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치는여자 #엘프리데옐리네크 #책 #소설 #문학동네
내게는 5년 넘게 키운 호야가 있다. 이 친구를 처음 만난 건 근교로 발령이 났던 5년 전 겨울이었다. 좁은 사무실 책상 위에 가로 세로 5cm 남짓한 화분에 담겨 있던 호야는 나의 전임자가 키우던 식물이었다. 전임자가 이 식물까지 나에게 인수인계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열악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해 애쓰는 그 식물이 안타까워서 봄날 따뜻한 햇살 아래로 작은 화분을 옮겨서 햇빛을 쬐게 해 주고 비가 내리는 날엔 밖에 내놓아 빗물을 받아 마시게 했다.
그렇게 3년 여의 시간이 지나 다시 시내권으로 발령이 날 때쯤 나는 비좁은 화분에서 몸살을 하며 부대끼던 이 식물을 우리 집 큰 화분에 옮겨 심었다. 넓은 화분에 옮겨 심은 후 호야는 줄기가 두터워지고 덩굴을 돋우어 신나게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매년 연분홍 빛이 나는 꽃도 펴내서 우리 딸아이의 사랑도 듬뿍 받았다.
[ ~옷을 입는 데 있어서 어머니는 당할 사람이 없는 통제자다.
어머니는 에리카가 어떤 모습으로 외출해야 하는지를 결정한다.
~에리카가 그런 옷을 입고 낯선 남자들과 놀아날까봐
어머니는 두려운 것이다. ] p15
여기 엄마라는 좁은 울타리에 갇혀 사는 에리카가 있다. 그녀에겐 울타리를 넘어 덩굴을 뻗어낼 자유가 허락되어 있지 않다. 행여 딸이 살랑거리는 바람과 따스한 햇살에 바깥으로 팔을 뻗을까 봐 엄마는 바깥으로 향한 창문을 모두 닫은 채 딸을 음지에 가뒀다. 동물원에 갇혀 이상행동을 보이는 동물들처럼 에리카는 좁은 공간 속에서 자아를 펼쳐내지 못한 채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곪아버렸다.
[ 그녀는 이집트의 미라처럼 그날그날 의무의 사슬로 졸라매어져 있으나,
아무도 그녀를 관찰하려고 애태우는 사람이 없다.
삼 년 동안 줄기차게 하이힐 한번 신어보는 게 소원이었고,
결코 자기 소원을 잊거나 체념하는 일은 없었다. ] p115
에리카는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경험하지 못한 채 대부분의 욕구를 표출하지 못했고 충족되지 못한 채 억눌린 욕구는 에리카 내부에서 잔뜩 비틀리고 뭉개진 기형성을 띠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에리카는 <노트르담의 꼽추>의 콰지모토나 <오페라의 유령>의 팬텀과 닮은꼴이다) 에리카는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은 훔쳐서 부서뜨리거나 쓰레기통에 쳐 박고 만원 전철 안에서 익명의 타인을 향해 폭력을 저지르며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들에게 정신적 폭력을 휘둘렀다.
[ 에리카의 육체는 한 번도, 면도용 거울 앞에 펼쳐진 표준 자세에서조차도
그녀 육체의 침묵의 비밀을 폭로한 적이 없었다.
그 육체를 소유한 에리카 자신에게조차도!
그런데 스크린 위에 있는 육체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
매춘 시장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여자들이 있는지 살펴보고 싶은 남자를 위해서도,
그리고 닫힌 관찰자인 에리카를 위해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 p151
그런 그녀에게 열여섯 살 어린 제자인 클레머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접근해왔다. 클레머에게는 에리카가 그저 나중에 남자들끼리 자랑삼아 얘기할 만한 전리품(정복의 대상)에 불과했지만 그녀에게 클레머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사랑의 가능성이었다. 하지만 에리카는 사랑하는 방법을 모른다. 아버지가 정신병원으로 실려간 이후 엄마의 남편 역할까지 해야 했던 그녀로서는 여성의 역할을 수행해낼 방법을 찾아낼 길이 없었다.
[ 제발 그가 갑작스럽게 때리지 말았으면,
하고 여자는 두려워한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자신이 수년 전부터 이처럼 맞고 싶어했노라고 말한다. ] p304
그녀는 그래서 자신의 엄마가 그녀의 삶에 지속적으로 지시를 내리고 감독을 했던 것처럼 클레머에게 자신을 가혹하게 다뤄달라는 지시내용을 편지로 써서 읽게 했다. 그녀는 클레머가 편지 내용과는 다르게 자신을 사랑하고 보호해주기를 바라지만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싶지 않다고 도리어 밀어내는 아이처럼 클레머에게 몸을 주는 것을 거부했다. 그녀의 비정상적인 행동에 바짝 약이 오른 클레머는 편지의 내용처럼 에리카를 난폭하게 폭행하고 강간했다. 클레머에게 폭행당한 다음날 에리카는 고기 써는 칼을 가방에 감춘 채 클레머의 학교로 찾아가지만 그를 향해 칼날을 꽂지 못하고 자신의 어깨에 칼을 꽂은 채 집으로 돌아갔다.
[ 여자는 예쁘기 전에 행동의 자유를 잃지 않도록 우선 실용적이어야 한다.
클레머는 에리카를 소유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빛깔과 천 등으로 겉만 치장한 뼈와 살의 꾸러미를 한 번 풀어보고 싶을 뿐이다.
포장지는 구겨서 그냥 던져버릴 생각이다. ] p264
지금 열 살인 딸아이를 키우는 나로서는 <피아노 치는 여자>를 읽는 내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에리카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무분별하고 자유분방한 남자 사촌의 경우를 넘어선 행동마저도 웃으며 허용하는 에리카의 엄마와 할머니는 대를 이어 여자에게만 금지되는 모든 것들을 떠올리게 했다. 길가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도 문지방을 밟고 넘어서는 것도 무슨 행동만 하면 여자애가 그러면 안돼라는 그 무수히 많은 터부와 금기들이 떠올라서 작중 인물인 에리카의 사촌을 내가 후려치고 싶을 정도였다. 이 작품 속의 에리카의 성장기가 작가 자신의 이야기라는 역자 후기를 읽으며 이 정도 환경이라면 정신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작중 인물 에리카는 어깨에 칼을 꽂은 채 엄마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지만 이 작품의 작가인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엄마를 벗어나 작가가 되었고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되었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피아니스트>를 먼저 보았다. 영화만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던 에리카의 심리(왜 클레머가 아닌 자신을 향해 칼날을 박아 넣었는지)를 책을 통해 접하면서 나는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한국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음을 치유해준다는 음악마저도 엄마의 욕망을 위한 수단이 됨으로써 음악마저도 일말의 탈출구가 되지 못한 채 그녀를 가두는 또 하나의 족쇄가 되었으며 그러한 이중 감옥(엄마와 음악)에서 벗어나지 못한 에리카가 너무 안타까워서 읽고 나서도 참으로 마음이 무겁다.
끝내 행복해질 수 없을 것 같은 에리카를 지켜보며 나는 역으로 살아가면서 행복해진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본다. 그리고 내가 생각한 최선이 내 딸아이에게는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신이 어디를 향해 덩굴을 뻗는지 알지는 못하겠지만 이곳저곳 사방으로 길게 손가락 발가락 같은 덩굴손을 뻗는 나의 5년 된 호야를 보면서 내 딸아이의 생각 줄기와 마음 줄기가 여성을 향한 그 모든 금기를 넘어서 줄기를 힘차게 뻗기를 희망 해 본다.