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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묭롶 Aug 05. 2024

즐거운 나의 집.

12화. 실신.

Samuel, I'm going to sleep a little longer.

(사무엘, 저 조금 더 잘래요.)


Samuel, it smells delicious.

(사무엘, 맛있는 냄새가 나요.)


What kind of soup is it today?

(오늘은 무슨 수프예요?)



선우는 하루가 지나도록 잠든 채 누워있던 민주가 무어라 입을 달싹이기 시작하자 민주에게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꿈을 꾸는지 미소까지 지은 그녀가 영어로 말하기 시작하자 선우는 의료진 호출벨을 누른 뒤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레 흔들었다.


"저기요.  정신이 좀 드세요?"






미국에서 귀국한 이후 불규칙한 수면과 섭식 장애로 민주의 몸은 본인 스스로 느끼기에도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토요일 오후 네시 약속만 아니라면 몸을 일으킬 상황이 아니었지만 민주는 정오가 다 되어서야 가까스로 침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거실로 나와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어 한 모금 마신 그녀는 생수병을 든 채로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귀에서 경고음처럼 '삐이~~~~'하고 이명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 그녀는 피식 웃었다.


'약이 하나 더 늘겠군.'


이러다간 정말 약속에 늦겠다 싶어진 그녀는 억지로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의 물이 쏟아지기 시작하자 현기증이 밀려왔지만 떨리는 손으로 샤워를 마친 그녀는 어찌어찌 매무새를 단장한 뒤 숄더백을 걸친 후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려다 지금 상태로 운전이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에 지하 1층 현관으로 다시 올라왔다.

아파트는 말복 지났지만 뜨거운 오후의 태양에 도로가 한껏 달궈진 상태였고 아파트 입구를 거슬러 큰길까지 걸어 나갔지만 빈 택시는 보이지 않았다.  평소 누군가와의 약속에 늦어본 적이 없는 민주는 당황했다.

어렵게 택시 어플로 프리미엄 요금을 지불하고 택시를 탔지만 약속장소인 카페 인근에 정차했을 때는 이미 약속시간에서 십 분이 지나 있었다.  급하게 택시 요금을 지불한 민주는 다급히 카페가 있는 모퉁이를 빠르게 뛰어서 돌다가 큰 벽에 부딪혔다.  그녀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오래간만에 잡힌 개인 PT(퍼스널 트레이닝) 시간이 약속시간과 맞닿아 있어 아슬아슬했지만 헬스장이 약속장소와 가까우니 뛰어가면 되겠다는 선우의 계획은 PT 시간에 늦게 온 회원 탓에 어그러지고 말았다.  애써 웃는 으로 회원을 지도한 뒤 급히 옷을 갈아입고 백팩을 걸쳐 멘 선우는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아쉬운 부탁을 해야 되는 입장에 늦기까지 하다니 정신이 아득하기만 했다.  시간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거리의 튀어나온 모서리에 위치한 카페에 들어가기 위해 모퉁이를 뛰어나오던 그의 몸통에 한 여자가 부딪힌 순간 그는 빠르게 쓰러지는 여자의 등을 손으로 받쳐 들었다.  당황한 그는 자신에게 부딪힌 여자의 상태를 확인하려고 고개를 숙였다가 그 여자가 자신과 만나기로 한 대한은행 한민주 지점장인걸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는 이내 정신을 차려 그녀의 상태를 다시 살피고는 그녀가 축 늘어져 의식이 없어 보이자 그녀를 안고 인근 병원으로 뛰기 시작했다.  다행히 도보 오분거리에 자신의 어머니가 입원해 있는 서일 종합병원이 있었기에 그는 곧바로 병원 응급실로 들어가 의료진을 찾았다.


"여기요.  사람이 쓰러졌어요."


여자를 안고 들어온 선우 곁으로 의료진 한 팀이 급히 다가와서 침상에 누인 민주의 눈꺼풀을 들어 올려 동공반사를 확인하고 심박수를 측정했다.  곧바로 검사를 위해 침상째로 이동하는 민주를 바라보던 선우는 원무과로 갔다가 그녀의 인적사항과 관계를 묻는 원무과 직원의 질문에 잠시 멈칫했다.  


'아.  나는 저 사람 인적사항도 모르는데,  아참.  저분 숄더백 안에 신분증이 있겠구나.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지.'


남의 가방을 여는 것이 꺼려지긴 했지만 숄더백 속 지갑 안에서 신분증을 찾는 그의 손에 미국 시민권과 국제면허증이 잡혔다.  그는 국제면허증을 꺼내 원무과 직원에게 건네고는 관계를 묻는 질문에 조금 망설이다 '지인'이라고 답했다.  

한 시간 반이 지난 뒤 민주가 누워있는 침상이 응급실로 돌아왔다.  침상으로 다가간 그에게 피곤에 절어 꺼칠해 보이는 응급실 담당 레지던트가 차트를 보면서 상태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단은 현재 상태는 의식을 잃은 건 아니고 잠이 든 상태입니다."


레지던트의 말에 시체처럼 누워있는 그녀를 내려다본 선우가 다시 그에게 반문했다.


"네?  이게 잠이 든 거라고요?"


그의 반문에 피곤하고 귀찮다는 듯이 맞은편에 서 있는 선우를 올려다본 레지던트가 다시 습관적으로 차트를 보고는 그에게 말했다.


"장기간의 수면부족과 영양실조,  아.. 그리고 이 환자분 약 처방 이력을 보니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보이네요.  이 모든 게 겹쳐서 실신하신 겁니다.  우선 링거 처방 했으니 일반 병실에서 깨어나길 기다리시면 됩니다"


그의 말에 멍하니 서 있는 선우는 아랑곳하지 않은 레지던트는 간호사에게 링거 처방을 전달하고는 다시

다음 병상으로 이동했다.  






병상에 누워 있는 민주의 곁에 앉아 그녀를 내려다보는 선우는 마음이 심란했다.  어차피 주말엔 어머니 곁에 있어야 했지만 거기에 한 명을 더 돌보게 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멀쩡하게 생긴 은행 지점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자신과 부딪혀서 쓰러질 줄은 상상도 못 했고 또 요즘 세상에 영양실조라니 도대체 무슨 사정이 있었던 건지 그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의사의 말로는 단순히 실신해서 잠이 들었다지만 핏기 없는 얼굴과 핏줄이 다 들여다보이는 얇은 팔목은 그냥 이대로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버릴 것만 같아서 그는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매 순간 고통을 참다 참다 견디다 못한 어머니가 진통제를 맞고 까무룩 정신을 놓을 때면 그는 잠이 든 어머니의 코에 조심스레 손을 가져다 숨을 쉬는지를 확인하곤 했다.  

지금도 하루가 다 지나도록 깨어나지 않는 그녀를 지켜보던 선우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코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 보았다.  






'어딘가에서 익숙하고 그리운 사무엘의 수프냄새가 나는 것만 같아.'


금방이라도 자신을 깨우는 사무엘의 목소리가 들려올 것 만 같아서 너무 졸리지만 이제 그만 잠에서 깨야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뜬 그녀의 시야에 자신의 어깨를 흔드는 한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그녀의 눈동자가 혼란스러움에 흔들릴 때 깨어난 그녀를 보고 놀란 남자가 뒤로 화들짝 물러났다.


남자가 뒤로 물러선 뒤에도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풍겨오자 민주는 갑작스러운 허기에 배를 움켜쥐었다.  

그동안 제대로 된 음식물을 섭취해 본 지 오래된 위장이 한꺼번에 모든 것을 되찾겠다는 민중 봉기라도 일으킨 것처럼 그녀는 냄새의 근원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의 흰 티에 박힌 자신의 립스틱 자국을 먼저 발견하고 말았다.  

그제야 자신이 카페 앞에서 부딪힌 것이 큰 벽이 아니라 이 남자의 가슴팍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얼굴이 확 붉어졌다.  어떻게 같은 사람 앞에서 한 번은 토하고 한 번은 쓰러질 수가 있는지 앞이 막막하기만 했다.  


깨어나자마자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는 그녀를 본 선우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스트로가 꽂힌 생수병을 건넸다.


-"오래 잔 뒤에 물 한꺼번에 드시면 안 좋으니 천천히 한 모금씩 빨아 드세요."


누군가에게 따뜻한 보살핌을 받아본 것은 사무엘이 전부였던 그녀는 그가 베푸는 호의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멍하니 그가 시키는 대로 그가 건네는 생수병을 받아 드는데 그의 손가락에서 고소한 향이 맡아졌다.  

코를 실룩이는 그녀를 본 그가 병상 옆에 놓인 보온통을 그녀 눈앞에 들어 보였다.


-"배고프죠.  어머니 거 죽 쑤면서 좀 덜어왔어요.  우선 물부터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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