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는 세상을 버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엄마 배속에 있던 시간을 제외하고 무려 십일 년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 했지만 내 기억 속에서 아버지에 대해 따뜻한 기억은 전혀 없다. 언제나 술에 취해 있거나 술에 취해 폭력을 휘두르거나 아니면 숙취에 절어 있던 모습이 기억의 전부였다. 그런 그가 세상을 버렸다고 했을 때 나는 어린 나이지만 내 삶이 불행하다는 생각에 슬퍼서 울었다. 이후로 그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뒷감당을 모두 미뤄둔 채 비겁하게 생을 저버린 남자에 대한 분노와 증오에 치를 떨어야 했다. 그런 이유로 그는 내 인생 아니 나의 입에서 거론되거나 내가 쓰는 글에 등장하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로 인해 태어난 내 존재 자체를 소거하고 싶을 정도였으니 나는 차라리 아비 없이 태어난 독생자이고 싶었다.
그 맹렬했던 증오가 한 풀 꺾인 것은 내 나이 마흔이 넘은 어느 날이었다. 알베르 카뮈의 책을 읽다가 자신보다 젊은 나이게 죽어서 땅에 묻힌 아비를 보고 상념에 잠긴 알베르 카뮈의 문장을 접하는 순간 내가 어느새 나이 마흔에 세상을 버린 그 남자보다 나이를 더 먹어버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우습게도 나는 그 순간 만약 나중에 저 세상이라는 곳이 있어서 그곳에서 만난다면 나보다 젊을 것이 분명한 그 남자를 과연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 잠시 웃음이 나기까지 했다. 어쨌든 나이를 한 살이라도 더 먹고 죽은 내가 그렇게 세상을 버리고 간 것에 대해 이제는 따져 묻고 훈계도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내가 아버지의 죽음을 마지못해 받아들이기까지 무려 십팔 년의 시간이 걸렸던 것처럼 부모님의 죽음을 놓고 고인이 되신 그분의 삶을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사실상 쉬운 일이 아니다. 익숙했던 무언가가 사라졌을 때의 부재(예를 들어 밤마다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던 아버지가 없어진 이후의 낯설었던 밤의 고요처럼…….. )는 새삼 사라진 무언가를 의식하게 하지만 그 무언가는 나의 의식에서 실체가 모호하기만 하다. 마치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서 엄마의 부고를 접한 뫼르소가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경백(敬白)’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 <이방인> p21
어쩌면 소설 속 <이방인>의 뫼르소의 엄마보다는 페터 한트케의 엄마는 사는 동안 <소망 없는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지만 뫼르소 엄마보다는 더 나은 경우로 보인다. 물론 소설 속 작중 인물인 뫼르소와 작가 페터 한트케 모두 그들의 어머니에게는 타자에 불과하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심지어 현대인은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조차 타자인 경우가 많으니 남편은 물론 자식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엄마의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페터 한트케는 자신의 어머니의 삶에 대해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족이 아닌 작가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엄마의 삶은 한 사람의 여성이라기보다는 그 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모든 여성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 ~모기들, 곤충들, 낮에도 날아다니는 나방들, 통나무 헛간의
널빤지들 속에 있는 벌레들과 지네들,
누구나 이런 것들에 길들여져야 했고 다른 도리가 없었다.
소망 없이 사는 게 어떤 식으로든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으며,
소망 없이 사는 걸 모두가 불행하게 생각했다.
그렇다고 더 이상 욕망도 없었을까? ] p19
빈농의 딸로 태어나 마음껏 웃을 수 있는 자유도 자신의 의지를 펼칠 수 있는 기회도 박탈당한 채 가족의 생계를 위한 노동력을 제공하다가 생활력 없는 남자를 만나 줄줄이 생기는 아이를 알아서 유산시켜야 했으며 생계를 위해 전후 동독을 탈출하여 친정이 있는 오스트리아로 탈출했지만 여전히 스스로 주체적이라고 할 만한 자신의 삶을 찾지 못한 채 신경쇠약과 두통에 시달리다가 제 몸에서 실을 뽑아내다가 껍데기만 남은 거미처럼 약을 먹고 자살한 엄마……………
그런 엄마의 삶을 엄마 스스로 덤덤하게 얘기하듯 담아낸 작가의 글 속에는 감정과잉이 없다. 엄청나게 큰 시대라는 격류에 휩쓸린 작은 물줄기처럼 죽음이라는 사건조차도 아무런 파문을 일으키지 못한 채 스러져버린 한 여성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 또 그러한 시대를 살아간 여성들의 삶이 어떤 것인지 작가는 자신의 어머니를 빌어 한 세대를 사는 여성을 작품 속에 담아낸 것이다.
강 하류에 앉아서 흘러내리는 물을 보고 있노라면 저 상류에서부터 시작된 물줄기가 지닌 사연도 중간에 그 물줄기에 합류된 물줄기의 사연도 개별성을 갖지 못한 채 그저 한 물결이 되어 흘러내리지만 그러한 물결 속에도 한때 빗물이 되어 꽃나무에 떨어져 나무속을 돌다가 나온 물방울도 있고 떨어지자마자 구정물로 떨어져 오물 속을 떠돌다 합류된 물방울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 책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 담담한 문체가 오히려 더 애틋해서 더 안타까웠다. 글 속에 담지 못한 엄마의 삶에 대한 회한과 동정 그리고 아픔과 기쁨 또 추억이 그 마침표 하나하나에 묻어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오히려 슬펐다.
<아이 이야기>
자신의 엄마에 대한 글에서는 담담한 객관성을 읽지 않던 것과는 다르게 <아이 이야기>에는 작가가 아닌 아버지로서의 페터 한트케의 솔직한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사이가 멀어져 버린 아내와 별거 이후 아이를 혼자 데리고 살아야 하는 글 쓰는 남자로서의 악전고투와 맘고생이 여실히 드러난 문장을 보면서 육아로 인한 가슴앓이는 동서양과 세대를 달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그때 그는 날마다 벌어지는 일에 영감을 주었던 것이
바로 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가 없다면 그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이다. ] p143
어린 딸이 목마를 타는 동안 잠시 눈에 보이지 않는 잠깐의 시간 동안 느꼈던 아득한 느낌의 거리감과 다시 딸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의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면서도 딸아이가 독립적인 사람으로 자라나길 바라는 아버지의 복합적인 시선이 담긴 문장을 읽으며 나 또한 내 딸아이를 돌아보고 있었다.
새로 지은 집이 침수로 쑥밭이 된 처참한 와중에도 위층에서 울어대는 딸아이를 부지불식간에 때리고선 죄책감에 몸서리치는 모습과 동무와 어울리지 못하는 딸을 지켜봐야 하는 부모의 안타까움 등….. 엄마 없이 혼자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 페터 한트케의 글을 읽으며 동병상련의 입장에서 등이라도 두들겨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 ~그래서 아이는 혼자 있었던 때보다 눈에 띄게 생기를 얻었고
다른 아이들 사이에서 의 도덕으로 몸의 관절과 머리칼을 움직였고 울리는 목소리를 냈다.
책임자인 그는 아이를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그저 (원래대로 내버려 두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아이를 (그리고 다른 아이들을) 위해 <늘 곁에 있는 사람>으로
함께 있을 때 그들 모두를 끌어모으는 힘으로서,
이상적으로 투입된 에너지로서 효과를 냈다.
~그렇게 그는 훌륭한 교사란 무얼 의미하는지 점차 알게 되었다. ] p133
<아이 이야기>는 아이의 어린 시절만을 이야기할 뿐 이후의 이야기는 들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페터 한트케의 딸이 누구보다 잘 자랐을 거라고 믿는다. 물론 아버지와의 그 모든 순간이 모두 행복하고 순탄하지는 않았겠지만 누구보다 더 많은 가능성에 대한 이해를 가진 아버지를 두었으니 삶이라는 다양한 변수에 대해 그 누구보다 더 많은 자료를 지닌 교과서가 되지 않았을까.
어두운 밤에 비까지 내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무모하게 함께 손을 잡고 걸음을 내딛기보다는 도움이 될 만한 지혜를 겸비한 엄마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이 글을 읽으며 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