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앞에 서 있는 청원경찰의 안내를 받은 오십 대 중반의 남자가 지점장실로 들어오는 것을 본 민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에게 의자를 권했다. 이내 명함 지갑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어 정중히 건낸 민주가 자리에
앉자 지점 직원이 준비해 온 차를 대표와 그녀 앞에 놓아주고는 지점장실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단정한 정장 차림에 손수건을 꼭 챙겨 들고 다닐 것 같은 꼼꼼함과 조심스러움이 표정에서 묻어나는 남자는 지점 직원이 앞에 가져다 놓아둔 찻잔을 보다가 손에 든 명함을 꼼꼼히 살핀 뒤 민주를 마주 보았다.
-"저희가 이번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사실상 대일건설이 지금 이렇다 저렇다 해도 하청 쪽에서는 어찌할 수 없는 곳인데.
덕분에 큰 걱정을 덜었습니다."
건설 설계, 감리회사인 사람숲에서 어떻게든 감사 인사를 올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평소 은행을 왕래하던 재무부장이 올 거라 생각했던 민주는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대표를 보고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건설계의 후불관행으로 인한 피해 사례를 자주 접하는 그녀였지만 '아너스팰리스' 시공사인 대일건설의 경우는 상당히 복잡한 상황이었고 정보를 아는 소수만이 암암리에 움직이는 상황에서 설계와 감리 비용을 받지 못한 '사람숲'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평소 그녀와 친분이 있는 재무부장의 말로는 대표 성격이 고지식해서 어디에도 고개숙일 줄 모르는 사람이라 대한민국 건설판에서 살아남기 힘든 희귀종이지만 실력과 믿음으로 지금까지 회사를 이끌어왔는데 이번에 대일건설 쪽 대금 지급이 밀리면서 유동성 자금에 문제가 생겼다고 그녀에게 걱정을 토로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은행의 지점장직을 수행하는 입장에서 그녀는 사람숲의 대출기한 연장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선우와 '공넘기기'를 얘기하던 그 순간 민주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럼 이 폭탄을 누구에게 돌리지?'
-"어.. 그래. 그래. 넌 거기 앉고...
어.. 너.. 그래... 뭘 두리번거려.. 너 말이야. 넌.. 내 옆."
17년 산 조니워커블루와 생수, 맥주와 얼음통과 스카치 잔과 스트레이트 잔 그리고 각종 안주가 놓인 대형 테이블 옆 벽 쪽으로 빙 둘러진 소파의 중 중앙에 자리한 주리아는 출입문 앞 쪽에 일열로 서 있는 남자들을 손가락으로 지명해서 자리를 정해 앉혔다. 그녀 곁에 앉은 중년의 여성들은 자신의 옆자리에 남자들이 앉자 흥분하기 시작했다.
-"어머.. 언니. 지난번에 주식으로 돈 좀 만지셨다더니, 우리까지 콩고물 묻혀주고. 너무 좋다. 응"
유일증권 김상무 부인이 촐싹거리기 시작하자 옆자리에 있던 MG백화점 박이사 부인이 남편 흉을 보기 시작했다.
-"허.. 저만. 밖에서 놀 줄 아냐. 나도 놀 줄 안다.
이 양반아.. "
박이사 부인이 옆자리에 앉은 남자의 허벅지를 더듬자 룸에 있던 여자들은 왁자하게 웃고 떠들기 시작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양주잔에 술을 따르기 시작한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술을 먹이며 더듬기 시작했고 스트레이트 잔에 양주를 가득 따른 주리아는 옆에 앉은 선우에게 술잔을 건네며 슬며시 그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잔을 든 선우는 순간 등에 소름이 돋았다. 잠시 후 등에 돋은 소름보다 더 소름 끼치고 끈적한 음성이 그의 귓가에 달라붙었다.
-"듣자니 가수 접고 배우를 한다고....
내 말 잘 들으면 내가 다음 작품에 조연으로 바로 꽂아주지."
'꽂아준다'는 말과 함께 자신의 몸으로 파고드는 손을 기겁해서 떨쳐낸 선우는 그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길거리를 미친 듯이 뛰는 그의 눈에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눈물이 솟구쳤다.
'선우야.. 사람이 밥은 굶어도 바르게 살아야 한다.'
평소 엄마가 하셨던 말씀이 떠오른 선우는 그 여자가 만졌던 자신의 몸을 당장이라도 박박 씻어내고 싶었다.
한참을 뛰던 그가 토할 것처럼 격한 호흡을 토해내며 바닥에 주저앉았을 때 좋은 기회를 소개해준다며 자신을 내몰던 매니지먼트 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지금 늬 나이가 몇이야?
이제 춤도 안되고 원래도 보컬은 약했고 지금 배우 전향 외에는 방법이 없어.
매니지먼트 비용도 회수 안된 거 다 빚인 거 알지?
주리아 선생님 눈에만 들면 배역은 따놓은 당상이야.
언제까지 엄마 고생 시킬 거야. 이제 너도 좀 떠야지."
길바닥에 주저앉은 선우의 눈앞에 한강이 내려다보였다. 중학교 이학년 때 같이 BOY그룹으로 스카우트됐던
한기준이 저 너머 한강뷰 아파트를 구입했다는 기사를 몇 년 전에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엄마가 없는 돈에 마련해 준 매니지먼트 비용이 매 순간마다 떠올라서 그 누구보다 더 열심히 했지만 매번 그에게는 기회가 없었다. 언제나 센터로는 약하다. 이번에는 비주얼로 가니까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노리자.
보컬이 약하다. 멤버 간 구성 콘셉트에 안 맞는다.
무려 십오 년이 넘는 시간이 그렇게 흘러갔다. 하지만 아무것도 이뤄놓은 것도 손에 쥔 것도 없이 나이만 먹은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야.. 너 가지 마. 주리아 그 여자 배역 미끼로 젊은 애들 갖고 노는 거 이 바닥에 소문 다 났어.'
사장의 말을 듣고 고민하는 그에게 다가온 로드 매니저가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지만 그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거란 생각에 포기할 수가 없었다.
결과는 몸도 마음도 추스를 수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였다.
선우의 엄마에게 인사를 드리고 나오던 날 밤, 편의점의 간이 테이블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민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