렁거렸다. 엄마 때문에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엄마를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기기 위해 살던 집을 팔면서 남은 돈을 전부 끌어다가 계약한 곳이 아너팰리스 상가였다. 주변 사람들의 성화에 피도 급하게 오천이나 주고 잡았는데 엄마 때문에도 그렇고 여러 가지 상황으로 월 임대료만 달에 백오십씩 들어가는 통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을 민주가 언급하자 뭔가 큰일이 생긴 것만 같아서 선우는 머리가 하얘졌다.
-"보증금 일억 오천에 권리금도 오천이나 줬는데요. 거기 무슨 일 있나요?"
민주는 자신을 향한 다급한 시선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제 정보로는 거기 곧 유치권 행사 들어갈 거예요. 지금 언제 터뜨리나 시기를 보는 것 같은데요."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취득한 선우는 '유치권 행사'라는 말을 듣고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찌 보면
지금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이 걸린 내용이어서 그는 높은 곳에서 떨어져 맨바닥에 부딪히는 것만 같은 타격감 마저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